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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낙엽이 지고 태양 고도가 낮아지는 계절이 오면 나는 아이들에게 부드러워진다. 급식 검사를 빡빡하게 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 잘 놀아준다. 함께 있는 순간에 집중하면 되는데 애들 얼굴을 보면 자꾸 헤어진다는 생각에 먹먹해진다. 3월에 만나 이제 좀 익숙해지나 싶으면 곧 겨울이다. 너무 아쉬워 말고 아주 담담하지도 않게 아이들을 보내려면 마음을 잘 추슬러야 한다.

신규 교사 시절 한해 학급살이 갈무리가 힘들었다. 첫 교직생활의 순정을 바친 제자들이 봄방학을 보내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무렵 야속함이 밀려왔다. 선생은 아직 미련이 남아 더 붙잡아 두고 싶은데, 아이들은 마냥 밝았다. 준비 없이 맞이한 이별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23살, 갓 대학 졸업한 풋내기 교사의 욕심이었다.

누군가와 갈라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특히 이별이 '어린이'와 관련되어 있다면 훌륭한 그림책 처방이 있다. 독일 작가 페터 쉐소우가 쓰고 그린 <이럴 수 있는 거야??!>는 우울한 작별 증상에 대해 뛰어난 치유제 역할을 한다.

<이럴 수 있는 거야??!>
 <이럴 수 있는 거야??!>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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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거기엔 자기중심적 사랑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비슷한 꼬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히터를 켜기 시작한 늦가을 날, 애들과 고구마처럼 붙어 앉아 <이럴 수 있는 거야??!>를 펼쳤다.

이야기는 어느 날씨 좋은 독일의 공원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새빨간 가죽 가방을 질질 끌고 가는 소녀는 성이 나있다. 눈썹은 'V'자로 치켜올라 있고, 심술궂은 발걸음 뒤에서는 뽀얀 흙먼지가 인다. 텅! 길바닥에 버려진 음료수 컵을 차면서 간다. 컵이 찌그러지도록 발길질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과 달리 공원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사람들은 맨발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개를 산책시키며, 수다를 떤다. 또 누군가는 피크닉 테이블을 옮기고, 낚싯대를 챙긴다. 부드럽고 편안한 소재의 옷을 걸친 이들은 휴식 중이다.

"이럴 수 있는 거야??!"

세상에... 양 주먹 꼭 쥐고 내지른 여자애의 목소리가 한적한 공원의 여유로움을 찢어버린다. 햇살을 즐기던 사람들은 하던 일을 마저 하거나, 약간 고개를 틀어 쳐다본다. 그 뿐이다.

소리 지르는 여재애를 바라만 보는 사람들
 소리 지르는 여재애를 바라만 보는 사람들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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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왜 저러는 거야?"
"사람들 다 쳐다봐."

밑도 끝도 없이 공공장소에서 고함치는 여자애라니. 현희는 자기가 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말라고 배운 아이들은 특이한 독일애에게 집중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니 일단 따라가 보기로 했다. 툭! 아까 음료수 컵 차던 발로 돌멩이를 차는 여자애는 또 외친다.

"이럴 수 있는 거야??!"

다정하게 보트를 타던 사람들이 노 젓던 손을 멈추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붉은 옷의 소녀는 또 어디론가 걸어간다. 돌멩이를 차던 발로 종이뭉치를 차면서.

"정말 이상한 애네."
"쟤 또 소리 칠 거 같아."

"이럴 수 있는 거야??!"

영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자애는 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른다. 여러 번 반복되는 장면에 애들은 피식 웃거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들 괴팍한 여자애의 속사정을 궁금해하고 있던 차에 공원에 살고 있는 요정들이 나선다. 이 요정들은 아까부터 주변을 맴돌며 여자애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참다 못한 키다리 요정이 용기를 내어 소녀에게 물어본다.

"너 왜 그러니?"
"엘비스가 죽었어!"

작은 여자 애는 악을 쓰듯 소리친다. 엘비스가 죽었다는 말에 요정들은 한 마디씩 거든다. "아, 불쌍한 엘비스..." "노래를 정말 잘했는데..." "엉덩이도 멋지게 흔들었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못하는 것이 없었는데..." "멍멍"

"가수 엘비스가 아니야! 내 엘비스라니까!"

빨간 가방 안에 든 엘비스
 빨간 가방 안에 든 엘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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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애는 반짝이는 새빨간 가죽 가방을 열더니 요정들 코앞에 바짝 들이민다. 엉엉 울면서 그녀가 보여준 것은 숨을 거둔 새였다. 핸드백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노란 새.

"헉! 끌고 다니던 게 새 시체였어."
"어떡해. 진짜 죽은 거야?"

예상치 못한 반전에 다연이와 정균이는 깜짝 놀라 눈이 둥그레졌다. 우리 반 아이들의 시선은 가방 속 엘비스에게 몰렸다. 실물 사진이 아니고 그림인데도 죽은 생물의 신체를 꼼꼼히 살폈다. 벌어진 부리, 굽은 발톱, 조그맣게 뜬 눈, 뻣뻣하게 선 깃털. 생의 기운이 가득한 어린이에게 죽음은 생소하고 신기한 현상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의 죽음 앞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다음 장을 넘기니 요정들이 슬퍼하고 있었다. "안됐다. 정말 안됐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정말 슬프다." "불쌍한 엘비스..." "멍멍" 왠지 모르지만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엘비스를 묻어 주자."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요정들은 장례식을 할 때처럼 움직였다. 일렬로 줄을 서서 행진하고, 촛불도 들고, 꽃도 들고, 하얀 띠를 묶은 화환도 들고, 향도 피웠다. 독일의 장례식 모습이었다. 아이들에게 장례식에 다녀온 적이 있냐고 묻자 대여섯이 손들었다. 스물세 명 인원에 비하면 적은 수였다. 아직 주변인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드물고, 부모님이 일부러 장례식에 데려가지 않는 탓이 컸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저는 하얀 국화 들고 갔어요."
"절 두 번 하고 향 피웠어요."

할아버지 장례식이 떠올랐는지 다연이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친구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광대뼈 위를 훔치지 않고, 숨을 최대한 참았다. 그 감정을 존중해주고 싶어 애써 다연이를 외면하는데 벌써 윤지랑 영춘이 볼에는 투명하고 짠 액체가 떨어져 있었다.

"헤어지는 거예요. 그래요, 그런 거예요..."

요정과 여자애는 함께 모여 앉아 아몬드가 박힌 과자를 먹고, 코코아를 마시며 엘비스를 떠올린다. 새의 동료이자 주인이었던 꼬마의 훌쩍이는 음성을 따라 뾰로롱 뾰로롱 엘비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는 서로 말도 없이 꼭 끌어안아 준다.

"정말 좋았어요."

여자애는 '한 엘비스가 또 다른 엘비스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빙그레 웃는다. 처음으로 보는 꼬마의 편안한 얼굴. 지금껏 긴장해 꽉 조였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엘비스의 무덤엔 하얀 꽃과 화환 양초가 놓였다.

상처받은 아이를 위로하는 따뜻한 포옹
 상처받은 아이를 위로하는 따뜻한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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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도 참 힘들었겠다."

승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승희는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화가 났다고 했다. 그냥 미웠단다. 사랑하는 개가 죽어서 밉다는 말에 아이들 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에게 공감하는 애들은 애완동물을 떠나보낸 아픔이 있었다. 왜 미웠냐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는 고갯짓을 보였다. 가슴이 저리고, 슬프면서도 화가 났다고 했다.

어째서 슬픔이 분노가 되는 걸까? 죽음을 처음 대면한 아이는 상실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알지 못한다. 자신이 아끼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상황은 아이에게 엄청난 충격인 것이다.

엘비스를 잃은 여자애는 "이럴 수 있는 거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마음이 괴로워 소리치는 여자아이에게 돌아오는 건 별 희한한 애 다 보겠다는 차가운 시선과 무시였다. 책 속 인물들도 그랬고, 책 밖 독자들도 처음엔 그렇다.

사연을 자세히 들어보지 않으면, 관심 있게 물어봐주지 않으면 여자애는 끝까지 이상한 소리 떠벌거리는 애가 되고 만다. 세상 사람들 다 들으라고 외쳐봐도 아무 반응이 없으니 소녀는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밖에.

무관심은 슬픔을 더 키운다. 비탄에 잠긴 소녀를 위로한 건 따뜻한 관심과 격려였다. 요정들이 여자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꼭 안아주고 나서야 엘비스를 웃으며 하늘나라로 보낼 수 있게 된다.

엘비스를 묻어주고 떠나는 여자애의 손에는 더 이상 빨간 가방이 없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슬픔과 함께 가방도 고이 묻힌 것이다. 죽음은 피해갈 수 없지만 슬픔은 덜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럴 수 있는 거야??!

페터 쉐소우 글.그림, 한미희 옮김, 비룡소(2007)


태그:#그림책, #페터 쉐소우, #비룡소, #죽음, #이럴수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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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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