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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가장 큰 반란인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홍가신을 기려 세워진 사당 만전당 전경. 이순신 현충사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으니 꼭 찾아보시기를!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가장 큰 반란인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홍가신을 기려 세워진 사당 만전당 전경. 이순신 현충사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으니 꼭 찾아보시기를! ⓒ 정만진

만전당 주소를 충남 아산시 염치읍 만전당길 120번길 3-18로 소개하면, 아산 일대에 거주하지 않는 이들은 그 위치를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충사 동북쪽 1km 지점이라고 하면 대략 어디쯤인지 가늠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순신 유허인 현충사는 워낙 많은 국민들이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선무 1등공신이다. 선무공신은 직접 싸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을 말한다. 그에 견줘, 칼을 들고 왜적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선조를 호위하여 피란을 다니면서 나랏일을 하고 임금을 보살핀 사람들은 호종공신이라 한다.

1601년 3월 14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는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군의 은혜"라고 단정한 후, "명군이 온 것은 모두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명나라에 호소한 덕분"이라면서 "우리 장수들은 적장의 머리 하나 베거나 적진 하나 함락한 적이 없었다"라고 의병과 조선군을 멸시한다.

당연히 선조는 1604년 6월 24일 처음으로 공신 104명을 확정하면서 그 중 86명을 호종공신으로 채운다. 게다가 24명은 내시, 6명은 임금의 말을 끄는 이마(理馬)였다. 곽재우, 조헌, 고경명, 김천일 등 의병장은 한 명도 넣지 않았다.

이순신은 선무1등공신, 홍가신은 청난1등공신

만전당에 모셔진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이다. 즉, 청난공신은 선무공신과 호종공신과는 또 다른 성격의 공로를 세운 사람들이다. 선무공신이 칼을 들고 왜적들을 무찔렀고, 호종공신이 임금의 말고삐를 잡거나 중국과의 외교 업무 등에 종사했다면, 청난공신은 임진왜란 기간 중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만전당 바로 앞의 '홍가신 기념관'
만전당 바로 앞의 '홍가신 기념관' ⓒ 정만진

민중의 반란은 전쟁 초기부터 일어났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란을 떠난 1592년 4월 30일, 백성들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에 불을 질렀다. 법을 집행하는 형조, 노비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도 불태워 없앴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의 집에도 방화를 했고, 궁궐에 들어와 금은보화를 털어갔다.

함경도 사람들의 반란 의식을 보여주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자 기사 일부


왜장 가등청정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신하들을 잡아 적에게 넘기면서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당초 가등청정이 재를 넘어 왕자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니 왕자들은 경성으로 도망하였다. 북병사 한극함이 마천령에서 항거하여 싸웠으나 해정창이 왜군에게 차단당하자 패하여 도망하였다. 왕자가 진로를 바꾸어 회령부로 들어갔는데 적병이 가까이 추격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의 토병이 이미 모반하여 거짓으로 성을 지키겠다면서  문을 잠그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국경인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장이라 일컬으며 군사 5천으로 군을 결성하였다. (중략) 국경인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 시종들과 노비들, 김귀영·황정욱·황혁과 그들의 가속을 잡아 모두 결박했다. (중략) 여러 진(鎭)과 보(堡)의 토병(土兵, 지역 군사) 등이 모두 관리를 붙잡아 바치면서 항복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점령하게 되었다.

경성의 호장 국세필(鞠世弼)이 맨 먼저 배반하여 판관 이홍업을 붙잡아 적에게 넘겨주었으며, 한극함은 경원의 민가에서 붙잡혔다. 청정이 수천 명의 군사로 길주를 지키게 하고, 명천 이북의 8진은 모두 반민(叛民)으로 수령을 삼았다.

7월 18일 마천령을 넘어 함경도로 들어갔던 함경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은 해정창(함북 성진) 전투 때 1차전은 승리하지만 적의 야습으로 벌어진 2차전에서 패퇴하고 좀 더 북쪽인 경성 방향으로 달아난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조선 백성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진다. 그뿐이 아니다. 회령에서는 국경인(鞠景仁) 등이 선조의 아들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일본 2군 사령관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에게 선물로 바치고 함경 북병사, 경성부사 자리에 앉는다.

이 무렵 종성부사 정현룡은 일본군에게 항복 문서를 보낸다.

"나를 보살펴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가  주인이 된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

백성들의 선조와 조정에 대한 반감을 잘 보여주는 문서는 임진왜란 발발 얼마 후인 1592년 6월 28일자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김성일의 장계이다. 김성일은 나라를 배신한 백성들이 오히려 왜적의 편에 서서 아군을 공격하는 실상도 알린다.

"왜적은 대부대가 서울로 떠난 뒤에 잔여 왜적이 혹은 1백여 명, 혹은 50∼60명씩 부대를 편성하여 곳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중략) 수사(원균)가 성으로 들어가려고 고성현 지경에 배를 대자 왜적 1백여 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재차 와서 성을 점거했습니다. (중략) 왜적은 몇 명 안 되지만 그 중 절반이 배신한 백성들이니(半是叛民) 매우 한심합니다(極可寒心)."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청난공신이라 불렀다. 그 중 1등공신 홍가신을 기려 세워진 '홍가신청난비'가 홍성읍에 있다. 아산 만전당과 홍가신기념관 앞에는 이 비를 복제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청난공신이라 불렀다. 그 중 1등공신 홍가신을 기려 세워진 '홍가신청난비'가 홍성읍에 있다. 아산 만전당과 홍가신기념관 앞에는 이 비를 복제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도적의 이름을 딴 지리산 고개

최초의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군은 지리산을 근거로 활동했다. 김희(金希)와 고파(高波)는 수 천 무리를 거느리고 진안, 운봉, 남원, 거창, 안음, 함양 등지를 드나들면서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마구 죽였다. 이들은 거의 3년 동안 기세를 떨쳤는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반군 장수 임걸년(林傑年)은 지리산 험준한 고개 중 한 곳인 임걸령(林傑嶺)에 자신의 이름도 남겼다.

김희, 고파, 임걸년 등은 그래도 규모가 큰 산적떼 수준이었지만, 1594년 1월 15일을 한양 진격일로 잡은 송유진(宋儒眞) 무리는 본격적인 반란군이었다. 송유진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농민들에게 인심을 베푸는 등 백성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세력을 키웠다. 충청병사 변양준의 무사 김응룡이 꾀를 냈다.

김응룡이 "저의 조카뻘 되는 홍곡(洪穀)이 송유진의 종사관으로 있다고 합니다. 이 자를 유인하면 적당의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고 병사에게 계책을 말했다. 속수무책으로 있던 병사는 즉각 김응룡의 말을 실행에 옮겼다. 김응룡은 홍곡을 협박하고 또 설득하여 송유진을 직산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 마침내 체포한다. 홍곡을 신뢰했던 송유진은 이날 약간 명의 부하만 데리고 직산으로 나왔다. 송유진의 거창한 야망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반란군의 말만 듣고 유명 의병장을 죽이는 선조

선조는 송유진의 반란과 관련하여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을 죽였다. 송유진이 세력을 모으면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우리의 수령은 이(李)가인데 이름은 아직 밝힐 수 없고, 지금 청계산에 머물고 있다" 하고 떠들었는데 그 이가로 이산겸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1594년 1월 1일자에는 '의병장 이산겸이 역적의 무고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역적과 대질했을 때 역적의 말이 허황했는데도 이산겸은 오래도록 구금된 채 풀려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이산겸이 의병을 장악하고 해체하지 않은 그 정상이 의심스럽다" 하고 주장하니 선조가 형추(고문)를 명령했다. 그가 고문을 받아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을 고문 끝에 죽인 선조는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도 고문 끝에 죽인다. 이번에는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계기가 되었다. 송유진의 반란보다 약 2년 6개월 뒤에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은 임진왜란 때 봉기한 여러 반란군 중 가장 규모도 웅대했고, 점령 지역도 넓었고, 사회에 미친 영향도 컸다.   

1596년 7월 6일, 서얼(첩의 자식)이기 때문에 출세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소 불만이 많았던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선조와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을 활용하여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좋지 못한 언행을 일삼다가 서울 집에서 쫓겨나 전라도 모속관 한현(韓絢) 아래에서 일하던 이몽학은 그 본인도 서얼 출신이라 불평이 많았던 한현부터 끌어들였다.

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이몽학의 반란

반란군은 홍산(부여 홍산면)과 임천(부여 임천면) 관아를 점령하고 현감 두 명을 결박했다.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나눠주자 백성들이 몰려들어 반란군의 세력은 급속히 불어났다. 반군은 청양(충남 청양읍), 정산(청양군 정산면), 대흥(예산군 대흥면)도 접수했다. 이몽학은 송유진이 썼던 수법을 그대로 재탕했다.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장군이 우리를 돕기로 했다. 병조판서 이덕형도 서울에서 내응하기로 했다. 전국 다섯 도에서 관찰사들이 한날 한시에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한다."

이몽학 반란군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북상했다.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닷새만인 7월 10일 이몽학 군은 수원까지 올라갔다. 이때 이몽학 군의 일부는 홍주(충청남도 홍성)로 진격했다. 홍주군수 홍가신(洪可臣)은 반란군의 공격에 맞설 시간을 벌기 위해 지혜를 발휘했다. 홍가신은 이희(李希)와 신수(申壽) 두 명을 반란군에 보내어 거짓 항복을 시켰다.

홍주성 이몽학의 반란군은 홍주성(지금의 홍성)을 공격하다가 부사 홍가신에 막히면서 급속하게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홍주성이몽학의 반란군은 홍주성(지금의 홍성)을 공격하다가 부사 홍가신에 막히면서 급속하게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 정만진

두 사람은 '우리가 홍주성의 사정을 파악해 올 테니 하루만 기다렸다가 그때 공격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성 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하고 반란군 지도부를 속였다. 적들이 하루를 기다리는 동안 홍가신은 충청수사 최호의 응원군을 부르고, 홍주성 둘레에 군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뒤 반란군이 홍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치열한 공방전 중에 홍가신은 반란군을 향해 계속, 크게 외쳤다.

"김덕령 장군이 진주에서 출발했다. 이시언 충청병사, 박홍로 전라감사, 이시발 순안어사가 이끄는 군대도 예산, 유구, 청양에 당도했다. 내일이면 너희들은 모두 죽는다. 협박에 못 이겨 반군에 가담한 자가 있으면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와 용서를 구하라."

반란군은 특히 김덕령이 온다는 말에 동요되었다. 김덕령이 자기들의 수령인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반군 장수 김경창(金慶昌)·임억명(林億命)·태근(太斤)이 이몽학의 머리를 홍가신에게 들고 왔다. 유명한 관군 장수들이 반군을 돕기로 약속했다는 허위 선전을 퍼뜨린 점도 같았지만, 부하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도 이몽학은 송유진과 너무나 같았다.     

김덕령을 이몽학 반란의 배후로 몰아 죽이는 선조

선조도 송유진 반란 때와 똑 같은 모습을 보였다. 선조는 김덕령을 한양으로 끌고 와 직접 고문하여 죽인다. 이이화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에서 '벼슬아치들은 김덕령이 역적과 내통하지 않은 것을 믿었지만 누구 하나 변호하지 않았다. 어떤 자들은 "김덕령이 사람을 삼 베듯 죽이고 또 모반할 관상이니 이번 기회에 죽이지 않으면 뒷걱정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이화는 '김덕령은 26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여섯 차례 고문을 받아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그래도 무릎으로 기어다니자, 선조는 그것을 괘씸하게 여겼다. "김덕령이 곤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참으로 역적이로다." 임금의 명령에 따라 김덕령은 심문을 받을 때 큰 나무토막에 묶인 채 끌려나왔다. 그는 마침내 고문으로 옥사하고 말았다'라고 기술했다.  

 홍가신이 이몽학의 반란군을 진압한 홍주성(현재의 홍성) 관아의 정문 '홍주아문'
홍가신이 이몽학의 반란군을 진압한 홍주성(현재의 홍성) 관아의 정문 '홍주아문' ⓒ 정만진

이몽학의 반란 진압에 가장 큰 공 세운 홍가신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홍가신을 기려 현충사 동북쪽 1km 지점, 아산시 염치읍 만전당길120번길 3-18에 건립된 건물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홍가신 기념관'으로,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다. 현관 앞 조그마한 입간판에는 '관람 안내 010-5399-7431, 010-7507-5491'이라 적혀 있다. 만전당과 묘소를 본 후 전화를 드리기로 한다.

기념관 오른쪽에 만전당이 있다. 전통 기와집으로, 홍가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묘소는 사당 바로 뒤편 야산에 있다. 100m쯤 떨어져 있는 묘역을 바라보며 만전당 담장 옆으로 다가서니 외삼문으로 들어가는 대문 앞에 안내판이 서 있다.   

'만전당 홍가신(1541-1615) 선생은 조선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시호는 문장(文狀)이다. 선생은 1567년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1571년(선조 4)에 강릉참봉, 형조좌랑, 지평을, 1584년 안산군수, 수원부사를 지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파직당했다가 1593년 파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1596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하여 난을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사후에는 아산의 인산(仁山)서원과 정퇴(靜退)서원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만전집>, <만전당만록> 등이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만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초익공(初翼工)식 건물로 매년 선생의 탄생일인 음력 7월 17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만전당의 뒤편 산기슭에 선생의 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신도비도 있다.'

 홍가신 사당 '만전당', 그의 고향인 충남 아산에 있다.
홍가신 사당 '만전당', 그의 고향인 충남 아산에 있다. ⓒ 정만진

묘소 참배와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주차장 입구에 잘 지어진 비각 하나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 전에 들어올 때에는 기념관의 광채에 가려 문득 눈에 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홍가신 청난비'이다.

현충사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홍가신 유적, 꼭 가보자

청난비의 진품은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산1번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하지만 기념관과 사당, 그리고 묘소가 있는 곳에서 청난비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어서 세월이 흘러 이 복제품 청난비도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기원한다. 청난비 앞 안내판을 읽으며 오늘의 홍가신 유허 답사를 마칠까 한다.

'만전당 홍가신의 청난비는 임진왜란으로 강산이 초토화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이용해 선조 29년(1596)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쳐들어 왔을 때 목사였던 남양인 홍가신이 내란을 평정한 업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해 인조 19년(1641) 홍성에 세워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65호로 지정하여 보존되어 왔다.

2007년 한국청도공단 사업으로 비각은 해체하여 파기하고 비만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로 이설하게 되자 후손들이 비각을 출생지인 충남 아산시 영치읍 대동리에 안치하고자 인수해온 것을 2016년 8월 19일 만전당 홍가신 탄신 475주년을 맞이해 숭모회가 비는 모사(회장 맹복재 서)하고 비각은 복원하여 건립하였다.'

 '홍가신 기념관'(사진 왼쪽 뒤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과 홍가신 사당 '만전당'(비각 뒤에 가려 오비지 않음)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홍가신청난비' 복제품과 비각
'홍가신 기념관'(사진 왼쪽 뒤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과 홍가신 사당 '만전당'(비각 뒤에 가려 오비지 않음)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홍가신청난비' 복제품과 비각 ⓒ 정만진

충무공 유적지를 찾은 분들을 위하여 다시 한번, 현충사에서 아주 가까운 이곳에 임진왜란 중 일어난 반란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현충사와 이순신 장군 묘소를 찾는 길에 꼭 만전당도 답사하시라! 현충사를 벗어나면 금세 만전당과 홍가신기념관이 있고, 거기서 충무공 묘소로 출발하면 되니 여정 또한 거칠 것이 없다.

김희, 고파, 임길년은 물론 송유진과 이몽학도 힘들게 살아가는 민중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송유진과 이몽학이 한때 백성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도 뜻깊은 교훈을 준다. 임진왜란 초기 영남 사람 절반이 일본에게 붙었다는 김성일의 한탄은 물론 그런 백성들을 꾸짖는 언어이지만, 그만큼 당시 조선의 지도자들이 잘못하였다는 질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홍가신 사당 '만전당' 뒤의 홍가신 묘역
홍가신 사당 '만전당' 뒤의 홍가신 묘역 ⓒ 정만진



#정여립#홍가신#만전당#이몽학#김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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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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