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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9호 현오국사탑비 뒤로 광교산 능선이 보이는 풍경.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몰려와 절을 불태운 것으로 전해진다.
 보물 9호 현오국사탑비 뒤로 광교산 능선이 보이는 풍경.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몰려와 절을 불태운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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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난 임진년(1592) 4월, 경상도는 일본 침략군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전라도에서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순신의 수군, 김시민의 진주성, 곽재우·김면·정인홍 등 경상우도 의병들의 분투에 힘입은 덕분이었다. 도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여유가 생긴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은 군사 8천을 이끌고 당당하게 북상할 수 있었다. 이광은 근왕(勤王), 즉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출정한다는 거대한 명분을 내걸었다

하지만 전라도 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 이미 선조는 북쪽으로 피신했고, 한양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광은 그냥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그런데 무기력하게 후퇴한 자신을 두고 전라도 사람들의 민심이 들끓었다. 군사를 8천 명이나 데리고 간 관찰사가  왜적들의 코빼기도 안 보고 돌아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여론이었다.

게다가,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의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이 칼을 뽑아들고 "공께서는 중병(重兵, 많은 군대)을 거느렸으면서도 싸우지 않으니 무엇 때문이오?" 하며 눈을 부릅떴다. 이래저래 이광은 마음이 불안했다. 그는 부랴부랴 백광언에게 재출전을 약속했다.

이광, 임금의 명을 받고 서울로 재출발

심대(1546∼1592)


본관은 청송.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으로, 1572년(선조 5)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박사·수찬을 지내고, 1584년 지평에 이르렀다. 이때 동서의 붕당이 생기려 하던 시점이었는데, 그는 언관으로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근왕병 모집에 특별히 노력하여 선조의 큰 신임을 받았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지내며 선조를 평양에서 의주로 호종했다. 같은 해 9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서울 수복 작전을 계획, 삭녕에서 때를 기다리던 중 왜군의 야습을 받아 전사했다.

왜군은 그의 수급을 서울 거리에 전시하였는데, 60일이 지나도 산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전해진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공신으로 책봉된 교서(1607년)는 보물 11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361-2(처인성로827번길 116-5)에 있는 그의 묘소 또한 경기도 기념물 3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사실 그때 전라도 감영에는  선조가 보낸 심대(沈岱)가 와 있었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3일자에 따르면 선조는, 이광이 병사들을 이끌고 올라오다가 공주에 이르러 경성이 벌써 함락되고 임금도 서쪽으로 피란을 갔다는 소문을 듣고 철수하여 내려갔다는 소식에 크게 실망해 있었다.

선조는 날마다 남쪽을 바라보며 이광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역시 오지 않았으므로 선조는 개탄을 거듭했다. 이때 심대가 스스로 남쪽으로 내려가 이광에게 왕명을 전달하겠다고 자청했다. 선조는 매우 기뻐하면서 심대에게 '경이 남쪽 군대를 불러온다면 국가를 경과 함께 하겠다'라고까지 칭찬했다.

그 무렵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끊긴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 거처)에서 호남까지 오가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다. 그러나 심대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바다로 전주까지 가서 이광에게 왕명을 전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심대에게 심한 질타를 들은 이광은 다시 출병하겠노라 맹세했고, 심대는 평양에 있는 선조에게 돌아와 복명(復命, 결과 보고)했다.

다시 군사 2만을 모은 이광은 광주목사 권율 등을 대동하여 5월 2일 북진했다.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의 8천 군사와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의 몇 백 군사들도 온양으로 집결했다. 3만 명을 넘는 대군이 형성되었다.

충청도 군사는 수원으로, 전라도 군사는 수원 동쪽 용인으로 올라갔다. 백광언이 "아군이 비록 숫자는 많으나 오합지졸입니다. 이렇게 한데 모아놓으면 크게 패할 수도 있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10여 곳에 분산 주둔했다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서로 돕게 하면 대첩은 못할지언정 대패 또한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며 덤빈 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던 이광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광은 백광언의 건의를 묵살해버린 다음, 전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전진하게 했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1일자에 따르면, 이광, 김수, 윤선각은 함께 선조에게 "신들이 기병·보병 (군대의 규모를 부풀려)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달(5월) 3일 수원에 진을 쳤는데 양천의 북포를 건너 군사를 진군하려 합니다. 앞뒤 양쪽에서 들이치는 계책을 급히 지휘해 주소서" 하고 장계를 띄웠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이 기사 끝에 '김수 등이 행군해 올 때 규율이 없어 앞뒤가 서로 호응하지 못했다. 선봉 백광언·이지시(李之詩) 등은 땔나무 하고 물 긷는 왜적 10여 급을 참한 뒤 왜적을 가볍게 보고 교만한 기색을 띠었다. 김수는 이미 여러 차례 패전하여 수하에 군사도 없고 기운이 꺾인 상태였으며, 이광은 본래 용렬하고 겁이 많아 계책을 세워 대응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조정에 명령을 청한 것'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진사로 104에 있는 임진산성유적전시관의 모습. 건물 오른쪽의 적벽돌 건물은 전시관의 일부가 아니라 개신교 교회이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진사로 104에 있는 임진산성유적전시관의 모습. 건물 오른쪽의 적벽돌 건물은 전시관의 일부가 아니라 개신교 교회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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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의 지적을 요약하면, 이광, 윤선각, 김수의 3만여 군사는 숫자로는 비록 대군이었지만 앞뒤 줄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首尾不相應) 오합지졸이었다. 그래도 숫자의 위력은, 잠시나마 대단했다. 용인 언저리 북두문산과 문소산에 600명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던 협판좌병위(脇坂左兵衛, 와키자카 사헤이)는 조선군 대군이 밀려오자 겁을 먹고 서울로 후퇴할 준비에 들어갔다. 물론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병 요청도 해두었다.

6월 4일, 소수의 적군이 북두문산에 주둔하고 있는 광경을 본 이광은 곽영에게 즉각 공격하라고 명했다. 권율이 "적들이 이미 험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함부로 공격하기에는 우리가 불리합니다. 대군을 이끌고 온 공의 일거수일투족은 나라의 흥망과 직결되는 일인즉 부디 조심하시고 만약의 경우를 모두 대비하셔야 마땅합니다. 만약 소수의 적과 싸우다가 조금이라도 권위를 잃게 되면 나라의 큰일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적들은 그냥 두고 한강을 건너 임진강을 막으시면서 행재소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큰 전략이라 생각됩니다" 하고 의견을 말했지만 이광은 그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광의 지시로 정찰을 다녀온 선봉장 백광언도 "언덕과 숲이 서로 뒤섞여 있고 길 또한 매우 좁아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아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이제 이광은 화까지 내며 전군 진격을 명령했다. 결국 백광언이 선봉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던 중 나무와 물을 구하러 온 적병 10여 명과 우연히 마주쳤고, 금세 그들을 모두 죽였다.

약간의 왜군을 죽인 아군, 적 가볍게 보는 마음 싹 터

이 일로 우리 군사들의 마음에 적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싹텄다. 실록의 사초(史草, 실록의 자료가 되는 글)를 쓴 사관이 '땔나무 하고 물 긷는 왜적 10여 급을 참한 뒤 왜적을 가볍게 보고 교만한 기색을 띠었다(益輕賊有驕色)'라고 비판한 것은 이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 밤에도 백광언은 적진을 기습하여 또 10여 명의 적을 죽였다.

다음날인 6월 5일 아침 6시경, 이광은 용인현청 북쪽 문소산에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백광언도 어제의 승리에 고무되어 있던 터라 관찰사의 계획에 스스럼없이 찬동했다. 그러나 권율은 여전히 "적이 비록 소수이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앙군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싸우라 하십시오. 선봉장 이지시의 군대만으로 외롭게 전투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즉각 공격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래도 이광은 듣지 않고 이지시에게 급히 진격하라고 명했다.

광교산은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했던 전쟁 유적지이다. 등산로에서 본 이 산의 겨울 풍경- 조금 남은 계곡 물에 간신히 비쳐 있는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가 임진왜란 당시 우리 선조들의 어려웠던 삶을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광교산은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했던 전쟁 유적지이다. 등산로에서 본 이 산의 겨울 풍경- 조금 남은 계곡 물에 간신히 비쳐 있는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가 임진왜란 당시 우리 선조들의 어려웠던 삶을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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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시가 공격을 했지만 적군은 방어만 할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군의 세가 큰 것을 보고 맞대항을 하면 불리하다고 판단, 구원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10시 무렵,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협판안치(脇坂安治, 와키자카 야스히루)의 본대 1천여 명이 당도했다. 기세가 오른 적들은 오만 색깔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북을 치고 나발을 불면서 갑자기 산에서 내려와 아군 진지로 돌격했다.

무심히 앉아있던 아군 군사들은 적들의 요란한 기습에 놀라 문득 사기가 떨어졌다. 줄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어수선하게 모여 있던 군사들이 서로 먼저 도망을 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아군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백광언과 이지시가 고함을 지르며 통제를 시도했지만 군졸의 숫자가 많은 탓에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백광언과 이지시, 고부군수 이광인(李光仁)과 함열현감 정연(鄭淵) 등이 모두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1600여 적병의 단 한 번 공격에 어이없이 괴멸을 당한 이광의 전라도 군은 겨우 도망쳐 오후 4시경 충청도 군사들이 머물고 있는 광교산(수원과 용인 경계) 아래로 갔다. 혹 야밤 기습이 있을까 불안에 떨며 잠을 설친 아군은 다음날(6월 6일) 아침 조금 안심을 한 상태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바로 그 찰나, 기다렸다는 듯이 적들이 달려들었다. 충청군이 합세했지만 여전히 이곳의 주력군이었던 이광의 전라군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얼굴에 황금빛 가면을 쓰고, 등에 백색교룡기(白色蛟龍旗, 흰색 용이 그려진 깃발)를 짊어진 채 백마 위에서 장검을 휘두르는 적군 선봉들이 전의를 잃은 아군 군사들 눈에는 그저 저승사자로만 보였다. 충청병사 신익(申翌)이 먼저 도망가니 군사들이 무너지는 강둑처럼 스러졌는데, 흡사 한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가장 먼저 무기를 버리고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나자 장졸들이 본받듯이 흩어진 것과 그대로 닮은꼴이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자는 이 광경을 두고 '마치 산이 무너지고 강이 터지는 듯하였다(勢如山崩河決)'라고 한탄했다.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의 광교산 입구는 대단한 식당 단지로 변해 있다. 광교산으로 가는 길은 그 식당 단지 가운데를 통과해서 계속 이어지는데, 식당 건물들이 대략 끝나는 지점의 오른쪽에 법륜사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법륜사 옆길도 광교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하나이다.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의 광교산 입구는 대단한 식당 단지로 변해 있다. 광교산으로 가는 길은 그 식당 단지 가운데를 통과해서 계속 이어지는데, 식당 건물들이 대략 끝나는 지점의 오른쪽에 법륜사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법륜사 옆길도 광교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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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연합 대군의 용인 참패를 두고 이이화는 <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에서 '3만여 대 1600여 명의 대결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이들은 전라도, 충청도에서 마지막으로 모아온 군사였다. 이광은 일부 패잔병을 이끌고 맥없이 전주로 내려가고, 윤국형(윤선각)은 변변한 싸움 한번 못 해본 채 공주로 내려갔으며, 김수는 경상도 쪽으로 숨어들었다. 평양 행재소에서 이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더욱 초조해하며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갈 결심을 굳혔다. 이순신이 당항포에서 승리를 장식하고 있을 무렵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임진전란사>를 쓴 이형석도 이 황당한 참패에 대해 '행재소에서는 이 싸움이 있은 지 5일만인 6월 11일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떠나게 되었으니, 비록 해상(海上)에서는 당항포(6월 5일), 율포(6월 7일)의 승전이 있었고, 육상(陸上)에서는 (경북 고령) 무계(6월 6일)의 개선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 일전(一戰, 용인 참패)의 패주(敗走)로 5만 군사가 다시 땅속으로 숨어들게 된 것은 매우 절통(切痛)한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참담해 했다.

용인 참패 이후 평양을 버리는 선조

실제로 선조는 이 참패 이후 불과 5일만인 6월 11일,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떠났다. 이는, 선조가 이광 등의 연합군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고, 어이없는 대패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늠하게 해준다. 선조는 이광을 파직하였다가 다시 귀양을 보냈고, 윤선각도 충청도 관찰사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광의 자리는 권율이 맡았고, 충청감사에는 윤선각 대신 공주목사 허욱(許頊)이 등용됐다.
 
임진산성유적전시관은 폐쇄되어 있지만 건물 벽에는 전투 모습을 형상화한 그럴 듯한 동판 벽화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임진산성유적전시관은 폐쇄되어 있지만 건물 벽에는 전투 모습을 형상화한 그럴 듯한 동판 벽화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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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진산로 104(풍덕천동 1170)를 찾아가면 임진산성유적전시관 건물을 볼 수 있다. '건물'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내부는 관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전시관은 현재 폐쇄되어 있다.

이곳 임진산성유적전시관이 2002년 1월 개관을 하게 된 것은 이 일대에 아파트 신축 공사를 진행하던 건축회사가 1997년 4월 30일 조선 시대 총통 2점을 출토한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도박물관은 그해 4월 30일부터 12월 30일까지 8개월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현자총통, 철제 탄환, 창, 활, 화살촉, 자기, 토기 등이 나왔다.

문이 열려 있던 시절의 이 전시관에는 현자총통 2점, 철제 탄환 4개, 칼 2점, 화살촉 1점, 활 1세트,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자기, 백제의 토기, 수지 지구 고지도, 임진산성 성곽 절개 모형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1592년 6월 당시 몇 만 명이나 되는 하삼도 조선 연합군이 불과 2천 명도 안 되는 일본군에게 어처구니없이 참패한 뒤 싸움의 현장에서 사라졌듯이, 그렇게 이곳 임진산성유적전시관도 건물만 남았을 뿐 그 교육적·역사적 의미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용인 전투의 흔적을 보여주었던 임진산성 전시관

너무나 비참한 패전이었기 때문일까. '도대체 무엇을 되돌아보고 또 기리기 위해 당시의 패전을 기념하고 전시한단 말이냐?'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구경을 하러 오는 답사자가 거의 없기 때문일까.

어느 이유에서든, 전시관은 재개되어야 한다.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 남긴 가르침-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再生, 다시 살아남)할 수 없다"라는 교훈을 생각한다면, 하삼도 조선군의 처참하고 낯부끄러운 1592년 6월 용인 참패는 우리 역사의 쓴 약이 되어야 한다.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 현장으로 추정되는 왜성 흔적 일원에 유물전시관을 세워두고, 두고두고 뼈저린 반성을 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공동체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데 이바지할 뜻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봉사지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에 따르면 서봉사는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지만 절집들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고, 지금은 고려 명종 때 세워진 보물 9호 현오국사탑비만 남아 있다. 그래서 이정표에는 '서봉사'가 아니라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라 쓰여 있다.
 서봉사지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에 따르면 서봉사는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지만 절집들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고, 지금은 고려 명종 때 세워진 보물 9호 현오국사탑비만 남아 있다. 그래서 이정표에는 '서봉사'가 아니라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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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공격에 터무니없이 당했던 임진왜란 유적 광교산을 오른다. 광교산 중에서도 1592년의 비극을 가장 잘 말해주는 곳은 보물 9호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龍仁瑞鳳寺址玄悟國師塔碑)'가 있는 서봉사 터이다. 주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0번지이지만, '서봉사터' 또는 '서봉사터현오국사탑비'로 찾아도 바로 위치 검색이 되기 때문에 현장을 답사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임진왜란 유적지로서의 광교산을 찾으면서 서봉사터로 가는 것은 문화재청 누리집의 안내 때문이다. 누리집은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로 시작되는 서봉사지현오국사탑비(1185년, 고려 명종 15년 건립) 해설문의 둘째 줄을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로 작성하고 있다.

서봉사 안내판
 서봉사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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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던 절에 서봉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광교산의 옛날 이름 중 하나가 서봉산(瑞峯山)이었던 데 연유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광악산(光嶽山)도 있었는데, 928년 왕건이 견훤을 평정한 뒤 이 산 행궁에 머물면서 장졸들을 위로하던 중 산꼭대기에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면서 '광교산(光敎山)'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상서로운 봉우리를 의미하는 서봉산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광교산이든, 둘 다 좋은 뜻을 지닌 이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군이 일본 침략군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곳이니, 어째 인간의 역사와 종교의 암시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거리가 있는 듯 느껴진다. 그래서 소월은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노래한 것일까. 나는 오늘도 혼자서 산을 오른다.


태그:#이광, #용인, #광교산, #임진산성유적전시관,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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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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