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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굴비의 본향인 전남 영광이다. 해안도로로 유명한 고향 마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굴비 내음이 가득한 법성포가 나온다. 고향 친구들 가운데는 적잖은 이들이 굴비와 관련된 일을 하고 살아간다.

나도 명절에 선물할 일이 있으면 가능하면 굴비를 보내곤 했다. 물론 기십만 원짜리 백화점 굴비가 아닌 법성포 전문점에서 5만 원짜리였다. 이것 한 두름(10마리나 20마리)이면 집안이 한 달여 동안 반찬 걱정할 필요 없다. 보내고 나서 나는 기분 좋게 한마디를 던진다.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내가 고향서 사 보내면 그것이야말로 영광굴비다"라고.

그 굴비가 때아닌 구설에 오르고 있다. 보수 언론들이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굴비 판매가 줄어들어 영광 경제가 바닥을 칠 것 같다'는 우려를 전한다. 사람들은 마치 굴비가 고급 뇌물이 되어 기자나 공무원에게 상납되는 것처럼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으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사람이 있다. 바로 굴비(屈非)라는 말을 만든 고려시대 인물 이자겸이다.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는 이자겸의 자존이자 영광 굴비의 자존이다.

고려 중기 막강한 외척가문 출신인 이자겸(李資謙, ?~1126)은 16대 예종(睿宗, 1079~1122)에게 딸을 시집보낸 후 고려 왕의 장인이 되었다. 그 후 둘 사이의 소생인 17대 인종(仁宗, 1109~1146)을 보위에 올리고, 외손주 인종과 이자겸의 셋째와 넷째 딸과 연이어 혼례를 치르게 했다. 이모와 조카의 묘한 족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그는 왕이 되려 한다는 도참설로 인해 결국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한다.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비록 이로 인해 왕들의 진상품에서 빠지지 않았지만 굴비는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굴비가 이 시대에 뇌물의 일부로 인식되는 것에 자존심 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굴비는 단순히 한 공물이 아니라 영광 지역의 다양한 문물이 결합한 산물이다.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 담은 굴비가 뇌물?

필자는 지금도 상에 올라오는 굴비를 맛보면 영광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온 것인지를 구분한다. 일단 잘 요리된 영광 굴비는 간이 잘 되어 있고,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간이 입에 맞는 것은 염장할 때 법성포에서 멀지 않은 백수나 염산의 천연소금을 쓰기 때문이다.

영광은 지금도 태양초 고추가 나오는 몇 안 되는 국내 특산지다. 그만큼 일조량이 풍부해 영광 바닷가에서 생산하는 소금은 최고로 친다. 특히 염산면은 오죽하면 소금의 산이라는 뜻의 염산면(鹽山面)을 지명으로 하고 있다. 염산이나 백수에서 가져온 소금으로 적당히 농도를 맞춘 데서 간을 해야만 영광굴비의 기본이 완성된다.

물론 이전에는 굴비의 재료가 되는 조기의 원산지도 중요했다. 영광군 앞은 일곱 개의 섬으로 된 산이 있어 '칠산 앞바다'라 불렸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다. 해마다 조기철이 되면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잡힌 알이 꽉 찬 조기는 최고의 굴비가 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 큰 배들이 앞다투어 조기 잡기에 열을 올렸다. 결국 조기들은 알을 배어 칠산에 오는 것은 고사하고,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한국과 중국 배들에게 잡혔다. 결국 영광의 굴비업자들은 스스로 잡는 것을 포기하고, 수산시장을 돌면서 좋은 조기를 사들여 들여오는 게 일반적인 굴비들의 상황이 됐다.

그래서 요즘은 칠산바다에서 잡히지 않았다고 영광 굴비가 아니라고 힐난할 상황이 아니다. 대신에 영광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하면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다.

법성포는 과거 한국과 중국을 잇는 큰 항구 중 하나였다. 물건도 물건이었지만 문화도 중요했는데, 법성포는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첫 입구기도 했다. 법성포 굴비 거리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백제 불교 도래지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곳은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이다.

배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은 바람의 종착지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법성포로 불어오는 해풍은 굴비를 말리기에 가장 적합한 바람이다. 법성포구 아래에는 말 그대로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는 백수(白岫)가 있고, 북쪽에는 금정산과 봉대산의 줄기가 있다. 서해를 헤매던 바람들이 법성포구 깊은 구비 안으로 들어와서 한곳에 모인 곳에 굴비를 세운 장대들이 있다.

이곳에서 천 년을 지켜온 굴비 말린 장대들은 영광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부패 방지를 위해 진행되는 법안을 굴비가 막아서는 것 같은 형국은 영광 사람들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법성포에는 굴비 말고도 명물이 하나 있다. 바로 '법성포 소주'다. 증류식으로 만들어진 52도의 법성포 소주는 말 그대로 인위적인 향이 들어가지 않은 정통 증류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밀주 단속으로 일반에서 만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서서히 그 이름을 부여받고 있는 전통 술이다.

굴비를 모욕하는 행태를 보니, 독한 법성포 소주에 굴비 대가리나 씹고 싶은 마음이다.


태그:#굴비, #영광, #김영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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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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