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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사랑이 깃든 바위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본 인왕산. 그 정상 밑에 넓게 펼쳐진 바위가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이 전해지는 일명 '치마바위'이다.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본 인왕산. 그 정상 밑에 넓게 펼쳐진 바위가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이 전해지는 일명 '치마바위'이다. ⓒ 유영호

수송동계곡 뒤편으로 인왕산 정상이 보이고 그 아래로 속칭 '치마바위'라고 불리는 넓은 바위가 펼쳐져 한 눈에 들어온다. 이처럼 바위 이름이 치마바위라고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 중종반정과 관련된 전설에 유래한다.

당시 반정군은 연산군을 끌어 내리고, 그 친위세력인 신수근 형제를 역적으로 처단한 뒤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을 임금(중종)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실의 복잡한 친인척관계였다. 역적으로 처단된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아내였지만, 딸은 연산군 이후 추대된 중종의 아내였다. 그러고 보면 자기 여동생과딸을 왕비로 둔 신수근은 대단한 외척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고 만 것이다.

 연산군과 중종의 가계도와 외척 신수근의 관계
연산군과 중종의 가계도와 외척 신수근의 관계 ⓒ KBS 역사저널 '그날'

이런 가족관계로 인해 진성대군의 아내인 신수근의 딸은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 신수근은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졸지에 역적의 딸이 왕비가 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정세력들은 역적의 딸을 폐위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중종 역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왕비가 된 단경왕후 신씨는 고작 7일 만에 폐비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산군과 중종의 비 모두 폐비가 되었다. 연산군의 비야 어쩔 수 없었지만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조차 궐에서 쫓아낸 중종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중종은 단경왕후를 그리워하며 그가 머물고 있던 사가를 향해 눈길을 자주 돌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단경왕후는 자신의 치마를 인왕산 바위 위에 임금이 볼 수 있도록 걸어 놓은 것이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이런 애틋한 사연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이 바위를 치마바위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사연 때문인지 맑은 날 이 바위를 바라보면 연분홍 빛을 띠어 곁에 있으면서 만날 수 없는 연인들의 슬픔이 느껴진다.

1939년대 일본청년대회 기념 각자

하지만 이런 애틋한 남녀사랑 이야기도 조선시대로 끝난다.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 땅에 더 이상 그런 낭만적인 상상을 허용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가혹했다.

1915년 일제의 식민정책 홍보를 위해 '시정오년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함으로써 궁궐전각은 파괴되기 시작하였고, 1926년 급기야 거대한 총독부건물을 세워 경복궁을덮고 말았다. 또 총독부 전면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워 우리민족의 정기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일제의 서울 파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며 이곳 인왕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대륙침략전쟁의 속전속결을 위해 모든 역량을 중국 화북전선에 집중하는 한편 조선은 후방기지로써 전시동원체제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1939년 가을 경성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치마바위 위에 이를 기념하는 글씨를 새겨놓았다(사진 참조)

 인왕산 치마바위에 새겨진 대일본청년단대회 기념 글자 흔적들
인왕산 치마바위에 새겨진 대일본청년단대회 기념 글자 흔적들 ⓒ 유영호

이곳에 새겨진 글자는 오른쪽부터 그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줄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둘째줄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황기2599년 9월 16일)
셋째줄 :朝鮮總督南次郞)(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네째줄 : 작은 글씨로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각자를 남기는 연유를 서술한 내용이 잔뜩 새겨져 있었으며, 그 말미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토키사부로(鹽原時三郞)'라고 새겨져 있다.

이 문구가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 인왕산에 새겨진 이유는 이곳이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한편 이러한 기념각자의 의도를 당시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기념문자로서 신동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상징이 되게 하며 이 글자를 생각함으로써 동아(東亞)의 오족(五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이다."(1939년 9월 7일자 매일신보)

나라를 빼앗기니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이 깃든 이 바위조차 제국주의 깃발 아래 조선청년들을 대륙침략의 총알받이로 몰아넣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된 뒤 서울시는 이곳 치마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1950년 2월 서울시에서 '민족정신 앙양과 자주정신 고취에 미치는 바 영향이 많다고 하여 82만 원을 들여 삭제 공사를 하여 정확히 알아볼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우리민족의 슬픈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치마바위#서촌기행#수성동계곡#중종반정#대일본청년단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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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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