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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화장실 변기 에피소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인천시장 재임시절, 대통령과 함께 시청을 방문한 사람들이 시장실의 화장실 변기를 급히 교체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진 뒤, 2013년께 헬기를 타고 해군 2함대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사령관실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대통령 쪽 사람들이 "다시 방문하실지 모르니, 변기를 미리 교체해두라"고 말했다는 한 예비역의 제보도 대중에 공개됐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는 인천 쪽 화장실에 관한 것이다. 인천 지역 화장실에 대해서만 그런 조치를 취한 게 아니라면,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박 대통령이 아침 일찍 일어나 이곳저곳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전국 곳곳에서 화장실 변기들이 대대적으로 뜯겨나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수많은 공무원들이 변기 교체작업에 동원되고 이 문제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만약 박근혜가 1910년 조선 멸망 이전, 그러니까 왕조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런 에피소드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들은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까지 생존한 구한말 궁녀들이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기초로 집필된 역사학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따르면, 궁궐에는 왕의 전용 변기가 있었다. 전용 화장실이 아니라 전용 변기였다. 일명 '매우틀'이라는 것이다. 임금의 배설물은 매우(梅雨)라는 좋은 말로 표현됐다. 매화꽃(梅)처럼 떨어지는 빗물(雨)로 비유된 게다. 그런 매우를 받아두는 그릇이라 해, 왕의 변기를 '매우틀'이라고 불렀다.

매화꽃이 내린다, 임금 똥이 내린다

일반적인 매우틀.
 일반적인 매우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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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으로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틀의 대체적인 모양은 위의 그림과 같다. 기다랗게 네모난 나무상자에 구멍이 뚫린 형태. 상자 안에 요강을 넣어두거나 아니면 마른 풀을 깔아둔 상태에서 용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일종의 휴대용 좌변기였던 것이다.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따르면, 구한말인 고종 시대에는 궁궐 안에 매우틀이 세 군데 있었다고 한다. 집무실이나 침실을 비롯해 왕이 자주 사용하는 공간에 매우틀을 비치해뒀다. 그래서 왕은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즉시 매우틀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볼 일을 홀로 볼 수는 없었다. 궁녀의 보조를 받아야 했다. 궁궐 내에는 조명·난방·청소 등을 담당하는 '복이처'라는 부서가 있었다. 그 복이처에 속한 복이나인이라는 궁녀가 매우틀을 관리하고 왕의 용무를 옆에서 보조했다.

용무가 끝나면 복이나인은 매우틀을 들고 내의원으로 직행했다. 내의원 의사들은 혀로 맛을 본 뒤 왕의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비선 의료진이 있었다면 그 일만큼은 그들에게 맡기고 싶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의원 의사들이 직접 맛을 봐야 했다.

이런 매우틀이 있었기 때문에, 왕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는 현지의 화장실 상태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복이나인이 매우틀을 들고 다니면 모든 게 해결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변기 설치팀'을 대동해 신하들의 전용 변기를 뜯어낼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방문을 받는 관찰사나 절도사(지역 사령관)들은 왕의 화장실 사용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번민할 필요가 없었다. 왕의 수행원들도 지방관들에게 "다음에 또 오실지 모르니 좋은 걸로 갈아놓으세요"라고 민망한 귀띔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전용변기 말고 일반 화장실 자주 찾은 광해군

영화 <광해> 속 광해군이 '매우틀'을 이용하는 장면.
 영화 <광해> 속 광해군이 '매우틀'을 이용하는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 리얼라이즈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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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일로 측근들을 괴롭힌 의외의 왕이 있었다. '의외'라고 표현한 것은 그 왕이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개혁군주 광해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궁녀 앞에서 용변을 보는 게 불편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광해군은 매우틀이 아닌 일반 화장실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의붓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쓰인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그랬다. 항상 일반 화장실을 사용했는지 가끔씩 사용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계축일기>에는 광해군이 일반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광해군의 정적인 인목대비의 입장으로 집필된 책에서 광해군의 화장실 문제를 거론했다니, 혹시 조작된 기록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광해군이 다른 왕들처럼 매우틀만 사용하는 왕이었다면, 광해군이 아무리 밉더라도 '광해군은 일반 화장실을 이용했다'는 허위의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이 일반 화장실을 사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광해군의 세자는 이지(李祬)다. 이지의 유모는 덕환이라는 보모상궁이었다. 그런데 덕환은 인목대비 쪽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따금 인목대비한테 가서 광해군의 뒷담화를 했다. 그 뒷담화 중 하나가 <계축일기>에 소개돼 있다.

"겨울에 똥을 누실 때는 아침부터 뒷간에 가서는 정오 때까지 계속 누시고, (웃어른께) 문안을 드려야 할 때는 유난히 (뒷간을) 자주 드나들며 똥을 두세 번씩 누시니 그렇게 애가 타는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덕환의 말에 따르면, 광해군은 화장실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이용했다. 귀찮은 일이 있을 때는 유난히 자주 들락거렸다. 일부러 시간을 끌 목적으로 화장실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화장실로 주변 피곤하게 했던 광해군과 박근혜

화성행궁의 전통 화장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다.
 화성행궁의 전통 화장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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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고생하는 이들이 있었다. 광해군을 따라다니는 궁녀와 내시들이었다. 광해군이 한겨울에 몇 시간씩 틀어박혀 있을 때는, 이들도 화장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한겨울 낮도 아니고 한겨울 아침에 이렇게 하다 보면, 발을 동동거리고 손을 호호 불면서 속으로 온갖 말을 다했을 것이다. '다른 왕들처럼 매우틀에서 일을 보면, 우리가 편할 텐데'라며 원망도 했을 법하다.

복이나인과 내의원 의사들은 매우틀에 잘 적응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문제로 괴로워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일반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히 한겨울에 궁녀나 내시들을 이만저만 고생시킨 게 아니었다. 광해군은 서민 중심의 개혁을 추진하고 실리외교를 전개한 훌륭한 군주였지만, 이렇게 화장실 문제에서만큼은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고 귀찮게 만든 왕이었던 셈이다.

물론 광해군은 박근혜 대통령처럼 자기만의 변기를 고집하진 않았다. 남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을 이용할 만큼, 광해군은 털털한 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 문제로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했다는 점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비슷했다.


태그:#박근혜 화장실 변기, #매우틀,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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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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