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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과 배장묘에 얽힌 이야기

 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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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이 있는 건현 양산(梁山)은 서안에서 서쪽으로 85㎞ 떨어져 있다. 70번 복은(福銀)고속도로를 따라 위하(渭河)를 건너면 함양시가 나온다. 함양 북서쪽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는 예천(禮泉)현을 지나 건현에 이르게 된다. 건현의 건릉 나들목에서 서쪽으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면 산봉우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궐루(闕樓)를 볼 수 있다. 그것이 동유봉(東乳峰)과 서유봉 궐루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 북봉(北峰)이 있는데, 그것이 건릉의 지궁(地宮)이다. 건릉은 당 고종 이치(李治: 628-683)와 그의 부인 무측천(武則天: 624-705)의 합장릉이다. 예종 때인 684년 고종의 능으로 만들어졌고, 중종 때인 706년 무측천을 합장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건릉은 당나라 18개 능 중 도굴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유일한 능으로 알려져 있다. 건릉 주변에는 17개의 배장묘(陪葬墓)가 있다.

 장회태자묘
 장회태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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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장묘는 황실의 왕자와 공주 그리고 공신들의 묘를 말한다. 건릉의 배장묘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 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다. 의덕태자는 고종과 무측천의 셋째 아들인 중종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할머니 무측천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장회태자는 고종과 무측천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인 무측천의 전횡을 비판하다 유배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영태공주(李仙蕙: 684-701)는 중종의 제7녀로 태어났으나, 할머니 무측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처럼 무측천은 권력욕으로 인해 자식과 손주들까지 죽인 지독한 여인이었다. 고종과 무측천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효경태자(孝敬太子) 이홍(李弘: 652-675), 장회태자 이현(李賢: 654-684), 중종 이현(李顯: 656-710), 예종 이단(李旦: 662-716)이다. 이들 중 위의 두 아들은 어머니 무측천의 전횡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 장회태자 이현은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골육상잔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비판하면서 '황대의 오이 이야기(黃臺瓜辭)'라는 시를 지었다.

황대 밑에 오이를 심었더니,                    種瓜黃臺下
오이가 익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네.       瓜熟子離離
하나만 따낼 땐 오이에게 좋았는데           一摘使瓜好
두 개를 따내자 오이가 드물어졌네.          再摘令瓜稀
세 개를 따낼 때 까진 괜찮았는데             三摘尚自可
다 따내고 나니 빈 넝쿨 뿐이로구나.         摘绝抱蔓歸

신도 좌우에 도열하고 있는 석물들

 화표석과 익마
 화표석과 익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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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제일도문(第一道門)을 지난 다음 어도(御道)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다. 동유봉 궐루와 서유봉 궐루가 동서에 우뚝하고, 그 아래에서 시작하는  신도(神道) 좌우로 화표석(華表石)이 한 쌍 서 있다. 여기서 화표석이란 신도 초입의 돌기둥으로, 이곳이 능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받침은 사각형이고, 그 위 기둥이 팔각형이며, 기둥 상단은 반구형으로 꼭지점이 있다. 화표석의 높이는 8m이다.

화표석 다음으로는 날개달린 말 익마(翼馬)가 있다. 익마는 천마(天馬) 또는 비마(飛馬)로 불리는 신성한 동물이다. 고대 최고통치자인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瑞獸)로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익마 다음으로는 동물과 사람을 조각한 석물들이 좌우로 한 쌍씩 서 있다. 이들 석물은 타조(駝鳥) 한 쌍, 견마석인(牽馬石人) 다섯 쌍, 석인(石人) 열 쌍으로 신도를 따라 좌우로 도열해 있다.

 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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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마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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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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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조는 남쪽을 지키는 주작(朱雀)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문지기 또는 경위로서의 역할을 한다. 견마석인은 말을 끌고 가는 문관으로 보인다. 석인은 직각장군(直閣將軍)으로 불리는 무관이다. 왜냐하면 긴 칼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석인의 사열을 받으면서 언덕에 오르면 두 개의 비석이 우릴 맞이한다.

능상에 있는 거대한 비석 두 기

 술성기비
 술성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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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개의 비석이 술성기비(述聖記碑)와 무자비(無字碑)다. 술성기비는 말 그대로 성스러움을 기술한 비로 고종의 송덕비다. 비문은 부인인 무측천이 찬하고, 글씨는 아들인 중종이 해서체로 썼다. 비석은 비좌(碑座), 비신(碑身), 비정(碑頂)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은 5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가 6.3m이다. 비석이 세워진 것은 건릉이 완성된 684년이다.

고종 이치의 문치무공(文治武功)을 기록한 술성기비는 내용상 크게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먼저 고종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로 고종의 황태자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세 번째로 아버지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네 번째로 고종의 황제 즉위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무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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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째로 고종의 문치무공을 기록하고 있다. 문무백관이 구름처럼 비처럼 모여 들어(謀臣如雨 猛將如雲) 그가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도록 하는 훈계가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성스러운 황제도 비천(菲)하게 장사를 치렀으니, 후덕하지 않는 자신을 야박(薄)하게 장사 치러달라는 내용이다.

무자비는 글자를 새기지 않은 비로, 무측천의 송덕비다. 비석은 비좌, 비신, 이수(螭首)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술성기비와 마찬가지로 높이가 6.3m이다. 무자비는 이름 그대로 글자를 한 자도 새겨넣지 않았다. 그것은 무측천의 '공이 높고 덕이 커서(功高德大)'라는 설이 있다. 또 자신의 공을 후세 사람이 평하지 말라는 유언을 무측천이 남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대금황제도통경략낭군행기
 대금황제도통경략낭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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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자비에는 현재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신에서 송, 금, 명나라 때 새겨진 한문과 여진문자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금황제도통경략낭군행기(大金皇弟都統經略郎君行記)'다. 금나라 황제 태종의 동생이 도통으로 이곳 건릉에 행차해 건릉의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구타(阿骨打)로부터 이어지는 금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여진족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외국 사신과 사자가 지키는 지하 궁전

 외국 사신
 외국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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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다음으로는 동궐루와 서궐루가 있다. 궐루는 지금으로 말하면 수위실에 해당한다. 그러나 누각은 없고 벽체만 남아 있다. 궐루를 지나면 61명의 외국 사신(王賓)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좌측에 29명, 우측에 32명이 서 있다. 그중에는 신라의 사신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이 대부분 훼손되어 국적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몸체의 일부까지 훼손된 것도 있다. 이들 사신의 키는 1.6m 정도다.

사신 다음으로 석사자(石獅子) 두 마리가 주작문(朱雀門) 앞을 지키고 있다. 사자는 높이가 3.35m로 크고 용맹스럽게 생겼다. 정중동의 자세로, 한 번 포효하면 천지를 진동시킬 것 같다. 주작문은 황제의 사후 궁전인 지궁의 남쪽 정문이다. 황제는 죽어서도 4대문으로 이루어진 지하 궁전에 살도록 되어 있다. 이들 4대문 앞에는 석사자가 한 쌍씩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석사자
 석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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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문을 지나 성곽 안으로 들어가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헌전(獻殿)과 영정(靈亭)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작문, 성곽, 헌전 등이 모두 파괴되고 없다. 그 대신 건릉을 알리는 표지석만 서 있다. 표지석 뒤로 향나무 가로수길이 산으로 이어진다. 이 길의 꼭대기가 북봉이고, 정상부에 상선관(上仙觀)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길을 따라 산 중턱까지 올라가본다.

산을 오르는 것보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중요

 당고종 건릉 표지석
 당고종 건릉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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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건릉을 읊은 시문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당나라 때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것도 있고, 20세기의 위대한 문필가 곽말약(郭沫若)의 것도 있다. 이상은은 건릉에 부는 쓸쓸한 바람을 노래했고, 곽말약은 당나라 문물의 번성을 노래했다. 역사는 이처럼 동시대에는 아쉬움을 기록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리움을 기록하는가 보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 봤지만,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야산에 불과하다. 더 올라간다고 해서 더 나올 것이 없다. 건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능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건릉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은 지궁에 묻혀 있을 것이다. 1960년 내부에 대한 일부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건릉의 외부와 내부
 건릉의 외부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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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지궁이 묘도(墓道), 침궁, 석관, 후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석관은 고종과 무측천의 것이 나란히 있으며, 그 크기가 길이 5m, 폭 2m였다고 한다. 부장품으로 봉관(鳳冠), 의복, 진주, 보주(寶珠)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묘도에는 배장묘에서와 같이 벽화와 명기(冥器)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릉을 나오면서 보니 신도 옆으로 토성 흔적도 보인다. 우리는 이제 버스를 타고 장회태자묘와 영태공주묘를 보러 간다.


#건릉#고종과 술성기비#무측천과 무자비#석물#지궁(地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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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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