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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호서원 강당
청호서원 강당 ⓒ 정만진

[기사 수정 : 2018년 7월 9일 오후 5시 51분]

청호서원은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산79-4번지에 있다. 청호서원이 산비탈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주소 지번에 '산'이 붙은 것만으로도 쉽게 짐작이 된다. 서원 앞 안내판은 '이 서원은 조선 때의 학자였던 손처눌, 류시번, 손조서, 정호인 네 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하고 말문을 연다.

안내판은 네 선비 중 손처눌을 가장 앞에 두었다. 손처눌의 이름이 맨 먼저 등장하는 것은 그가 네 사람 중 최고령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손처눌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의 중요 의병장인 반면, 손조서는 그보다 140년가량 전 세조 즉위 때(1455년)의 인물이다.

충절 지키며 '왕위 찬탈' 수양대군 거부한 손조서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한림학사로 함께 일했던 손조서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후 그는 세조가 여러 차례 부르지만 응하지 않고 충절을 지켰다.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하는 많은 시들 중 두 편만 감상해 본다.

珍珠生海曲 아름다운 구슬이 바다에서 태어나는데
圓潔等孤輪 둥글고 깨끗하여 하나의 수레와도 같아라
若掛靑空上 만약 푸른 창공에 걸려 있다면
能明萬國春 온 세상의 봄을 밝힐 수 있을 터인데

그의 '절구(絶句)' 전문이다. 일출 또는 월출 직전의 맑고 황홀한 정경을 간결하게 네 줄로 압축해서 형상화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시의 심상이 의유당 김씨의 '동명일기'를 그대로 연상시킨다.

'홍색(紅色)이 거록하여 붉은 기운이 하늘을 뛰노더니, 이랑이 소래를 높이 하여 나를 불러, "저기 물 밑을 보라." (하고) 외거늘, 급히 눈을 들어 보니, 물 밑 홍운(紅雲)을 헤앗고 큰 실오리 같은 줄이 붉기 더욱 기이하며, 기운이 진홍(眞紅) 같은 것이 차차 나 손바닥 넓이 같은 것이 그믐밤에 보는 숯불 빛 같더라. 차차 나오더니, 그 우흐로 적은 회오리밤 같은 것이 붉기 호박(琥珀) 구슬 같고, 맑고 통랑(通朗)하기는 호박도곤 더 곱더라.'

의유당 김씨가 '동명일기'를 발표한 때는 1772년(영조 48)으로 알려진다. 손조서보다 대략 320여 년 뒤의 일이다. 물론 의유당 김씨가 손조서의 시에서 '동명일기'의 착상을 얻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밀하고 품위 있는 문체의 의유당 김씨가 뛰어난 고전 수필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듯, 손조서 또한 격조 높은 감수성을 우아한 수사로 잘 표현해낸 뛰어난 시인이라는 말이 하고 싶을 뿐이다.       

손조서의 다른 시, 예를 들면 '황앵아(黃鶯兒)'를 감상해 보아도 그가 뛰어난 시인이라는 평가는 결코 과찬이 아니다. 유리왕의 '황조가'를 통해 익숙히 알려진 바와 같이 황앵아는 꾀꼬리를 가리킨다. 날마다 골짜기 안에서만 오가며 날아다니는 꾀꼬리를 보면서도 손조서는 남다른 혜안을 보여준다.

常囀聲將慣 늘 지저귀는 소리 드디어 익숙해지고
勤飛羽始調 부지런한 날갯짓도 이제는 자연스럽도다
莫言長在谷 오래 골짜기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一日倏升喬 어느 날 문득 높이 솟아 오르느니라

꾀꼬리는 어제도 오늘도 같은 모습으로 날고, 날마다 변함없는 소리로 지저귀고 있다. 게다가 어린 꾀꼬리는 소리도 날갯짓도 이제야 겨우 어색함을 벗어나는 지경이다. 누군가는 '왜 저렇게 발달이 느릴까' 하며 답답해서 질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 언젠가는 저 어린 새도 높이 날아오르리라.

김굉필과 정여창을 제자로 두었던 선비

 청호서원의 강당과 손처눌 유허비각이 보이는 풍경. 사당은 사진에서 유허비각 뒤편에 있다.
청호서원의 강당과 손처눌 유허비각이 보이는 풍경. 사당은 사진에서 유허비각 뒤편에 있다. ⓒ 정만진

손조서는 일반적인 현대인들에게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서 감상한 두 편의 시만 읽어도 그가 어째서 뛰어난 시인으로 유명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게다가 그는 출중한 학자였고, 김굉필과 정여창 같은 걸출한 제자들까지 길렀는데 말이다.

흔히 김굉필과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굉필과 정여창이 손조서의 제자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손조서가 김종직과 더불어 당대의 거유(巨儒)였음을 증언해주는 기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손조서의 생애를 핵심 부분만 발췌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손조서는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서 김종직과 친교가 있었고, 김굉필, 정여창 등의 제자를 두었다. (중략)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구의 청호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런데 같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손조서' 항목이 아니라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원1리길 17-18에 있는 '혜산서원' 항목을 찾아보면 '1753년에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창건하고, 손조서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되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에 훼철되었고 이후 철운재(徹雲齋)로 편액되었다, 1971년 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개칭하고 중건하여 손공량, 손처눌, 손린, 손우남의 사위(四位)를 추향(追享)하였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결론을 말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손조서' 항목에 혜산서원을 빠뜨렸다. 손조서는 대구의 청호서원에만 모셔진 것이 아니라 경남 밀양의 혜산서원에도 제향되고 있다. 손조서가 청호서원에 모셔진 때는 1775년(영조 51)이고, 혜산서원에는 그보다 22년 빠른 1753년(영조 29)부터 모셔졌다. 즉 혜산서원은 처음부터 손조서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고, 손처눌을 기리기 위해 1685년(숙종 11)에 세워진 청호서원에는 뒷날 다시 모셔진 것이다.

따라서 손처눌의 이름이 청호서원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는 네 인물 중 맨 앞에 언급된 것은 그가 이 서원에 가장 먼저 모셔진 선비이기 때문이다. 1685년(숙종 11) 대구의 선비들은 손처눌이 40여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던 영모당(永慕堂)에 새로 터를 잡아 청호사(靑湖祠)를 세웠다. 1694년(숙종 20) 청호사는 청호서원으로 승격되었고, 사당에는 숭인사(崇仁祠)라는 새로운 현판이 걸렸다.

영조 31년, 임란 의병 류시번을 추가로 배향

 서원 외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손처눌 선생 유허비
서원 외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손처눌 선생 유허비 ⓒ 정만진
1755년(영조 31) 청호서원은 류시번(1569∼16 40)을 배향했다. 과거를 볼 생각 없이 학문에만 전념한 류시번은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겸의 제자이자 손처눌에게도 학문을 배운 선비였다. 물론 류시번은 두 스승 곽재겸과 손처눌을 도와 임란 당시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 대구 지역 의병 총부대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775년(영조 51)에는 손조서와 정호인을 추가로 모셨다. 손조서는 손처눌의 5대조이고, 손처눌의 제자로서 진주목사 등을 역임한 정호인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영남도의진(嶺南都義陣) 부영장(副營將)으로 활동한 선비이다. 

손처눌은 1553년(명종 8) 출생하여 1634년(인조 12) 타계한 대구의 선비이자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그는 14세부터 전경창에게, 그 후 정사철,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15세와 21세에 각 도에서 실시하는 1차 과거인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전국 단위의 본시험인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손처눌의 문집 <모당집> 연보에는 과거에 실패한 소감을 시로 나타낸 '득실(得失)'이 실려 있다.

由來得失莫之爲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니
得豈欣欣失豈悲 얻었다고 어찌 기뻐하며 잃었다고 어찌 슬퍼하랴
自古劉賁亦下第 예로부터 유분 같은 이도 역시 낙방했으니
始知時命必相隨 때와 인생은 반드시 서로 이어짐을 이제 알겠네

유분은 과거를 보면서 당시 실세인 환관을 비방했다가 낙방한 당나라 때의 선비이다. 손처눌이 유분을 거론한 것은 과거 낙방이 자신의 능력 문제가 아닌, 능력으로 미칠 수 없는 당시의 정치 현실 때문에 빚어진 운명으로 여겼음을 암시한다.

스승들도 이 시를 본 뒤로는 과거를 통해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 손처눌과 맞지 않다는 견해를 나타내었다. <모당집>에 따르면, 전경창은 손처눌의 아버지 손수에게 "아드님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니 과거로써 기약하지 말라(胤君非吾輩人 勿以科目期之)" 하고 당부했고, 정사철도 사람들에게 "지난 번 손처눌이 응시한 글을 보니 뜻이 바르더라(向見孫某應試之文 命義得正)" 하고 평가했다. 그 이후 손처눌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 2대 의병 총대장 손처눌

 청호서원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
청호서원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 ⓒ 정만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손처눌은 서사원의 뒤를 이어 대구 지역 전체 의병의 총대장이 되었다. 1592년 8월 29일, 아버지가 이미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조부모 타계를 맞아 치르는 승중손(承重孫)을 서사원이 당하게 되어 더 이상 의병대장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선비들은 손처눌을 후임으로 추대했다.

손처눌이 서사원의 후임으로 공산의병진 총대장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평소에 대구 지역 유림에서 큰 신망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이상필은 논문 <임란 전후 대구 유림에서의 모당 손처눌의 역할>에서 '연경서원은 1602년에 중수하게 되었는데 모당이 이를 주도했다, 그리고 1613년 11월에는 여기에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때의 고유문과 봉안문을 모두 모당이 지었다'면서 '이를 보아, 그가 당시에 대구 사림을 주도하였음은 물론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팔공산 부인사에 본부를 둔 공산의진군, 즉 대구 의병 조직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까지 일본군이 팔공산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어해냄으로써 산 속에 피란 와 있던 대구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내었다. 정유재란 때에도 손처눌은 재차 의병을 일으켜 달성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당시 경상도관찰사 한준겸이 그의 공을 보고하여 조정이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강력히 사양하였다.

연경서원과 영모당에서 제자 가르치는 데 전념

종전 이후 손처눌은 서사원, 곽재겸, 류요신, 채몽연 등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선비들과 함께 연경서원, 이강서원의 전신인 선사재, 영모당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서사원과 더불어 강장(講長) 역할을 했던 손처눌은 서사원이 1615년 타계한 이후에는 영모당에서 홀로 강의를 계속했다. <영모당 통강제자록(通講弟子錄)>에는 34명의 과거 급제자를 비롯한 202명의 제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서원에 18명, 사당에 3명의 선비가 배향되어 스승의 이름을 빛냈다.

 사당의 현판과 나무 건축재의 빛깔이 아름답다.
사당의 현판과 나무 건축재의 빛깔이 아름답다. ⓒ 정만진

그러나 학문과 창의에 신명을 바쳤던 손처눌도 자연의 법칙에는 천연히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1634년(인조 12) 6월 초하루, 그는 82세의 고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예감한다. 그는 선조의 묘소를 참배한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 강의를 하면서 "이런 좋은 일을 다시는 못하겠구나, 너희들은 모두 부지런히 힘쓰기 바라노라" 하고 당부한다.

이어 손처눌은 자기 자신에게 남기는 조사를 썼다. '목숨이 다해가지만 내 어찌 한탄하랴(命之衰矣吾何恨) 풀이 썩듯 인생도 한 번 지나가는 것인데(腐草人生一過音)'로 시작하는 자만(自輓)에서 그는 먼저 '바람 따라 노래하고 달을 즐기며 한때를 보냈고(吟風弄月當年事) 살아 순리 죽어 편안이 오늘의 바람이라네(生順歸寧此日忱)' 하고 토로했다. 또 그는 '저승에서 스승과 벗들과 그윽한 마음 합하리라(重泉師友契幽襟)' 하는 마지막 소망도 밝혔다.  

자만을 남기고 보름이 지난 그 달 15일, 손처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하고는 방을 쓸고 다시 자리와 이불을 반듯하게 편 뒤 거기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400여 선비들의 통곡과 200여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을 뒤로 한 채 그는 황금동 선영(先塋) 아래에 유택으로 돌아갔다.

"살아 순리, 죽어 편안이 나의 바람이라네"

청호서원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는 비운을 겪는다. 선비들은 1930년 서원을 다시 세운다. 이후(李厚)는 청호서원 기문(記文)에서 '우리 마을의 선비들이 진심으로 분발하여 강학하고 문물 회복을 도모하면, 하늘의 운수가 우리 유학을 돌아보며 도울 것이니 어찌 옛날의 성대함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또한 어찌 청호서원 한 곳만 회복하겠는가!' 하고 스스로 '감격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어렵게 재건한 서원이 1968년 화재를 당해 모두 불타버린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선비들은 그 이듬해인 1969년 사당을 짓고 강당을 중건하여 서원을 재차 일으킨다. 현재 건물들은 1972년, 2008년 등 여러 차례 고치고 가다듬은 모습이다.

 사당 외삼문의 태극 문양이 강렬하다. 1930년에 그려졌는데 일제 경찰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태극 문양이라고 한다.
사당 외삼문의 태극 문양이 강렬하다. 1930년에 그려졌는데 일제 경찰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태극 문양이라고 한다. ⓒ 정만진

청호서원 앞에는 '모당 손선생 유허비(慕堂孫先生遺墟碑)'가 서 있다. 모당은 손처눌의 호로,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영모당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비는 1844년('현지 안내판'의 해설로, 1904년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세워졌는데 조선 말기 안동 의병대장 김도화가 비문을 지었다. 1895년 고종의 왕후 민비가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의하여 김도화가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당시 안동에 머물고 있던 경상도관찰사 김석중은 도주하였는데, 의병장 이강년이 문경 농암에서 붙잡아 처형하였다. 창의 당시 김도화는 무려 71세나 되는 고령이었다.

손처눌을 모시는 사당 숭인사는 청호서원 강당의 오른쪽 산기슭에 있다. 강당과 사당 사이는 2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좁은 계곡이다. 강당 협문으로 나와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곧장 사당 외삼문 앞에 닿는다. 외삼문에는 태극 문양이 강렬하다. 서원을 재건한 1930년에 그려졌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이 발견하지 못해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태극 문양이다. 태극 문양은, 절의의 손조서, 창의의 손처눌, 류시번, 정호인이 보여준 선비다움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겨레의 정신임을 준엄하게 증언하고 있다.


#손처눌#청호서원#손조서#서사원#류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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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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