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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기 전엔 미처 몰랐다. 스마트폰을 끼고 살며 온갖 잡다한 뉴스를 주마간산으로나마 꿰고 산다고 자부했지만,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깊이 반성하건대, 세상일에 대한 관심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속 빈 강정 같은 것이다. 그저 언론 탓으로 돌리자니 뒤통수가 따갑다.

대구로 답사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경북 구미의 대표적인 외국인투자기업인 아사히글라스에 잠시 들르게 됐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내쫒긴지 1년이 넘도록 공장 출입구 옆 도로 위에서 풍찬노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서다.

봄부터 일찌감치 달궈진 아스팔트 위 해고 노동자들과 사계절을 동고동락했을 거뭇한 천막은 그들의 지친 어깨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저희들보다 더 고생하는 이들도 많은데, 멀리서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답사단 일행을 맞이한 노동조합 지회장의 첫 인사말은 이랬다. 부러 찾아온 손님에게 건네는 겸손의 표현이었을 테지만, 천막 주변을 둘러보건대 지금 이들보다 더 억울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없을 듯했다. 적어도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 글귀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다.

솔직히 '설마' 하면서 읽었다. 도로변의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현수막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이윤에 눈 먼 기업은 그렇다 쳐도, 이를 조정하고 해결해야 할 구미시의 방조와 침묵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3만 4천여 명 구미시민들이 사태를 해결해달라는 서명운동까지 전개했는데도, 당국에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170명이나 되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휴대폰 문자로 해고 통보를 했다는 것에는 화가 치밀었을지언정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시대에 '문자 해고' 뉴스가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탓이다.

몰상식하고 비정상적인 일도 자주 반복되다 보니 현실이라는 외피를 쓴 채 시나브로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그보다는 지난 3월 25일, 이미 원청인 아사히글라스의 부당노동행위였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이 내려졌는데도 버젓이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더 놀랍다.

비열하게 행정소송을 제기하며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는데, '시간은 늘 강자 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생활고에 허덕이는 해고 노동자들에겐 하루가 1년 같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곳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무려 9년을 일한 숙련공이라 해도 신입 직원과 똑같이 최저 시급만 받고 있다는 점도 적이 놀라웠다. 급여의 변화가 없다는 건, 곧 승급도 승진도 없다는 뜻일 테니, 그들에게 과연 직장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싶다.

순간 스마트폰을 꺼내 얼추 마흔이 다 됐을 그 해고 노동자의 작년 월급을 대충 계산해보았다. 한 달에 고작 130여 만 원.

"저희들만 겪는 문제는 아니에요. 사내 하청 노동자들 중에 연봉으로 쳐서 2천 만 원 넘게 버는 경우는 전국에 거의 없을 걸요. 노동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최저' 시급이지만, 정부에서는 '권장' 시급이고, 기업 입장에서는 '최고' 시급이죠. 그마저 부담이 된다며 기업은 마구잡이로 해고를 일삼고, 정부는 눈을 감고 있으니,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임에 틀림없죠."

'법 위에 자본'이라더니, 명색이 국가 기구인 중앙노동위원회는 그들의 판정을 비웃는 아사히글라스 자본 앞에서 초라하기만 하다. 지역의 대표적인 외자유치 사례라며 대대적으로 자랑하던 구미시 역시 그 뒤로 숨기 바쁘다.

자본의 위력 앞에 국가 기구도, 지자체도, 법마저도 그들 앞에 죄다 무릎을 꿇은 형국이다. 외투기업의 기고만장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들의 위세를 보여주는 건 그뿐 아니다. '외투기업'에 수년 간 지방세와 관세 등 각종 세금의 면제와 감면 혜택을 주는 것이야 그렇다 치자. 구미시는 무려 12만 평의 토지를 50년 동안 무상으로 임대하는 엄청난 특혜를 제공했다.

12만 평이면 서울 여의도 면적의 1/7에 해당하는 넓은 땅이다. 더욱이 반세기 동안 공짜라니, 이건 특혜라기보다는 차라리 굴욕이라 해야 옳다.

외자 유치가 절대선이 아닐진대, 대체 구미시는 무슨 생각으로 50년 무상 임대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을까. 선뜻 50년이라는 기간이 감이 안 온다면, 이렇게 셈해보면 어떨까.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청나라로부터 홍콩을 할양 받아 중국에 다시 반환할 때까지의 기간이 150여 년이니, 그의 1/3에 해당하는 장구한 시간이다. 가히 '역사적인' 사건에 견줄 만하다.

강산이 다섯 번도 더 변할 그 오랜 시간 동안 12만 평의 땅은 일본 기업의 '영토'가 됐다. 아무리 기업이라 해도 국적은 있을 테니, 거칠게 말해서, 반세기 동안 우리가 일본에게 할양한 조차지인 셈이다.

더욱이 아사히글라스는 일제강점기 악랄한 전쟁범죄기업이라는 사실까지 드러났으니, 외자 유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경상북도 투자 유치 담당자는 "국민 정서를 이유로 지역 경제 발전에 발목을 잡을 순 없다"며 시민들에게 "경제 발전을 위해 이성적으로 판단해 달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피해 당사국의 국민으로서 전쟁범죄기업에 역사적 책임을 묻는 정당한 요구가 순식간에 몰이성적인 행위로 되레 손가락질 받게 된 셈이다. 얼마 전 10억 엔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과 통한의 역사를 '퉁 친' 일본과 우리 정부의 모습이 정확히 겹친다.

그러한 특혜를 제공했다면 반대급부로 구미시가 아사히글라스로부터 약속받은 건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홍보 사진을 보면, 전가의 보도처럼 고용 창출과 지역 경제 발전을 약속하며 경상북도 지사와 구미시장이 총출동하여 아사히글라스와 각서를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이번과 같은 대량 해고 사태는 경상북도와 구미시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아사히글라스는 연간 1조원이 넘는 매출액을 달성하는 거대 기업이다. 하긴 이런 '역대급' 특혜를 받고도 그 정도 매출과 수익을 내지 못한다면 그게 외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수천억을 넘어 1조 운운하는 기업이 최저 시급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매몰차게 내쫓고는 '법대로'를 외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조악한 통계지만, 한 달에 130만 원으로 계산하면 해고된 170명 연봉을 모두 합쳐봐야 26억 원 남짓이다. 매출 1조 기업이 고작 임금 26억여 원을 두고 여느 곳에서처럼 회사를 살리기 위한 비용 절감 대책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할 거다.

170명의 노동자들을 한낱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기업과 이를 나 몰라라 하는 경상북도와 구미시가 과연 고용 창출과 지역 경제 발전을 운운할 자격이 있는가.

얼기설기 하늘을 가린 해고 노동자들의 천막 뒤편 언덕 위엔 검정 옷에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줄곧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허리춤에 찬 무전기로 보아 아사히글라스가 고용한 '용역 알바'다.

그도 더웠던지 땡볕을 피하려고 큼지막한 우산을 들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2시간 가까이를 교대도 없이 근무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해주나 싶지만, 주말인데 그도 참 안 돼 보였다.

기업은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내쫓고는 그 자리에 '용역 알바'라는 신규 고용을 창출해냈다. 모르긴 해도 그들 역시 최저 시급 인생일 것이다. 똑같은 처지의 비정규직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감시받으면서 살아가야하는 풍경이 애처롭다. "그나마 서로 드잡이하거나 욕지거리가 오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한 해고 노동자의 말이 더욱 슬프다.

돌아오는 길, 해고 노동자들이 마치 노잣돈처럼 팸플릿 몇 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부디 잊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팸플릿에 빼곡하게 적힌 글귀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게 있다.

'비정규직 내몰아서 구미 경제가 나아집니까?' 그렇게 해야 나아지는 경제라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경제일까. 무릇 '경제(經濟)'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비정규직 노조#아사히글라스#경북 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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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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