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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부터 1929년까지 부모가 없거나 버려졌거나 집이 없던 이십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이른바 '고아 열차'를 타고 미국 동부 연안 도시에서 중서부로 향했다. '입양'이 목적이었지만 사실상 계약 노동자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대공황기, 대부분 아일랜드 이민 1세대들이었던 아이들은 인정 많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만나게 될지, 노예처럼 힘든 일을 하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짧은 생애 동안 끔찍한 일을 겪었다.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의 화제작 <고아 열차>는 1930년대까지 미국에 사회안전망이 없던 유동적이고 불안정했던 시기를 조명한 이야기다. 미국에서만 200만 독자가 읽으며 107주 연속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이 감추고 싶은 역사 중 하나인 고아 열차 운동의 규모와 범위, 그 추한 이면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 작품은 조만간 영화화 한다고 한다.


17살 위탁 가정 소녀와 91살 할머니의 만남

 <고아 열차>
<고아 열차> ⓒ 문학동네
<고아 열차>는 2011년 뉴욕과 1929년 센트럴 열차에서 시작해서 1943년 미세소타 주 헤밍퍼드까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현재는 퍼노브스콧 인디언 출신으로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사는 반항적인 몰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반면, 과거는 아일랜드 출신인 비비언 할머니의 어릴 적 이야기가 중심축이다.

저자는 3인칭 전지적 관점에서 몰리의 현재를 지켜보는 듯 그리는 반면, 과거는 1인칭 시점 아래 치밀한 묘사로 심금을 울린다.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다 5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17살 위탁 가정 소녀와 91살의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 이 둘은 전혀 대화가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둘은 첫 만남부터 뭔가 통하는 느낌을 받는다.

몰리가 도서관에서 훔친 책은 <제인 에어>였다. 그 일로 몰리는 소년원에 가기보다는 비비언의 대저택에 있는 다락방 정리를 돕는 것을 택한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다락방 상자들 속에는 비비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아웃사이더로 위탁 가정을 전전하던 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비언은 9살에 고아 열차에 올라 온갖 궂은 일과 성폭행 위험에도 노출되었던 자신의 경험 탓인지 몰리의 내면을 꿰뚫어 보았다.

"사람들의 가장 못난 모습, 가장 극단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고 나니 경계심이 생긴다. 그래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법,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법, 실제로는 아무 느낌도 없으면서 공감하는 척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속으로는 마음이 무너지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법, 남들과 똑같이 보이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비비언은 몰리가 처음 찾아왔던 날, 원치 않는 의상을 하고 개성을 최대한 죽이려 한 모습에서 자신의 가련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거나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나이에 비해 아는 게 너무 많은 애어른으로 살았던 자신을 말이다.

<제인 에어>를 훔쳤다는 몰리에게 비비언은 다른 사람들처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상을 줘야 한다며 추켜세운다. 비비언은 열 살이 되었을 때 학교 선생님께 선물 받았던 '빨간머리 앤'을 떠올리며, 책 도둑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그리고 어느 누구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열차에 얽힌 경험을 자신의 생을 정리하듯 털어놓으면서 둘의 이야기는 깊어간다.

비비언에 따르면 고아 열차는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허섭스레기처럼, 너벅선에 실은 쓰레기처럼 뉴욕의 길거리에서 수거돼 최대한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내진 아이들 이야기는 설명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잘 믿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아 열차에 타게 된 게 행운이었을까?

비비언이 기억하는 고아 열차에서의 일성은 아동구호협회 인솔책임자인 스캐처드 부인의 도도한 훈계였다.

"이 열차는 고아 열차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타게 된 너희는 행운아야. 무지와 가난과 타락으로 가득한 이 사악한 곳을 떠나 고귀한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열차 안에서는 몇 가지 간단한 규칙만 따르면 돼. 협조적으로 굴고 지시 사항에 따른다. 인솔자의 말을 잘 듣는다. 객차를 소중히 다루고 절대 훼손하지 않는다. 같이 앉은 친구도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마디로 말해서 커런 씨와 내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거야."

고아 열차에서 열 살이면 이미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인솔책임자 스캐처드 부인의 말은 갓 입소한 신병들에게 말끝을 '다! 까!'로 맺으라고 강조하는 조교보다 살벌하다. 아이들은 이제 '입양'이라는 이름으로 노예 계약하듯 팔려나가고 있다. 몰리는 비비언이 입양되는 과정을 보며 미국사에서 배운 연한 계약 노동을 떠올렸다.

연한 계약 노동은 17~18세기에 미국 이민을 원하는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뱃삯을 지원해주고 정해진 연수 동안 가혹한 조건으로 일을 시키는 노동 형태를 말한다. 미국은 연한 계약 노동자들의 노동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17세기에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자들의 3분의 2가량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몇 년 동안 자유를 포기했다. 그들 대부분이 스물한 살 이하였다.

하지만 고아 열차 탑승객들이 겪은 현실은 그보다 더 지독했다는 것을 소설에서 읽을 수 있다. 대서양을 건너 온 아이들에게 미국 땅에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어른이,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짐 취급받았고,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처럼 내버려졌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온 가족을 잃었다고 해서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슬픈 사연을 안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과거는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고, 잊어버려야 고통도 빨리 덜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비비언이 아흔 넘도록 고아 열차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은 어쩌면 슬픔을 억제하며 덧난 상처를 들쑤시지 않으려는 보호본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고아 열차>를 읽다 보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아일랜드를 떠난 비비언의 부모 이야기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한인 이민자들과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모두가 풍요의 땅으로 향해 가는 줄 믿었건만, 비비언의 부모는 새로운 나라에서 실패했다.

고향에서는 똑같이 가난하고 불안정했을지언정 가까이에 가족이 있고,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통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전혀 없었다. 정서적 지지를 해 줄 그 무엇도 없었다. 한인 이민자들도 그랬고, 오늘날 이주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몰리가 학교에서 배웠다는 연한 계약 노동자들은 불복종이나 도주 시에는 구타를 당했고, 인신매매와 대여의 대상이었다. 노예와 다른 것이 있다면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통 7년 정도의 계약 기간이 끝나기만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계약이 끝나 해방되는 시점에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옥수수 1년 치와 의복 2벌, 농사기구, 그리고 소정의 해방 축하금 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계약 중간에 도망가다가 노예가 되기도 하고, 개죽음을 당하기도 했던 연한 계약 노동자들이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고아 열차 탑승자와 다를 바 없는 이주노동자 현실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외국인 고용허가'라는 이름의 연한 계약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3년을 계약하고 입국한다. 고용 조건이 아무리 나쁘고, 고용주가 근로계약을 어겨도 임의로 근무처를 옮기지 못한다. 그저 좋은 고용주를 운 좋게 만나기를 바라야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연한 계약 노동자들과 닮았다. 그래서 고용허가제는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평을 듣고 있다.

험한 세월을 살았던 고아 열차 탑승객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고, 최악의 경험에서도 한 조각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비비언은 그렇게 의미 부여를 하고자 하는 이들의 공통점을 이렇게 말한다.

"이런 나쁜 일이 벌어졌고, 또 이런 나쁜 일이 벌어졌지만, 나는 훌륭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성장했다. 나는 사랑에 빠졌고, 아이와 손주들이 생겼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행복하게 살았는데, 내가 고아가 되거나 버려져서 열차를 타고 캔자스나 미네소타나 오클라호마로 보내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경험은 세상을 준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지간히 낙천적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을 뱉어내는 비비언조차 아흔이 넘어서도 '가족'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데려간 집은 나한테 잘해주었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그들이 내 가족 같지는 않았어요. 실제로도 내 가족이 아니었고요."

엄마 아빠 품에서 재롱을 부리고 사랑받아야 할 어린 꼬마였던 비비언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었지, 그저 잘해주는 누군가가 아니었다. 애늙은이처럼 눈치 볼 일이 없고,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할 가족 말이다. 토닥거릴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고아 열차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 이은선 옮김, 문학동네(2016)


#고아 열차#연한 계약 노동#입양#미국#아메리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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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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