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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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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유억불의 시대, 사찰의 생존전략

'1693년(계유년, 숙종 19년) 시월 초닷새,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소박하게 생긴 스님이 대궐로 걸어들어와 이내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다시 사흘 뒤, 궐에 상서로운 빛이 내리자 사람을 시켜 그 빛이 솟은 곳을 찾아보라 일렀다. 왕의 명을 받은 이가 남대문에 이르러 보니 한 여각에 파계사의 영원 스님이 묵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이내 왕은 그를 불러 아들의 점지를 바라는 축원 기도를 드려주도록 부탁했고, 왕의 명을 받은 스님은 수락산에서 백 일간의 기도를 드렸다.

백일기도가 끝나던 날, 왕의 후궁이었던 숙원 최 씨의 꿈에 함께 축원 기도를 드린 농산 스님이 나타나고, 이듬해인 1694년(숙종 20년) 9월 왕자가 태어난다. 이에 기뻐한 숙종은 파계사로 돌아가는 스님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리고, 내탕금을 내어 사찰의 건물을 짓는 데에 쓰게 했다.'

1935년, 성전암으로 오르는 옛길 한 편의 승탑 구역에 세워진 사적비에는 파계사의 삼창주로 받들어지는 현응 스님과 숙종의 만남, 후궁의 아들로서 형(경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의 탄생을 대략 이렇게 적어놓았다. 실록이나 여러 기록에는 찾아보기 어렵기도 하고, 앞서 설화들이 오로지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도 않지만, 숙종 대부터 맺어진 파계사와 조선왕실의 인연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왕실과 사찰의 관계 맺음은 결국 숭유억불의 시대에 사찰이 살아남을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탄생으로 인연을 맺은 영조는 왕이 되기 전부터 파계사에 직접 편액을 써서 하사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완문-증명, 허가,명령 등의 처분을 기록한 문서-을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제하고, 사찰에 대해 수시로 행해지던 양반 토호와 관리의 침탈을 막아주었다. 지금도 승탑 구역 옆에 오롯이 서 있는 '하마비'와 임금의 위패와 어필을 모셨다는 '원통전' 옆에 자리 잡은 '기영각'의 존재는 그런 파계사의 지위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파계사진동루
 파계사진동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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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굽이 계곡을 틀어쥐고 자리 잡다

'계곡을 틀어쥔다'는 뜻의 '파계'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계사는 사찰의 양옆으로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팔공산계곡의 흐름을 모아서 틀어쥐듯 계곡 사이의 비탈에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고 앉아있다. 파계사는 그 이름 말고도 휘돌아 내려가는 계곡을 통해 땅의 기운도 함께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풍수적 조처를 했는데, 사찰의 본 영역으로 들어서는 누각의 이름을 '기운을 누른다'는 의미를 가진 '진동루'로 명명한 것이나, '진동루' 아래로 인공연못을 조성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듯하다.

언뜻 계곡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듯 자리 잡은 탓인지 사찰의 규모가 옹색하거나 복잡다단할 것 같지만, 사찰 전체를 마치 연극무대의 커튼처럼 가로막고 서 있는 '범종각'과 '진동루'를 돌아 파계사의 중심 건물인 '원통전' 앞에서 서게 되면 이 절의 가람배치가 얼마나 정연한 구조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규모 면으로는 크지 않지만 딱 그만큼이다 싶게 자리 잡고 앉은 원통전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들어선 설선당, 적묵당, 기영각, 그리고 골짜기를 살짝 지나 자리 잡은 여러 건물이 답답해 보이지 않게 높이를 달리하며 들어앉아 건물과 건물 사이를 좁은 통로와 계단으로 잇고 명확하게 구획을 나눠놓음으로써 크지 않은 부지에 들어서 있으면서도 결코 좁은 절이라고 느껴지지 않게 조성되어 있다.

거기에다가 원통전과 설선당, 적묵당으로 이뤄진 네모난 마당은 반듯한 화강석으로 덮어놓아 훨씬 더 넓고 정연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데, 그에 더해 새삼 이 절이 오래된 수양공간이었음을 함께 느끼게 해준다.

파계사 적묵당
▲ 파계사 적묵당 파계사 적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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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기영각과 산령각
▲ 파계사 기영각과 산령각 파계사 기영각과 산령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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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다

파계사의 중심법당은 부처님(여래)이 아니라 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다. '진리는 원만하며 모든 것에 통한다'는 '주원융통'에서 유래한 '원통전'은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서원을 세운 관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관음보살을 모시기에 일반적으로 '관음전'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어진다.

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로 불리기도 하는 관음보살은, 죽은 이의 사후에서 구제하는 지장보살, 먼 미래에 인간 세상을 구원할 미륵보살과 함께 특히 민중들의 사랑을 받는 보살이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민중들의 삶이 팍팍해질수록 사람들은 의지할 곳을 찾았으며, 이런 상황에서 쏟아져 나온 절절한 기원들은 때로는 항쟁이 되고, 반란이 되어 사회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기도 했으며, 급기야 지배층을 갈아치우기도 했었다.

팔공산 파계사
▲ 팔공산 파계사 팔공산 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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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원통전
▲ 파계사 원통전 / 보물 제1850호 파계사 원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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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 밑을 통과하는 길을 제한한 덕에 '진동루'를 돌아 계단을 오르면 반듯하게 조성된 화강암 돌판으로 된 마당이 나오고 좌, 우로 설선당과 적묵당을 거느리고 소소한 석축 기단에 올라앉은 '원통전'은 파계사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잘 안착하여 작으면서도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파계사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에서 기인하는데, 어떤 건물이든 그 절대적인 규모가 다른 사찰의 여타의 건물들보다 크다고 볼 수 없지만, 전체 사찰부지의 틀에 맞춰 딱 맞는 크기로 들어앉아 이곳에서만큼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조선 후기 건축물의 양식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는 하나 고건축에 대한 지식이 걸음마 수준인 나로서는 그런 건축학적, 미적 가치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자그마한 체구지만 당당하게 자리 잡은 느낌은 웬만큼 큰 사찰들의 주불전보다 훨씬 주인공 같다는 느낌을 준다.

또 하나, 이 원통전이 깊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불전에 품은 범상치 않은 귀중한 문화유산들 때문이다. 원통전에는 보물 992호 건칠관음보살좌상과 보물 1214호 영산회상도, 그리고 그 조각이 범상치 않은 대구유형문화재 73호인 수미단이 자리 잡고 있다. 보살상이므로 협시불 없이 혼자 법당에 자리 잡은 건칠관음보살좌상과 선명하고 화려하게 자리 잡은 영산회상도는 그 자체로 훌륭한 짝을 이뤄 법당을 범상치 않은 기운으로 채우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보살상의 발아래로는 종교적 장엄함을 넘어 구체적 기원의 대상으로 중생들에게 한 발짝 다가오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 3층으로 된 수미단이 자리 잡고 있다.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 파계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214호, 파계사 원통전 수미단/대구유형문화재 73호
▲ 파계사 원통전 내부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 파계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214호, 파계사 원통전 수미단/대구유형문화재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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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 사찰이 관음보살을 모신 까닭은

전해져오는 이야기로는 숙종은 현응스님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 파계사 주변 40여 리의 고을에서 나라에 내는 세금을 파계사에 거두어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하지만, 현응 스님은 숙종의 그 제안을 거부하고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게 해달라고 청원하였고, 그 결과로 기영각을 지어 선대왕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한다.

그로 말미암아 파계사는 조선 시대의 다른 사찰들처럼 지방 양반 토호들이나 관리들의 수탈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앞서 말한 사적비 옆에 자그맣게 세워진 '대소인개하마비'의 존재이다. 누구나 절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관음보살을 모신 것은 훨씬 오래전부터였겠지만, 자비로써 중생을 다스리는 관음보살의 모습과 수도자들의 수양 도량으로, 백성들의 기도 도량으로써 남고자 했던 현응 스님의 마음이 겹쳐져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바로 옆의 동화사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역사와 지위를 자랑한 파계사가 지금은 비록 동화사에 밀려 뭇 사람들의 눈에 벗어나 다소 작아 보이는 사찰이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지금의 모습조차도 옛 스님의 정연한 마음가짐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의 결과이기도 한 것 같아 한껏 마음이 풍성해지는 답사길을 경험하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바람길닷컴'(baramgil.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파계사, #파계사원통전, #팔공산파계사, #답사여행, #사찰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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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가를 희망하다. post.naver.com/baramgil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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