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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길' 따라 걸으면 1930년대 군산 느껴져
여교사들로 구성된 '이야기샘' 회원들과 '탁류길 탐방'을 다녀와서

스터디 모임을 진행하는 ‘이야기샘’ 회원들
 스터디 모임을 진행하는 ‘이야기샘’ 회원들
ⓒ 설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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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의 애향심 고취와 향토사 공부를 위해 여교사들이 나섰다. 지난 2013년 3월 출범한 '이야기 샘'(최장 최혜란) 회원들이다. '이야기 샘'은 교사와 학생들이 2주에 한 번씩 도서실에 모여 그날 정해진 그림책 두 권을 읽고 토론하면서 공부하는 스터디 모임이다. 회원은 군산시 소재 초등학교에 재직하는 30대 여교사 14명으로 구성됐다.

설명숙 교사는 "그림책을 읽고 공부하는 목적은 책 속의 글과 그림을 좀 더 깊이 있게 읽어내고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그림을 통해 아이들과 소통함으로써 교사로서 도움을 얻고자 함"이라며 "그림책은 아이들이나 보는 '어린이 책'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어른들도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상을 이해하고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는 '탁류길 탐방'을 기획하게 된 사연도 전했다. 

"회원 중에는 직장을 따라 타지에서 온 선생님도 여러분 계십니다. 군산에서 태어나 자란 회원이라 해도 정작 고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들에게도 향토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학생들 지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알아야겠기에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쓴 소설 <탁류>를 읽고 채만식 문학관에도 다녀왔죠. 그러나 <탁류>는 초등학생들이 이해하기 버거운 소설이어서 쉽게 알려줄 방법을 연구하다가 '탁류길 탐방'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군산 미두장

기자의 설명을 메모하는 여교사들
 기자의 설명을 메모하는 여교사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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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지난 19일(토) 오후 2시 군산시 장미동(해망로) 내항사거리에 설치된 팔각정에서 여교사들(교사 11명, 중학생 1명)을 상대로 소설 <탁류>의 등장인물과 지명유래에 얽힌 군산의 근현대사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내항 사거리(미두장 앞)-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근대건축관)- 째보선창(죽성포구)- 싸전거리- 대정동(큰샘거리)- 한참봉 쌀가게- 초봉이네 집(정주사집) 등을 돌아봤다.

군산 '내항 사거리'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해망로'(본정 1정목)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대학로'(6조통)가 만나는 지점이다. 최근에 설치된 팔각정은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이웃하고 있다. 6조통은 군산 개항(1899) 이후 금강 지류를 복개한 간선도로였다. 본정 1정목은 '혼마치', '군산의 심장' 등으로 불리었다. 이곳은 조선은행 건물이 들어서는 1922년 이전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참가자들이 미두장 빗돌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참가자들이 미두장 빗돌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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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 모퉁이에는 1930년대 미두장(미곡취인소)이 있던 자리였음을 알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일제는 전국 곳곳에 미두장을 설치했는데, 군산 미두장이 가장 악명 높았다고 한다. "미두판에 다니는 사람들의 노름 열기", "20만평 땅 날린 차 모씨 이 모씨···", "미두에 실패하고 바다에 투신" 등의 군산발 옛날신문 기사들이 재산을 탕진한 조선인이 많았음을 시사한다. 군산 미두장은 광복 후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하다가 한국전쟁 때 화재로 사라졌다. 

일제는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는 1930년 공업화 정책 실행에 필요한 자금 조달과 군산 미연취인시장의 투기 방지를 명분으로 군산에 미곡취인소를 설립하기로 정한다. 그 결과 1932년 1월 1일 전라북도를 관할구역으로 미두장이 설립된다. 군산 미두장은 1939년까지 7년간 운영하였다. 쌀(米)과 콩(豆)을 거래한다고 해서 미두장(米豆場)이라 하였고, 기간을 두고 쌀을 거래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기미(期米)시장'으로도 불리었다.

군산 미두장은 오사카 도지마취인소 가격을 전보로 통보받아 가격을 정했다. 오전 10회 오후 7회 장이 열렸다. 100석 단위로 거래하였고, 쌀값의 10%만 있으면 거래에 참여할 수 있어 적은 돈으로도 막대한 이익을 얻거나 잃을 수 있는 '고위험 고수익' 구조였다. 시세 변동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 한 번에 미두꾼들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그날 시세를 외치는 사람을 요비코(呼子), 장외 투기꾼을 하바꾼(合百), 소액 투자자는 마바라(잔챙이)라 하였다.

초봉이는 조선, 정주사는 조선의 썩은 관리, 장형보는 일본을 연상시켜

1930년대 군산 해망로, 오른쪽 솟은 건물이 미두장 입구. 삼각 모양의 조선은행 지붕(왼쪽)도 보인다.
 1930년대 군산 해망로, 오른쪽 솟은 건물이 미두장 입구. 삼각 모양의 조선은행 지붕(왼쪽)도 보인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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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 1정목을 경계로 미두장과 마주보고 있는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탁류>에서 초봉이와 혼인하는 고태수 직장으로 나온다. 소설에서 파란 지붕의 'XX은행'으로 등장하는 조선은행은 일제 식민치하 대표적인 금융시설이자 군산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2008년 국가 등록문화재 374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이후 군산의 근대 건축물들 모형을 전시해놓은 '근대건축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소설 <탁류>는 작가 채만식(1902~1950)의 특징을 집약한 역작으로 소설 전반부는 군산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1939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금강)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곳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ㅡ소설 <탁류>에서

 1939년 1월 7일 치 ‘동아일보’에 실린 채만식 콩트
 1939년 1월 7일 치 ‘동아일보’에 실린 채만식 콩트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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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끝낸 채만식은 출판을 앞둔 어느 날 복사한 원고를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잠들었다가 꿈에서 계봉이를 만난다. 꿈 이야기는 삽화가 들어간 콩트 형식으로 <동아일보>에 게재된다. 채만식은 계봉이를 통해 초봉이는 3년째 복역 중이고, 승재는 애오개 병원에 근무하며, 계봉은 승재와 동거하면서 언니(초봉이) 딸 송희를 맡아 기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채만식이 <탁류>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 <탁류>는 주인공 초봉이의 기구한 운명과 정주사의 몰락 과정을 통해 식민지 한국 사회의 그늘을 조망한다. 등장인물들의 기구한 삶과 비참한 처지는 조선이 망해가는 구한말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초봉이는 청순하기는 하지만 자기 인식이 희박해서 언제나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겨버리고 남자들에게 농락당한다. 계속 침략당하는 것이다. 초봉이는 조선, 정주사는 조선의 썩은 관리, 간교하고 음흉한 장형보는 조선을 짓밟은 일본을 연상시킨다.

<탁류>는 '인간 기념물'로 시작하여 서곡(序曲)으로 끝맺는 19개 소제목으로 이루어졌다. 작품에서는 사기와 간통, 모함과 살인사건이 이어지는 등 일제식민지 사회상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음에도 검열 때문이었는지 일본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제에 짓밟히고 억눌린 식민치하 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1941년 재판 간행 후 총독부로부터 발행금지 처분을 받는다. 

소설에서 정주사와 초봉이가 거닐던 길은 나라를 빼앗긴 조선 사람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길이라는 점에서 수탈과 억압의 역사성을 그대로 상징한다. 또한, 군산 원도심권은 일제강점기 도시 구조를 원형에 가깝게 간직하고 있어 정주사와 초봉이가 거닐던 거리를 따라 걸으면 1930년대 군산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아래는 교사들이 보내온 탐방 후기를 정리했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초봉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비슷해

탁류길 탐방 소감을 설명하는 손현아 교사
 탁류길 탐방 소감을 설명하는 손현아 교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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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아 교사: "신영동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아빠가 짐자전거로 배달할 때, 망둥이 낚시 갈 때 따라갔던 곳이 뜬다리(부잔교) 부두와 호남제분 창고 주변이었다. 중학교 때는 버스를 집 앞에서 타고 방과 후에는 째보선창에서 내렸다. 친구들과 다니던 만화방은 한참봉 쌀가게가 있던 콩나물고개 부근이었다. 대문에 이상한 깃발이 펄럭이고 불상이 있어 깜짝 놀랐던 친구네 집이 소설 속 정주사가 살던 산동네에 있었다.
 
새로운 것들과 사람이 가득했던 거리는 이제 낡은 건물과 함께 기억 속에서 잊힌 공간이었는데 이번 탐방과 함께 다시금 새록새록 추억이 떠오르는 살아있는 공간이 되었다. 개항과 함께 100년의 세월 동안 초봉이 같은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채만식 같은 우울한 소설가가, 우리 아버지같이 장사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은 가장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뛰어놀던 나와 내 친구들이 살던 공간 말이다.

소설도 역사도 결국 사람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들의 공간이 함께한다. 이번 탐방으로 <탁류>라는 소설과 함께 군산의 역사와 지명,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또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추억하면서 배워보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김 건 중학생: "탁류길 탐방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갔는데도 느낌은 여전했다. 군산 구도심에서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된 곳들을 찾을 수 있었다. 미두를 한 정주사, 탑삭부리 한참봉, 초봉이, 고태수 같은 등장인물들의 실제 모델과 그들의 집 등을 다니면서 등장인물들의 생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잘 알지도 가보지도 못했던 일제강점기 군산의 번화가와 그때 수난을 겪었던 사람들의 흔적을 처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조순영 교사: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답답한 초봉이에게 씩씩대며 화를 냈었다. 그런데 '초봉이는 조선'이라는 말을 듣고 이해되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모습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비슷하구나 싶었다. 정주사집 비석 앞에서는 진짜 정주사가 살았겠지 하고 생각했다. 초봉이 직장(제중당약국)이 있었다는 구 역전 쪽을 바라볼 때는 콩나물고개를 넘어다녔을 치마저고리 차림의 초봉이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군산이 고향이 아니라서 탁류길 탐방 코스 모두가 처음이었다. 탐방 내내 정주사와 초봉이의 자취를 찾으려고 했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해보니 우습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날씨만 따뜻했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추워서..."

향토사 연구의 중요성 인식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어

한참봉 쌀가게 안내문에 관심을 보이는 회원들
 한참봉 쌀가게 안내문에 관심을 보이는 회원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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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란 교사: "전날 비가 와서 잔뜩 긴장하고 두툼한 외투 차림으로 탐방에 참여했다. 학생 입장이 되니 앞에서 말씀하시는 강사님 이야기가 좀 긴 것 아닌가? 추우니까 좀 걸어가면서 말씀하시지 하고 투덜거렸으나 이내 흥미를 갖게 되었다. 처음 모인 팔각정에서 군산의 개항(1899) 배경과 일본인에 의해 사용하게 된 용어(5통, 6통, 쌀가마니 등)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미두장 터에 문학비가 세워져 있어 정주사가 봉변당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고태수가 근무했던 조선은행, 정주사가 죽을까 하고 갔던 째보선창, 초봉이 신혼집이 있던 대정동, 한참봉 쌀가게, 콩나물고개를 넘어 정주사집까지 가게 되었다. 소설 등장인물들이 상상되면서 <탁류>도 다시 읽어보고 채만식 문학관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만 타고 다니다 보니 문학비는 처음이었고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2시간 이상 걸어본 것도 오랜만이어서 힘들었지만 한편 뿌듯하기도 했다."

소현숙 교사: "10여년 전, 시민문화회관에서 연극 <탁류>를 본 적이 있다. 초봉이의 기구한 인생 여정보다 꼽추 장형보의 음흉하고 악랄한 언행이 더 오래 기억되었다. 탐방을 위해 다시 읽은 <탁류>는 고교 시절 읽을 때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군산의 역사와 지리를 상세히 설명해주시는 기자님 설명을 듣고 있는 동안은 소설 속 인물들이 마치 실존 인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일본 강점기 군산이 여러 문학작품을 통하여 생생히 살아나듯 군산의 옛날과 변화된 오늘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이들을 통해 후손들에게도 잘 기억될 것 같다. 탐방하는 동안 청류를 희망했던 그러나 탁류라 명명한 채만식 선생의 시대적 삶이 아프게 다가왔다. 탐방 말미에 당이 급속도로 떨어져 잰걸음으로 부지런히 따라가지 못해 일행에게 죄송했다."

문덕화 교사: "군산이 고향이면서도 낯선 곳들을 소개받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온 이 공간이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생활해 오고 있었다는 것. 그 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특히 군산은 수탈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했었는데, 삼일독립만세운동(1919), 한국전쟁(1950), 4·19혁명(1960) 등 격변기 때마다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던 열정적인 사람들이 살았던 도시라는 것에 자부심이 들었다.

군산이 개항하던 해(1899) 전북 옥구에 최초로 세워진 옥구항공립소학교(군산중앙초등학교 전신), 1920년대 초 전라북도 최초 상설영화관으로 군산시 개복동에 개관한 희소관, 그리고 일제강점기 개복동에 들어선 조선인 야학들(적성야학교, 계화여학당, 양영학교, 영신여학교 등)···. 정작 군산에서 나고 자란 난 고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이번 탐방으로 향토사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은 것 같다."

정주사집에서 내려다본 구 군산역 가는 길(콩나물고개)
 정주사집에서 내려다본 구 군산역 가는 길(콩나물고개)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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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탁류길 탐방, #이야기샘, #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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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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