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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기자 글

지리산 품은 참으로 깊고 넓다. 지리산이 품은 마을과 옛집을 들자면 숨 가쁘다. 구례 오미마을 운조루, 상사마을 쌍산재, 곡성 군촌마을 군지촌정사, 산청 남사마을 고가들까지....이번에 곡성, 구례를 거쳐 마지막으로 급한 숨 몰아쉬며 찾은 마을은 남원 홈실마을. 옛집, 몽심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든 것이다. 지리산이 품은 또 하나의 옛집이다.

남원 수지면 홈실마을

홈실마을 정경 죽산박씨 집성촌으로 마을 깊숙이 몽심재와 죽산박씨 종가, 두어 채 기와집이 몰려있다. 모두 죽산박씨 집안이다.
▲ 홈실마을 정경 죽산박씨 집성촌으로 마을 깊숙이 몽심재와 죽산박씨 종가, 두어 채 기와집이 몰려있다. 모두 죽산박씨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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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량 사적비 죽산박씨 남원정착조, 박자량 사적비가 마을 어귀를 빛낸다.
▲ 박자량 사적비 죽산박씨 남원정착조, 박자량 사적비가 마을 어귀를 빛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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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실마을은 수지면 호곡리(好谷里)에 있다. 호곡리 본래 이름은 호음실(虎音室), 줄여서 홈실로 불린다. 홈실마을은 죽산박씨 집성촌인 안홈실(내호곡)과 안홈실 일을 도맡아 했던 밧홈실(외호곡)로 나뉜다. 모두 예전 말로 이제 두 마을간 차이는 없다. 다 같은 홈실마을이다. 

남원에 세거한 죽산박씨(竹山朴氏)는 '두문동 72현' 중의 하나인 송암 박문수에서 시작한다. 박문수는 고려가 망하자 충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은둔하고 정작 죽산박씨가 남원에 터를 잡은 건 박문수 손자 박자량 때 일이다. 박자량의 처가(妻家, 남원양씨)가 수지면 초리에 있어  여기에 눌러 살게 된 것이다. 초리는 홈실마을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져 있다.

예부터 남원을 두고 '땅이 기름져 산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들이 백리에 이른다'고 했다. 비록 처가의 연으로 남원에 온 것이지만 찾아도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죽산박씨 집안은 초리에서 300년 가까이 살다가 1700년대 초 호곡마을로 집단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죽산박씨 '홈실시대'를 연 것이다. 

홈실마을 옛집, 몽심재(夢心齋)

몽심재 사랑채 경사진 곳에 들어선 몽심재, 6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지었다. 팔각기둥과 누마루에 난간을 돌린 솜씨는 볼만하다.
▲ 몽심재 사랑채 경사진 곳에 들어선 몽심재, 6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지었다. 팔각기둥과 누마루에 난간을 돌린 솜씨는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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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 죽산박씨 '남원시대'를 연 박자량 사적비가 빛난다. 사적비 뒤로 실개천이 휘돌고 마을 깊숙이 몽심재와 죽산박씨 종가, 두어 채 기와집이 잇닿아 있다. 그 가운데 몽심재는 마을의 자랑거리다. 1700년대 후반, 박문수 16대손 박동식(1753-1830)이 지었다. 몽심재 이름은 박문수 시에서 '몽(夢)'과 '심(心)'을 따온 것이다.  

격동류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 마을을 등지고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며 잠자고
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 산에 올라보니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구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둔한 박문수는 '도연명'을 꿈꾸고 '백이(숙제)의 마음'을 가지려했다. 박동식은 몽심재를 짓고 박문수의 뜻(夢과 心)을 영원히 기리고 전하고자 했다. 어쩌면 이 꿈(夢)은 대의(大義)요, 마음(心)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실천의지인지 모른다. 후손 중에  대의를 좇아 의(義)를 행한 후손들이 많은 점은 우연이 아니다.

초곡 박계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남원 율치에서 전사하였고 몽심대 2대주인 송곡 박주현(1844-1910)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애통해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몽심재 3대주인 정와 박해창(1876-1933)은 소작인에게 선행을 베풀고 1923년, 마을 인근에 초등학교를 건립하기도 했다.

몽심재의 적선(積善)

뭐니 뭐니 해도 몽심재 근본 꿈(夢)은 가문의 영원한 번성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죽산박씨가 기본적으로 가지려 한 마음씨(心)는 '적선(積善)철학'이었다.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집안에 반드시 좋은 일이 따른다는 뜻)을 들먹이지 않아도 적선이야말로 가문이 영원히 번영하는 데 필수조건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요요정  대문채에 딸린 정자. 낮아서 누마루에 가깝다. 연당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정경이 뛰어나다. 양반전유공간인 정자를 하인들 쉼터로 내주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 요요정 대문채에 딸린 정자. 낮아서 누마루에 가깝다. 연당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정경이 뛰어나다. 양반전유공간인 정자를 하인들 쉼터로 내주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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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으로 몽심재가 가장 앞세운 것은 접객(接客)이다. 몽심재의 재력과 후한 인심은 남쪽지방에 소문이 파다하여 한양을 오가는 많은 선비들이 몽심재를 들락였다. 몽심재는 과객들에게 사랑방이었다. 여기에서 정보를 교류하고 역사와 문화, 철학을 토론하였다. 주인은 이들을 귀히 여기고 후하게 대접하여 적선지가(積善之家)의 명망을 이어갔다.

안채 서측  길게 뺀 지붕, 지붕 아래 다락방과 ‘발코니’, 벽 중간의 눈썹지붕, 기단굴뚝까지 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 안채 서측 길게 뺀 지붕, 지붕 아래 다락방과 ‘발코니’, 벽 중간의 눈썹지붕, 기단굴뚝까지 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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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물질로만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집주인의 선한 마음씨는 대외적으로 공동체의 책임, 의로 나타났고 집안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 여성에 대한 배려로 표현되었다.

먼저 주인은 문간채에 딸린 정자, 요요정(樂樂亭)을 하인들에게 쉼터로 내주었다. 신분이 낮은 사람에 대한 배려였다. 조선사회에서 양반 전유공간인 정자(亭子)를 하인들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안채 동측   다락방과 다락방을 연장한 ‘발코니’가 딸려있어 흥미롭다. 운조루 안채에도  있으나 몽심재 발코니가 바깥을 더 훤히 내다볼 수 있다.
▲ 안채 동측 다락방과 다락방을 연장한 ‘발코니’가 딸려있어 흥미롭다. 운조루 안채에도 있으나 몽심재 발코니가 바깥을 더 훤히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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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다락방 다락방에 딸린 ‘발코니’에서 보면 사랑채 지붕과 앞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슬아슬해 보이나 아주 튼튼하여 성인들도 서서볼 수 있다.
▲ 안채 다락방 다락방에 딸린 ‘발코니’에서 보면 사랑채 지붕과 앞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슬아슬해 보이나 아주 튼튼하여 성인들도 서서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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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구조에서 여종을 포함한 집안 여성에 대한 배려도 엿보인다. 부엌마루가 딸린 안채서쪽 지붕은 동쪽지붕에 비해 길게 나와 있다. 많은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집안 여성을 비와 바람, 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리고 다락방과 함께 현대식 '발코니'를 갖추었다. 생전 바깥세상 구경하기 힘든 안사람을 위한 것이다. 지붕과 다락방, '발코니'는 적선은 아니어도 여성 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다. 배려가 쌓이면 선이 되고 선이 쌓이면 적선이 된다는 생각인 게다.

몽심재 굴뚝

이런 생각을 가진 집이라면 굴뚝은 어떻게 생겼을까? 무척 궁금하였다. 숨어 살고자 하는 유학자는 되도록 불김을 적게 한다. 도연명을 꿈꾸고 백이(숙제)의 마음을 가지려 했던 선조를 모를 리 없는 몽심재 주인은 굴뚝을 크고 화려하게 할 리 없다.

사랑채 마루 밑 굴뚝 집수리할 때 굴뚝 구멍을 막았는지 구멍이 없다. 연도를 손으로 만져보면 등에 구멍이 하나 나있다. 불을 때면 잔구멍으로 연기가 숭숭나온다고 한다.
▲ 사랑채 마루 밑 굴뚝 집수리할 때 굴뚝 구멍을 막았는지 구멍이 없다. 연도를 손으로 만져보면 등에 구멍이 하나 나있다. 불을 때면 잔구멍으로 연기가 숭숭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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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서측 뒤 굴뚝 기단에 나있는 굴뚝시설, 몽심재 선조 박문수의 뜻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 사랑채 서측 뒤 굴뚝 기단에 나있는 굴뚝시설, 몽심재 선조 박문수의 뜻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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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랑채굴뚝 하나는 마루 밑에 숨겼다. 연기구멍을 막아놓아 굴뚝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연도 위에 구멍이 나있고 불을 때면 갈라진 틈으로 연기가 숭숭 나온다고 하니 굴뚝이 맞다. 사랑채 서쪽 뒤에도 연도(煙道)가 바로 굴뚝이 된 가래굴이 숨어있다. 마루 밑 굴뚝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 선조의 뜻을 깊이 새긴 굴뚝으로 보인다.

안채굴뚝은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있고 하나는 안채 뒤 처마 밑에 있다. 안채 동쪽과 처마 밑에 있는 굴뚝은 모두 직육면체고 연기구멍도 사각이다. 연도는 시멘트로 덧칠되어 만든 지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는다. 서쪽 굴뚝은 사랑채굴뚝과 마찬가지로 기단굴뚝이다. 사랑채 가래굴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안채 뒤 굴뚝 처마 밑에 수줍게 숨은 굴뚝, 그 뜻이 갸륵하다.
▲ 안채 뒤 굴뚝 처마 밑에 수줍게 숨은 굴뚝, 그 뜻이 갸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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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처마 밑 굴뚝은 예전에는 장독대 옆, 화계(花階)에 있었으나 집을 수리하면서 처마 밑으로 옮겼다고 한다. 화계에 놓인 고급스런 굴뚝을 상상해 보았지만 처마 밑에 숨어 수줍어하는 굴뚝도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밥과 뜨듯한 방의 상징인 굴뚝(연기)을 처마 밑에 숨긴 주인의 선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몽심재 바위 마당에 화강암 바위가 몽심재의 ‘존심’처럼 놓여 있다. ‘주일’, ‘존심’, ‘정와’, 글씨를 새겨 선조의 꿈(夢)을 실현하려는 실천의지(心)를 드러냈다.
▲ 몽심재 바위 마당에 화강암 바위가 몽심재의 ‘존심’처럼 놓여 있다. ‘주일’, ‘존심’, ‘정와’, 글씨를 새겨 선조의 꿈(夢)을 실현하려는 실천의지(心)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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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의 정기가 모였다는 바위덩어리에 '존심대(存心臺)'와 '주일암(主壹岩)' 글자가 아직 선명하다. '존심', '주일', 모두 선한 성품을 잃지 말고 마음에 새기라는 몽심재 실천명제들이다. 이 글자들이 희미해지지 않는 한 몽심재의 꿈과 마음, '몽심'은 건재한 셈이다. 

덧붙이는 글 | 몽심재 내력과 죽산박씨 인물, 몽심재와 풍수, 몽심재 구조에 관련된 내용은 현재 몽심재를 관리하는 류인태 선생께서 보내주신 자료를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몽심재#홈실마을#굴뚝#죽산박씨종가#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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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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