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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렴풋한 빛에야말로 모든 희망이 의거하고 있으며, 가장 풍요로운 희망조차도 희미한 빛에서만 나올 수 있다.' - 발터 벤야민

이 문장을 읽자마자 눈물이 났다. 3.11 대지진 이후의 일상화된 절망을 이겨내는 것에 집중해왔던 강상중 교수의 신작 <구원의 미술관>에서 발견한 문구이다. 울음이 멈추니, 화가 밀려든다.

'왜? 이런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발견하란 말이야? '희미한' 희망따위는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무도 관심이 없어!'

과연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세상인지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세월호의 아픔은 여전히 마음을 짓누르는데, '목숨을 걸고' 단식을 시작한 유가족을 돌아보자는 목소리는 한없이 연약하다(게다가, 그분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단식을 중단하셨다). 주변에 나누겠다며 한 봉지 가득 받아놓은 노란 리본은, 정작 따가운 시선을 신경쓰느라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나는 무엇을 이리도 두려워하는가?).

미래를 위한 계획은커녕, 녹색으로 변해버린 4대강의 재앙은 우리가 이 자연에 도대체 어떤 짓을 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이제 돌을 지난 막내 조카가 나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이 지구가 인류를 품어줄 수는 있을지도 겁이 날 뿐이다. 우리는 '이기심'만이 작동하는 세상에서, 공동의 삶을 얘기하는 게 배부른 것은 아닌가? 솔직히, 그런 삶을 바라고 있기는 한가?

아픈 일 투성이인 세상이다.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이 해결될 기미도 보이질 않는데, 연이어 죽어가는 젊은 노동자들은 무거운 상처로 가슴을 짓누른다. 죽음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권력은 자기들을 지켜내기 위해 국민을 외면한다.

게다가, 얼마 전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는 그동안 왜 이렇게나 억울함이 넘치는 세상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사회적인 계약으로 맺어진 공동체가 '국가'임을 기억할 때, 사법부마저 정의를 버린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계약을 유지해야 하는가? 아무리 밝은 뉴스를 찾고자 애를 써봤지만, 오늘도 실패했다.

과연 이리도 아픈 세상에서, '희망'과 '미래'를 얘기할 수 있는지 어둠만이 가득하다. '희미한 빛'이라도 찾아보고자 강상중 교수의 신작 <구원의 미술관>을 집어 들었지만 기대는 크지 않다. 다만, 저자는 이미 그의 전작인 <살아야 하는 이유>와 <마음>을 통해, 3.11 대지진 이후의 일본에서, 일상화된 죽음이 삶에 던지는 절망을 어떻게 바라보며 서로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지 말해왔기 때문에 조금은 기대를 걸고 싶다. 제발!

일본은 여전히 3.11 대지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저자는 신작을 통해, 그네들의 삶을 일상적으로 지배하는 '죽음'의 기운을 이겨낼 수 있는 '구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역설적으로, 다양한 미술작품을 통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는 자칫하면, 근본적인 '치유'가 아닌 '회피'의 해결방법이기 때문에 외면할 수 있지만 '살려면 어쩔 수 없어' 하는 생각마저 든다.

책에서 저자가 언급한 다양한 주제들 중, 특히 '죽음과 재생'이라는 부분의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저자는 이 주제를 언급하며, 치밀한 묘사와 상징들로 가득한 그림을 그렸던 16세기의 네델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을 불러들인다. 특히, 성경에서 묘사된 인류 최초의 대분열의 재앙이었던 바벨탑의 지옥도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전사고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 점은 문명에 푹 잠겨 있던 인간은 결국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포심이 없어지면 사람은 본디 가지고 있던 생물로서의 예민함을 잃어버립니다. 쾌적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은 근거 없는 안전 신화 같은 것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그 때문에 몇십 만, 몇백 만이 넘는 소중한 목숨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아주 커다란 실패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브뤼헐은 16세기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묵시록'적인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 p.134-135


소통을 희망하며 인류는 바벨탑을 짓습니다만, 그 거대한 시도는 인류에게 크나큰 재앙을 안깁니다. 우리는 결국, 서로와 소통되기를 희망하지만, 원하는 것 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역설이네요.
▲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1563년) 소통을 희망하며 인류는 바벨탑을 짓습니다만, 그 거대한 시도는 인류에게 크나큰 재앙을 안깁니다. 우리는 결국, 서로와 소통되기를 희망하지만, 원하는 것 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역설이네요.
ⓒ 구글아트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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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오만에 빠져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인간이 '완벽하게' 지배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으니, 기술의 개발은 보다 신중해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18세기의 인류가 '산업 혁명'을 통해 맛보았던 '단순 반복적인 노동의 기계화'라는 단 하나의 성공은, 인류를 오늘까지 이끌어왔다. 그러나 여기서 무서운 점은 달콤한 성공에 취해있는 채로는, 인공지능이나 생명공학 등의 '근사한' 신기술이 품고 있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오마이뉴스>의 집중 취재를 통해 확인한 4대강의 현실은 참혹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이 또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이 만들어낸 지옥도이며, 결국 자연만이 이를 되돌릴 수 있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은 실패이다.

인간의 무모함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 크고, 그 재앙의 수준은 더 이상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도달하고 있다. 한 번의 실패가 감내해야 하는 가치가 '생명'에 이르면, 그 절망이 너무 커,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저자는 브뤼헐을 인용하며 '희망'을 말한다.

'인간의 행위에 아무리 절망이나 암흑, 무상함이 들러붙고, 자연의 섭리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옥죄는 듯 보여도 브뤼헐의 그림은 '오로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져 있다'(발터 벤야민 '괴테의 친화력')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 p.136


교수대로 보이는 처형의 장소 주변으로 마을의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거나, 즐거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죽음이 일상적인 공간에서의 '일상'이라는 것이 의아한데, 엄숙함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음을 얘기하는 느낌입니다.
▲ 피터르 브뤼헐 '교수대 위의 까치' (1568년) 교수대로 보이는 처형의 장소 주변으로 마을의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거나, 즐거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죽음이 일상적인 공간에서의 '일상'이라는 것이 의아한데, 엄숙함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음을 얘기하는 느낌입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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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이야기하며 언급하는 작품인 '교수대 위의 까치'는 이미 같은 제목으로 된 책이 나와 있을 정도의 유명한 작품이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을 교수대가 서 있는 언덕 위에서, 사람들은 일상을 즐기며 춤을 추거나 같이 얼싸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를 내려다보며 교수대 위를  지키고 있는 까치의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죽음이 일상인 이 곳에서도 춤을 추는구나. 그래. 지금을 살아. 최선을 다해서, 후회하지 말고!'

얼마 전, 로빈 윌리암스의 2주기에 맞추어 재개봉한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다시 보았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디라'고 주장하는 어른들에 대항하는 키팅 선생(로빈 윌리암스 분)의 외침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울림이 크다. 하지만, 절망이 일상화 된 세상을 견뎌내기엔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강고한 절망에 간신히 틈을 냈다 하더라도, 일상을 즐기며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엔 끝없는 '죄책감'이 뒤따른다.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개인이 기대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나에게는 분명히 힘이 되겠으나, 결국은 문제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한가? 아픔을 덮은 채, 이대로 '살아가야' 하는가? 여전히 '희미한 빛'을 찾지 못하겠다.

'대지진이 일어나 수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삶의 터전을 잃고 막연히 비탄에 잠겨 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교수대 위의 까치> 같은 정경이 찾아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직은 교수대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받아들이는 힘'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붙들고 함께 춤추기 시작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 p.138

'아무리 문명이 발전한다 해도, '안전 신화' 같은 새로운 신화로 덮어서 숨기려 해도 결국에는 천재지변이 오고 맙니다. 이쪽 상황은 생각도 않고 막무가내로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전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재생 또한 좋든 싫든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아무리 폭력적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유린한다 해도 생명은 반드시 살아남아 싹을 틔우고 다시 번성합니다. 생명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남은 사람의 삶은 계속됩니다. ... (중략) ...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결단, 실의와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희미한 빛을 울타리 너머로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감동하는 힘이 결코 시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인생은 계속된다.' 춤추는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있는 까치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마음이 샘솟습니다.' - p.140-142


그래. 작가의 말을 믿어보자. 덮어놓은 상처들에게 미안하지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해보자.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에 죄책감보다는 '밝아진 희망'을 기대해보자. 절망으로 포기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살아냄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기운을 모아보자. '엄숙함'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살아남지 못한다면, 기억도, 아픔도, 절망도, 모두 해결할 방법이 없다(도망치는 것이 여전히 미안하지만, 살아있음을 부끄러워한다면 희망도 없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하지만, 제발 그것은 기억해라. 우리는 '아픔'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음을. 그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언제라도 도와줄 것임을. 그렇게, '지금'의 '나'만을 생각하라는 세상의 이기심에 저항하여,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임을. 제발, 기억하자, 잊지 말자.

책정보 : <구원의 미술관_그리고 받아들이는 힘에 관하여> 강상중 미술 에세이/노수경 옮김 (사계절 출판사, 2016)


구원의 미술관 - 그리고 받아들이는 힘에 관하여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사계절(2016)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구원의 미술관, #강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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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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