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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팔자 알 수 없다"

나의 할머니는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침 뱉은 우물 다시 먹는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어릴 때 나는 그 말씀들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어른들이 으레 하는 케케묵은 구닥다리 말씀으로 여겼다. 구미 장터 큰 기와집에 살았던 우리 가족이 어느 한 순간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철길 건너 각산 남의 집 초가 행랑채를 얻어 살았다.

나의 할머니 신천 강씨. 선산군 고아면 대망리에 태어나서 도개마을로 시집갔다. 택호는 '망정댁'이었다.
 나의 할머니 신천 강씨. 선산군 고아면 대망리에 태어나서 도개마을로 시집갔다. 택호는 '망정댁'이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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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할머니와 이웃으로, 금오산 기슭에서 땔감 나무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면 땅바닥에 고무신을 패대기치면서 '창부타령'을 하던 할머니 친구인 신문사네가 하루아침에 대통령 형수가 되고, 국무총리 장모로 서울 효창동 큰 집에 사는 걸 본 뒤 정말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인 <리어왕>에서 리어왕은 끝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미쳐 폭풍우 속의 광야를 헤매다가 죽는다.

아니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는 실례를 멀리 서양에서 들출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사형수의 아들이 대통령의 아들이 되고, 그때 대통령이 사형수가 된 것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이튿날 세 사람은 효창동 '신문사네'로 갔다. 지난 깊은 구연 탓인지 그 댁에서 문전 축객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나 조귀분씨의 언행에서 어떤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 댁 아드님이 우리의 방문 목적을 눈치를 챘는지 내게 제의했다.

송충이는 솔잎은 먹어야

"선배님, 김아무개 의원 보좌관으로 천거해드릴까요?"
"고맙네. 생각해 보겠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모가 말했다.

"국회의원 비서 자리가 생각보다 막강하다. 의원은 점잖은 체면에 뒷짐 지고 앉아 있으면 나머지 일은 비서들이 다 한다."

고모는 시골 중학교 교사보다는 의원 비서가 백 번 낫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런 말이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정치인 체질이 아닌 듯했고, 또 의원 비서 역할을 잘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 후배의 제의에 쓰다 달다 답도 하지 않은 채 그 며칠이 지나자 마침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라 태평리 학교로 내려갔다. 할머니는 시골로 내려가는 내 등 뒤에서 말씀했다.

"송충이는 솔잎은 먹어야 탈이 없다. 좋은 게 좋은 것만 아니다. 남에게 빚지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다."

변칙 보충수업

할머니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상모양반(박정희 대통령, 지역에서 그렇게 불렸다)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사내가 계집을 버릴 수는 있어도 자식까지 있는데, 그렇게 모질게 버려서는 안 된다"고 당신 시집 동네인 도개 마을에서 앞뒤 집에 살았던 도개댁(박 대통령 첫 부인 김호남씨)이 쪼고만 신랑에게 소박맞은 데 대한 연민의 정이 남달랐다.

"참 인물 좋고, 음식 솜씨도, 바느질 솜씨도 좋았는데…."

나는 서울을 떠나 학교로 가자 그사이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서무과장이던 아무개 선생이 낫으로 자기 배를 가르는 할복자살을 기도했단다. 다행히 가족의 발견으로 목숨은 건진 다음, 전 가족이 서울로 아주 떠났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공석이었던 교장 자리 때문에 빚어진 해프닝인 모양이었다.

곧 새 교장선생님이 부임했다. 그 고장 출신이 아니고 타고장 출신이었는데 부임 첫 말은 '공부하는 학교를 만들자'였다. 그분은 서울 부산 대구와 같은 대도시 학교에서는 '보충수업'을 실시하는데, 우리 학교도 즉각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술 더 떠서 방과 후 2시간을 실시하자고 했다.

대부분 교사들은 반대의 빛이 역력했지만, 새 교장의 첫 지시라 거역하지 못하고 따랐다. 일부 교사 가운데는 거기에 따른 수당이 있을 거라고 오히려 반기는 이도 있었다.

당시 다른 시골 중고등학교에서는 보충수업을 실시치 않았고, 그에 따른 수당을 징수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교장은 편법으로 학교 육성회를 통한 자발적으로 수당을 걷게 했다. 그러자 학교 앞 문구상 주인(육성회장)이 각 반 반장에게 돈을 걷게 한 뒤 자기 가게로 가져오게 했다.

그런 뒤 육성회장은 그 돈을 학교로 슬그머니 전달해 서무실에서 지급케 했다. 내가 그동안 체험한 바로는 대체로 대한민국에서는 그렇게 비상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출세하거나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곤 했다.

교사들의 하루 평균 4시간의 수업시수가 보충수업 실시로 5~6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내 목은 견디지 못하고 목 안이 부어 도저히 수업을 할 수가 없을 정도가 돼 하루 결근했다. 그러자 그날 오후 한 여학생이 하숙집으로 문병을 왔다. 그때 나는 한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문병 올 때라도 여학생 제자인 경우는 절대 방 안에는 들이지 말라고. 나는 얼른 옷을 갖춰 입고 대청마루로 나가 인사를 받고는 곧 돌려보냈다.

"창자를 잇자"


교장 선생님은 직원회 때마다 수시로 선생님들에게 "창자를 잇자"고 했다. 그 말은 모든 교직원이 한 가족처럼 유대를 강화하자는 좋은 뜻의 말이었다. 그런데 그 달 월급을 받고 보니 하루 결근했다고 한 달 봉급액 가운데 1/30이 적게 나왔다. 왜 그러느냐고 그 영문을 묻자, 교사들의 결근 방지책 겸 보강하는 사람 수당으로 주고자 그랬다는 것이었다.

결근한 선생님들의 표정은 모두 어이가 없는 듯 잔뜩 부어 있었다. 더욱이 화를 나게 한 것은 결근한 사람은 1시간 당 5000원(가정)이라면 보강한 사람의 1시간 수당은 3000원 정도로 차이가 났다. 그 이유는 공결(公缺)의 보강도 교사 월급에서 삭제한 돈으로 지급하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그다음 날 아침 직원회 시간에 교장선생님은 또 "여러 선생님과 저는 창자를 이읍시다"는 말씀을 했다. 나는 그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한 마디 뱉었다.

"여기가 무슨 노가다 판입니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근하면 봉급에서 하루치씩을 깎고는 교장 선생님께서는 무슨 창자를 잇자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 순간 교장의 표정이 시뻘겠다. 사회를 보던 교무부장이 얼른 종회를 선언했다. 그날 오후 나는 교감선생님에게 사의를 표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러자 교감 선생님이 곧장 내 뒤를 따라오더니 삼거리 주막으로 데려갔다.

"박 선생, 가더라도 학기는 마치고 가시오. 이렇게 떠나면 안 돼요. 학생들에게 욕 먹어요. 박 선생은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야."

그 말씀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날 이후로 교장 선생님은 직원회에서 '창자를 잇자'는 말씀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겨울방학이었다. 방학 전 직원회에서 교장 선생님은 새 학기 준비를 위해 그런다고 하면서 새 학기에 그만둘 교사들은 미리 말하라고 했다. 나는 직원회가 끝난 즉시 교장실로 가서 사의를 표했다.

두 번째 근무지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오산학교 전경
 두 번째 근무지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오산학교 전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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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교

서울로 올라온 나는 그때부터 서울 집에서 출퇴근할 학교를 알아보고자 대학으로, 지도 교수님을 찾아뵀다. 그때 마침 일간신문에 서울 용산구 보광동 오산중고등학교에서 각 과목 교사를 초빙한다는 광고를 봤다. 그 광고를 오려 지갑 속에 넣은 뒤 소집날짜에 학교로 찾아갔다.

그런데 학교 교문에 들어서자 교사 초빙 지원자가 등굣길을 가득 메웠다. 나는 간단한 면접만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필기시험을 치른다고 게시판에는 각과 시험장 교실까지 배치돼 있었다. 내가 서무과의 안내로 국어과 시험장으로 가자 두 교실로 지원자 60여 명이 웅성거리거나 한편에서는 참고서를 꺼내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갔기에 교내 문구점에 들러 볼펜 두 자루를 샀다. 그런 뒤 다시 시험장인 교실로 갔다. 나는 책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앉아있기가 심심해 교실을 둘러봤다.

교실 정면에는 교훈 "사랑 정성 존경" 그리고 본교 행동 지표 "존경받는 스승 되고 사랑받는 제자 되게 정성 다합시다"라는 말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오산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
 오산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
ⓒ 오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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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교실 뒤편 한가운데는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의 사진 액자와 그분의 유훈이 남겨 있었다.

"겨레의 광복에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 그리고 서로 돕고 낙심하지 말고 쉼 없이 전진하라."

나는 그 유훈을 읽는 순간 우리나라에도 이런 훌륭한 교육자가 있었던가?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전율감에 젖었다. 이 학교가 바로 김소월 시인이 나온 평북 다섯메 오산학교의 서울 학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조만식, 여준, 윤기섭, 유영모, 장지영 등의 내로라하는 독립지사들이 떠올랐다.  

내가 <김소월 전기>을 읽으며 일찍이 동경했던 학교를 찾은 기쁨에 젖었다. 마치 김산(본명 장지락) 지사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할 때의 그 심정처럼….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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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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