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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풍경이 더 어울리는 시장, 다시 살아나길...

1937년 일제 강점기 때 생겨나 수원과 안산, 시흥을 지나 인천을 오가며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을 담았던 수인선 열차. 한국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협궤철도였다. 수인선의 과거 사진을 보니 철길 사이 궤간이 좁은(762mm) 열차에 걸맞게 기차 모양이 작고 앙증맞았다. 보통 철도의 궤간 표준이 1.435m였으니 수인선 기차를 '꼬마열차'라 불렀나보다. 지난 1973년 7월 폐선되면서 열차 운행이 중단됐던 수인선 인천 구간이 43년 만인 올해 부활했다. 협궤열차는 이제 쾌적한 전철로 변신해 다시 달리는 중이다.

이를 기념해 인천관광공사가 기획해 알리고 있는 '수인선 인천 타임슬립여행'이 흥미롭다. 개통되는 구간인 인천역, 신포역, 숭의역, 인하대역 등 4개 역을 중심으로, 1973년 이전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인천의 근대 역사와 원도심(혹은 구도심)의 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인천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지난 15일, 숭의역 부근에 있는 숭의평화시장과 수인곡물시장으로 장터여행을 떠났다. 두 곳 다 사진으로 담으면 흑백이 더 어울리는 오래된 옛 시장이다. 정겨우면서도 애잔한 마음이 함께 한 시간여행을 했다.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시장, 숭의평화시장

ㅁ자 모양의 성채안에 광장이 있는 이채로운 숭의평화시장.
 ㅁ자 모양의 성채안에 광장이 있는 이채로운 숭의평화시장.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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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매립지에 신도시가 생기면서 활기를 잃어버린 숭의평화시장
 인천 매립지에 신도시가 생기면서 활기를 잃어버린 숭의평화시장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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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영업을 시작한 숭의평화시장(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은 1960년대 산업화 단계에서 인구가 증가하면서 숭의 자유시장, 숭의 깡시장과 함께 많은 시민들이 이용한 재래시장이었다. 1980년대 숭의평화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활기 있는 농수산물 전문 시장이었다고. 그러다 1990년대 들어 연수구·남동구·송도 등에 신도시가 조성돼 경제 활동 중심지가 이동하면서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현재는 방앗간, 생선가게 등 몇 개 안되는 점포만이 쓸쓸히 남아 있었다. 도로와 나란히 맞닿아있는 길가의 점포를 제외하고 시장 내부는 거의 영업을 하지 않는다. 텅 빈 시장통 안은 우두커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떨어져 사는 자식들을 언제나 기다리는 늙은 부모의 마음이 떠올라 서글픈 마음이 일었다.

다행히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인천시 남구청에서 문화창작공간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어 재래시장이 아닌 문화장터로 변모 중이었다. 2013년 인천시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서 '숭의평화시장 창작공간 조성 및 운영사업'이 선정되면서부터다. 지난 2015년 8월 숭의평화시장 창작공간 개소식을 거행했다. 이후 주민들과 함께 숭의평화시장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 청년 기업 유치, 전시회, 교육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 중이다.

다양한 생활 도자기를 굽고 정규적인 도자기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도예공방, 수많은 꽃으로 차를 만들고 주민들 대상으로 교육도 하는 '꽃차 마실', 갤러리와 작은 영화관을 겸한 카페, 누룩을 발효시키며 가양주를 연구하고 제조하는 '술 빚는 사람들' (가양주(家釀酒)란 집에서 담근 술을 말한다) 등등 문화단체와 작가, 예술가들이 입주중이다.

다시 불씨를 살려야 할 곳, 원도심

시장안에 도예공방으로 입주한 도자기 굽는 작가.
 시장안에 도예공방으로 입주한 도자기 굽는 작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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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차를 연구하고 함께 만드는 '꽃차 마실'
 꽃차를 연구하고 함께 만드는 '꽃차 마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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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온 이주민들의 모임방도 있었다. 시장 한가운데 있는 광장도 꾸몄다. 특색 있는 문화광장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시장 상인과 주민이 어우러져 광장 외벽을 도색, 예전과 다른 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광장에서 플리마켓(혹은 벼룩시장)도 여는 등 지역공동체 문화 만들기에 노력 중이다.

시장의 생김새도 눈길을 끌었다.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시장이라는 별칭이 붙을만 했다. 한 줄로 길게 이어진 시장통이 있는 일반적인 전통시장과 달리 도심 속 성채처럼 시장건물들이 'ㅁ'자 모양으로 둘러 서있고 그 안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시장통에 들어가게 된다. 노점상들이 장사를 했던 마당과 1층에 가게들이 들어서 있고 2층에서 3층까지는 주거지로 햇볕이 따사로이 비추는 옥상도 있다.

1층의 가게들은 대부분 비었지만 주거층은 아직도 시민들이 살고 있었다. 요즘 보기 드문 형태와 구조를 가진 공간을 가진 시장이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시장건물과 마당이 한 눈에 보였다. 재밌게도 전체적인 모양새가 삼각형이다. 우연히 마주친 어느 낯선 여행지 풍경을 만난 것 같아 미소가 새어 나왔다. 시장의 전성기에 시원하게 트인 광장을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는 가게들이 얼마나 활기차게 북적였을지 상상이 갔다.

빈 공간, 삭아가던 공간들이 새로운 기운을 얻고 있다.
 빈 공간, 삭아가던 공간들이 새로운 기운을 얻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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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부터 인천에선 시장·마을마다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는 프로젝트가 한창이라고 한다. 비어 있는 장소들을 활용하기 위한 시도다. 이런 노력엔 나름의 의미는 있지만 결국엔 시민들이 거처하는 동네가 돼야 한다. 사람들이 떠나고 쇠락해진 구도심 지역을 작가·예술가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방법이 아닐 듯하다.

그럼에도 구도심이라면 한때 지역민들의 발길이 잦았지만 이젠 낡은 곳, 재개발돼야 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지켜야 할 곳' '다시 온기를 불어 넣어야할 곳'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져 다행이다. 방치되고 삭아가는 공간들이 새로운 기운을 얻어 또 다른 삶과 추억과 이야기가 담기길 바란다.

수인선 협궤열차와 운명을 같이한 수인곡물시장

수인곡물시장 들머리에 남아있는 수인선 철길.
 수인곡물시장 들머리에 남아있는 수인선 철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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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번성했던 6,70년대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수인곡물시장.
 시장이 번성했던 6,70년대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수인곡물시장.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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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인곡물시장(인천시 중구 신흥동 3가)은 전국 유일의 곡물시장으로 수인선 협궤열차와 운명을 같이한 시장이다. 곡물시장 이름 앞의 '수인'은 지금은 사라진 수인선 열차의 종착역이었던 수인역(水仁驛)을 뜻한다(수인역은 1955년 남인천역으로 역명이 바뀐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전국의 다양한 장터에 종종 들러 보았지만 이렇게 곡물만 취급하는 시장은 처음 보았다. 가게들이 사이좋게 다닥다닥 붙어 서서 100여 m에 이르는 길 다란 곡물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건너편에 높다란 아파트가 서있지만 수인곡물시장통은 시장이 번성했던 1960~1970년대 풍경에서 멈춰 있었다. 놀랍게도 시장이 생길 당시 거의 그대로인 색 바랜 목조건물들과 낡은 곡물기계, 추를 쓰는 저울이 보여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오래되고 노후한 시장은 흔히 시나 구에서 지원해 개선해주곤 하지만 이곳만은 그러지 못한 이유와 사연을 얼마 후 상인 할아버지에게서 듣게 됐다.

시장통 들머리에 웬 철길이 남아있어 절로 시선을 끌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 말하듯 애처롭게 이어진 이 길은 수인선 협궤열차의 종착역이었던 '수인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이라고. 수인역터는 현재 화물트럭의 주차장이 됐다. 세월이 흘러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렇게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조금 기다리면 수인선 열차가 지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함께 한 수인곡물시장의 역사를 생생히 들려준 상인 할아버지.
 평생을 함께 한 수인곡물시장의 역사를 생생히 들려준 상인 할아버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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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길을 오가던 협궤열차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혹은 관광열차 역할을 하며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1948년 수인선 기차가 서는 종착역(수인역)이 생기자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고 수인곡물시장 같은 재래시장이 들어섰다. 역 주변에 좌판을 벌여놓고 콩·좁쌀·수수·들깨·참깨 등 곡물과 수산물을 팔기 시작하면서 수인곡물시장의 역사는 시작됐다.  

뭇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곡물을 가장 싼 가격에 판매하는 곳으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제주도·울릉도에서도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있었다는 만수 기름집 할머니의 얘기는 허언이 아닌 듯했다. 특히 쌀·잡곡 등이 많이 들어와 1970년대에는 인천 최대의 미곡시장으로 유명세를 탔다. 1995년 수인선 협궤열차가 끊기고 사람들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화려했던 명성은 점차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여든 곳이 넘던 점포는 이제 30여 곳만이 시장을 지키고 있었다.

수인곡물시장이 전통시장육성지원을 못 받는 이유 

힘차게 작동하는게 신기한 낡고 오래된 곡물기계들.
 힘차게 작동하는게 신기한 낡고 오래된 곡물기계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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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개업한 어느 가게, 아직도 당시의 목조건물 그대로였다.
 1943년 개업한 어느 가게, 아직도 당시의 목조건물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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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시장 점포마다 방앗간에서 쓸법한 곡물기계들을 갖추고 있는 것도 특이했다. 오래된 곡물시장의 역사에 어울리는 낡고 금속빛이 바랜 기계들이었지만 신기하게 힘찬 소리를 내며 잘 돌아갔다.

어느 곡물가게 아주머니가 자랑스레 보여준 사업자등록증엔 개업일이 놀랍게도 1943년이었다. 남을 속일 줄 모르고 고지식해 여태 돈을 못 벌었다는 묵묵한 아저씨(아주머니의  아버지)와 가게가 달리 보여 한참을 가게에 눌러 앉아 동네와 시장 얘기, 수인선 기차 이야기, 숭의역 앞에 아직도 있는 속칭 '옐로우하우스'(성매매 구역)가 생겨난 이유 등을 흥미롭게 들었다.

들깨·참깨 등 참기름 재료가 풍부해서인지 이곳엔 기름집이 유난히 많았다. 덕분에 곡물시장통엔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냄새로 가득했다. 고소한 향내를 풍기는 참기름, 들기름은 물론 홍화씨기름, 살구씨기름, 호두기름 등 귀한 기름도 짤 수 있다. 곡물과 기름 외에 매콤한 맛의 고춧가루를 파는 가게들도 남아 있다.

곡물가게에선 쌀은 물론, 보리에서부터 오곡밥을 만들 때 필요한 수수, 조, 팥 등 '곡물'이라는 통칭으로 불리는 40~50여 가지가 판매되고 있다. 주로 도매를 하지만 찾아오는 일반 시민들도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그래선지 인근에 사는 동네 주민들이자 단골손님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왔다.

다양한 곡물들을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다양한 곡물들을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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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만 빼고 울릉도, 제주도 전국에서 다 왔지."(만수 기름집 할머니)
"어디에다 내놔도 보기 드문 시장이지만,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지 뭐…."(연백상회 상인 아저씨)

지금은 시장을 떠난 사람들이 많지만 대부분 돈을 벌어서 나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요즘 많은 지자체에서 전통재래시장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있다. 시민들의 존립을 좌우하는 일자리 창출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체 유통업 종사자의 65%에 달한다. 그런 이유로 여러 지자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통시장을 지원하고 있지만, 수인곡물시장의 관할 지자체인 인천시 중구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다. 지난 2005년 제정된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전통시장 등록에 필요한 점포 수(50곳)를 충족시키지 못한 수인곡물시장은 전통시장 등록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곡물시장이 있는 자리가 한국철도공사 소유다 보니 지자체의 전통시장 육성 정책의 수혜도 받을 수 없어 옛 명성을 되찾기 힘든 상황이라니 안타깝기만 했다. 상인들은 관(官)이 나서서 수인곡물시장을 숭의평화시장이나 신포시장처럼 개발해 주길 원하고 있다. 전국적으로도 유일한 곡물시장은 잘만 가꾸면 인천의 대표적 풍물거리가 될 수도 있는 만큼 시 혹은 구차원의 지원 사업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태그:#숭의평화시장, #수인곡물시장, #수인선, #전통시장육성지원, #수인선 인천 타임슬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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