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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8세.
헨리 8세.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지금의 유럽연합(EU)과 똑같지는 않지만 좀 유사했던 게 있었다. 일명 '고전판 EU'라 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고전판 EU에 대해서도 '회원국'의 도전이 있었다.

그런 도전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 중 하나가 영국왕 헨리 8세(재위 1509~1547년)의 사례다. 헨리 8세는 16세기판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감행한 인물이다. 조선 제11대 주상인 중종 임금(재위 1506~1544년)과 집권 기간이 겹치는 군주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한 1804년 이전의 서유럽에는, 다른 지역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유의 국제 공동체가 있었다. 로마교황이 종교적 정점에 서고 로마제국 후계자가 세속적 정점에 선 가운데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됐던 것이다. 교황청이 서유럽의 종교적 정점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에 비해 로마제국 후계자가 세속적 정점에 있었다는 것은 생소할 수도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힘만 있으면 황제국이 될 수 있었다. 일례로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고려) 광종 11년에 개경을 황도(皇都)로 고쳤다"고 했다. 제4대 군주인 광종이 960년에 개경을 '황도' 즉 '황제의 도읍'으로 불렀다는 것은 이 시기부터 고려 군주가 황제로 불렸음을 뜻한다.

<고려사> 음악지에 따르면, 고려 군주를 찬양하는 <풍입송>이란 노래는 "해동 천자, 금상 폐하"라는 구절로 시작했다. 고려 군주도 황제와 동격인 천자 혹은 폐하 등으로 불렸던 것이다. 또 동아시아 유목국가들의 군주는 황제와 동격인 '칸'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일본 군주 역시 황제와 동급의 칭호를 자칭했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는 누구나 힘만 있으면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고전판 EU'의 파괴자, 나폴레옹

한편, 1804년 이전의 서유럽에서는 로마교황청에 의해 로마제국 후계자로 인정된 군주만이 황제 칭호를 쓸 수 있었다. 서로마제국·동로마제국·프랑크왕국·신성로마제국 군주는 그렇게 해서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이 외의 군주들은 왕이나 대공·공 같은 제후 칭호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랬기 때문에 로마제국 후계자로 인정된 나라가 황제 자격으로 서유럽 정치질서의 정점에 서고, 나머지 국가들은 제후 자격으로 피라미드 구조의 하부를 차지했다. 그래서 서유럽은 외형상으로 국제공동체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황제국과 제후국, 상급 제후국과 하급 제후국 간의 조공관계를 통해 상품이 국제적으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서유럽은 종교적·정치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느닷없이 나폴레옹이 나타나 로마제국 후계자로서가 아니라 프랑스 군주로서 황제 자리에 오른 1804년까지, 이 질서는 외형상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황제 칭호를 마음대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서유럽 질서를 'KO'시킨 나폴레옹은 그래서 '고전판 EU'의 파괴자였다.  

그런데 나폴레옹 이전에 '원투 스트레이트' 정도의 타격을 고전판 EU에 입힌 인물이 바로 헨리 8세였다. 튜더 왕가의 헨리 8세는 나폴레옹처럼 'EU'를 파괴한 게 아니라, 거기서 탈퇴하는 강수를 꺼내들어 결국 성사시켰다. 

교황청이 부인과의 이혼을 불승인하자, 돌변

정복자 윌리엄 1세가 나라를 세운 1066년 이래, 모든 영국 왕은 어떤 형태로든 윌리엄 1세의 후손이다. 아버지 쪽이 아니면 어머니 쪽으로 어떤 식으로든 윌리엄 1세와 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 1세 이후의 영국 왕가들은 윌리엄 왕가의 분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새로운 성씨가 기존 왕조를 멸망시키는 게 아니라, 기존 왕조와 혈통적으로 연결된 가문이 새로운 왕가를 여는 일들이 되풀이됐던 것이다.

튜더 가문의 경우에는, 어머니 쪽이 윌리엄 1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1485년 새로운 왕가를 열었다. 1485년이면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조선을 통치할 때다. 헨리 8세는 그때 세워진 튜더 왕가의 제2대 군주다. 제2대 군주인 헨리의 이름 뒤에 '8세'라는 순서가 붙은 것은, 그가 윌리엄 1세 이후로 헨리라는 이름을 사용한 여덟 번째 군주이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처음엔 'EU'에 충성했다. 로마교황청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 로마제국 후계자인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오스트리아)의 권위에 대해서도 승복했다. 1513년에는 교황청에 도전하는 프랑스를 응징할 목적으로 연합군을 형성해 침공을 감행했을 정도다. 그러나 교황청이 부인과의 이혼을 불승인하자, 'EU'에 대한 그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6세기판 브렉시트의 출발점이다.

헨리 8세의 왕비인 캐서린은 원래 그의 형수였다. 형이 죽은 뒤에 아버지 헨리 7세의 명령으로 형수와 결혼했던 것이다. 헨리 8세는 처음엔 캐서린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캐서린이 형수였다는 사실을 이유로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라는 구약성경 레위기 18장 16절을 근거로 캐서린과의 혼인관계가 부당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진짜 동기는 후계자 문제에 있었다. 캐서린이 낳은 왕자들은 다들 유산되거나 영아사망을 했다. 남은 아이는 메리 공주뿐이었다.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여성과 재혼할 목적으로 이혼을 추진했던 것이다. 공주도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지만, 잘못하면 공주의 시댁 쪽으로 권력이 넘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왕자를 선호했던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
교황 클레멘스 7세.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당시의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승인했다면, 헨리 8세가 'EU'에 저항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교황이 승인을 거부한 것은 꼭 종교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교황의 권위를 힘으로 누르고 있었던 사람이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그 사람 힘에 눌려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왕인 카를 5세다. 그가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한 것은 이혼에 대한 부정적 관점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캐서린의 조카였다. 그래서 이혼을 반대했던 것이다.

왕자 얻을 목적으로 이혼을 선택한 헨리8세

로마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반대에 부딪힌 헨리 8세는 결국 '브렉시트'를 선택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영국 교회를 로마교황청과 단절시켰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를 만들고 자신이 수장으로 취임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혼에 대한 종교적 승인을 획득한 것이다. 이렇게, 왕자를 얻을 목적으로 이혼을 선택한 헨리 8세 때문에 당시의 영국인들은 'EU 탈퇴'라는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유럽 대륙에 대한 영국인들의 부정적 관념도 한몫을 했다.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섬나라 일본이 예로부터 한국·중국 등 대륙국가들에 대해 이질감을 느꼈던 것처럼, 유라시아 서쪽 끝에 있는 섬나라 영국도 대륙국가들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영국을 대륙으로부터 분리하는 감정이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적인 감정도 헨리 8세의 '브렉시트'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혼을 위해 로마교황청과 단절한 헨리 8세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상당히 유명한 사건이다.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면서 이혼을 단행한 그는 결국 소기의 목적을 성취했다. 그는 캐서린과 이혼한 뒤에 다섯 번이나 재혼을 했다. 그 다섯 명의 왕비 중 하나인 제인 시모어한테서 그는 왕자를 얻었다.

에드워드 6세로 불리는 그 왕자는 왕위에는 올랐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열한 살에 즉위하여 6년 뒤에 죽었다. 그는 병약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드 6세가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한 것은 헨리 8세의 두 딸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다.

메리는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딸이고, 엘리자베스는 두 번째 왕비인 앤 블린의 딸이다. 엘리자베스의 경우에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는 역사적 업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함께 튜더 왕가는 막을 내렸다. 뒤를 이은 것은, 어머니 쪽으로 튜더 왕가의 피가 섞인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였다. 제임스의 등극으로 스튜어트 왕가가 윌리엄 1세의 후예 자격을 얻고 영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헨리 8세의 브렉시트는 영국의 국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유럽 최강을 향해 점차적으로 달려가는 나라였다. 국운이 상승세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6세기판 브렉시트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크나큰 손실 없이 부국강병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브렉시트#유럽연합#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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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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