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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전시실
 수,당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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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제3전시실이다. 이곳에는 중국문화의 전성기로 알려진 당나라 문화유산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 당이라는 이름으로 수나라를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한나라 멸망 이후 300년 이상 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다시 통일한 나라가 수나라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진과 한을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것처럼 수와 당도 연결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수나라는 황하와 장강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고, 3성6부라는 통치체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수 문제(文帝) 때 장안에 새로운 도성인 대흥성(大興城)을 완성했다. 그러나 문제가 법치라는 이름으로 신하와 국민들에게 법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민심이 이반하게 되었다. 그리고 태자에 대한 불신으로 부자갈등이 생겨, 태자가 반란을 일으켜 문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로 등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양제(煬帝)다.

낙타용
 낙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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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안이 지나치게 서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인식, 낙양을 동도(東都)로 정하고 양주(揚州)를 강도(江都)로 정했다. 그는 대운하를 통해 동북쪽과 남쪽으로 교류를 확대했다. 그 결과 강남경영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지나친 토목사업으로 경제적인 부담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서쪽의 돌궐과 북쪽의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수행한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현재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수나라 문화유산으로는 황유도용(黃釉陶俑)이 있다. 황색 유약을 칠해서 은은한 빛이 나는 도용으로 동물용이 인상적이다. 기마용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말, 서역과의 교류를 위해 필요했던 낙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소, 닭, 돼지, 개, 양 등이 도용으로 제작되어, 무덤에 넣어졌던 것이다. 이들의 유약이 상당부분 벗겨지기는 했지만, 사실성과 예술성이 뛰어나다. 낙타는 쌍봉 낙타고, 말은 준마(駿馬)임을 알 수 있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어디서 찾지?

당 현종과 양귀비
 당 현종과 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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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번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시초는 정치에 있다. 618년 이연(李淵)에 의해 당나라가 세워졌고, 2대 태종 이세민에 의해 정관의 치(貞觀之治, 626~649)가 이루어졌다. 정치 시스템을 개혁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균전제와 조용조법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켰다. 계급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고, 국자감과 홍문관을 설립 학문을 육성했다. 그리고 <오경정의(五經定義)>를 편찬, 경전을 통일했고 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종 이융기(李隆基)에 의해 개원의 치(開元之治, 712~741)가 이루어져 문화융성 국가가 될 수 있었다. 현종은 그 자신이 문화와 예술을 좋아해서 직접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시인인 왕유(王維, 692~761),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가 이 시대 사람이다. 종교적으로도 중국의 유교와 도교뿐 아니라 불교도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외 개방정책을 통해 이슬람교, 경교, 배화교, 마니교 같은 외래종교도 허용했다.

당나라 때 와당: 중앙의 자방 부분이 볼록한 것이 특징이다.
 당나라 때 와당: 중앙의 자방 부분이 볼록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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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성당이라고 부르는 시기는 태종의 정관의 치에서 현종의 개원의 치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을 말한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현종이 말년에 이르러 방종과 향락에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면서 국운이 쇠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은 오히려 국운이 쇠퇴할 때 마지막 빛을 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선지 한유(韓愈, 768~824)와 유종원(柳宗元, 773~819) 같은 문장가, 백거이(白居易, 772~846) 같은 시인은 8~9세기에 문명을 날렸다.

이번 답사에서는 성당의 흔적을 서안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능묘를 찾고, 절을 방문하고, 궁궐과 성곽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박물관을 찾아 성당의 흔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황실에서 사용한 금은옥기, 절에 공양물로 바쳐진 진귀한 보물, 능묘에서 출토된 도기, 능묘의 벽에 그려진 벽화, 궁궐과 절에 사용된 와당 등 최고의 문화유산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금속공예는 어느 수준일까?

금동제 문고리
 금동제 문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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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당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금동제 문고리(鋪首) 한 쌍이다. 당나라 대명궁(大明宮) 유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청동에 금 도금을 했다. 지름 26.5㎝의 원형에 연주문을 두르고, 그 안에 양각으로 용의 얼굴을 표현했다. 코가 가운데를 차지하고 그 아래 입에 고리를 물렸다. 외부로 들어오는 악귀를 쫒는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동제 용은 역동성이 뛰어나 눈길이 간다. 앞의 두발을 땅에 딛고, 몸을 S자로 해 물구나무를 선 다음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모습이다. 머리 부분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했다. 뿔이 수평상태로 뒤로 넘어갔고, 턱 뒤로 지느러미는 머리에 바짝 붙었다. 이빨 사이로 혀를 내밀어 중심을 잡았다. 역동성과 예술성이 어우러진 명품이다. 이것은 서안 남쪽 초장파(草场坡)에서 1975년 출토되었다.  

원앙연판문 금 용기
 원앙연판문 금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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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연판문(鴛鴦蓮瓣紋) 금 용기는 조각이 아주 정교하다. 연판 모양 속에 원앙, 오리, 앵무새, 여우 등이 조각되었다. 연판 위 용기 상단에는 나는 새와 구름 무늬를 새겨 넣었다. 이 용기를 받치는 아랫단에는 물고기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릇 안쪽에 구량반(九兩半)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 그릇의 용량을 표기한 것이다. 이 근 용기는 술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춤추는 말이 양각된 물통형 주전자도 의미 있는 유물이다. 거란족이 사용하던 가죽 주머니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당나라와 북방 민족의 문화교류와 융합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주물과 단조, 용접과 연마 등 다양한 공예기법을 사용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었다. 물통의 말조각도 뛰어나지만, 상단부의 손잡이와 뚜껑 그리고 뚜껑 줄 등이 보여주는 실용성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당삼채에서 색채 예술의 절정을 보다

마용 당삼채
 마용 당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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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예술의 정화(精華)는 당삼채(唐三彩)다. 당나라 초기의 황유 또는 녹유 도용이 화려한 삼채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당삼채는 말 그대로 세 가지 색깔의 유약을 사용한 도자기다. 백색 바탕에 황색과 녹색이 칠해진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갈색과 남색이 추가되기도 한다. 당삼채는 전 시대의 도자기에 비해 색깔은 화려해지고, 형태는 정교해졌으며, 용기는 다양해졌다.

당삼채는 인물, 동물, 기물(器物)의 세 가지로 대별된다. 인물은 문관, 무관, 귀부인, 시녀, 아이, 기녀, 서역인, 호인(胡人) 등으로 대별된다. 동물로는 말, 낙타, 소, 양, 사자 등이 만들어졌다. 그중 말과 낙타가 가장 많은 편이다. 말은 운송수단으로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고, 낙타는 당나라 때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기물로는 항아리, 병, 주전자 같은 생활용기, 다기, 문방사우가 있다.

다양한 기마용
 다양한 기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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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이 실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넣는 명기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삼채는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는 경향이 있다. 건릉의 배장묘인 의덕태자묘, 장회태자묘, 영태공주묘 등에서 다량의 당삼채가 발견되었다. 무덤의 부장품으로 진묘수(鎭墓獸)와 사천왕이 나오기도 한다. 이들은 무서운 얼굴을 한 짐승과 사람으로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당삼채 중 가장 멋진 것은 기마용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병사의 모습을 표현한 병마용은 생동감이 있고 예술성이 뛰어나다. 병사들이 말 위에서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 위에 탄 사람이 문관인 경우도 있고, 여인인 경우도 있다. 여인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은 또 다른 재미를 부여한다. 말을 끌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우아한 여인용이나 점잖은 문관용도 보인다.

손잡이 달린 항아리
 손잡이 달린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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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채의 화려함에 있어서는 마용과 낙타용이 단연 으뜸이다. 마용은 안장과 재갈이 정교하게 표현되었고, 말의 어깨와 엉덩이 부분 장식도 푸른색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장식을 꽃이나 잎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낙타용은 대개 짐을 싣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등에 짐을 실은 모습이 많다. 그러나 사람이 타거나 끌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낙타를 다루는 사람은 서역인이나 호인이다.

황색과 녹색에 갈색이 들어간 항아리와 주전자 화병 등도 여럿 있다. 이들은 대개 생활용품으로 쓰이던 것이다. 그래선지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색깔이 바래거나 벗겨진 경우가 별로 없다. 항아리는 입구 부분에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주전자는 주둥이가 있다. 화병은 색채 외에 양각을 통해 예술성을 높이려 했다. 또 참외 모양 다기도 눈에 띈다. 이처럼 당삼채는 명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생활용기로도 사용되었다.  

석굴사원
 석굴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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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고 나면 마지막으로 불교유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불교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당나라 전시실을 떠나며 우리는 석굴사원을 잠시 살펴본다. 부처님의 상호가 상당히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이들을 보고 나면 동선은 자연스럽게 송나라에서 청나라 유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도에서 관람을 마친다. 다음 여행지가 우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화청궁으로 향한다. 


태그:#수나라 , #황유도용, #당나라, #금속공예, #당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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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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