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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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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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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이 제게 심어준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밀어붙입니다. 툭툭 맞는 사람은 뒤로 한 발짝씩, 한 발짝씩 밀려나게 되지요.

'툭툭'은 계속되고, 사람은 계속 밀려나고. 어디까지 밀려나게 될지, 언제까지 밀려나야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밀려나던 사람이 바라던 건 그저 어제와 같은 삶이 계속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꾸만 뒤로 밀려나곤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텨보고 싶습니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그를 몰아붙일 리 없다는 믿음이 그에겐 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세상은 그의 믿음을 배신하려 합니다.  

동물이 돼야 했던 사람들

이 책 <굿바이 동물원>은 무한 경쟁 사회에서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삶의 마지막 바닥까지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합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그곳에서마저도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공처럼 주저앉을 곳이 필요했던 사람들이 이미 화장실에서 울고 있었거든요. 주인공은 제대로 울어 보지도 못하고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막막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시켜주는 곳이 없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겠기에 부업을 알아봤습니다. 마늘을 까고 인형 눈알을 붙이며 겨우 생활을 이어나갑니다. 그런 주인공 앞에 '세렝게티 동물원'이 나타납니다.

동물원이라니. 무슨 이유인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은 것 같아 기쁩니다. 하지만 기뻐하던 것도 잠시. 이제 소설은 본격적으로 '웃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동물원에서 맡게 된 역할이 '고릴라'래요. 네, 진짜 고릴라요. 우리가 동물원에 가면 볼 수 있는 그 고릴라.

"내일부터는 고릴라다. 이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하자. 만감이 교차하기도 한다. 출근하는 건 좋다.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사는 게 뭔지…, 묵직한 슬픔도 있다. 결국 밑바닥까지 밀려난 걸까? 가슴에 탕탕 대못이 박힌다." - 본문 중에서

세렝게티 동물원의 동물들은 실은 다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털이 북실한 탈을 쓰고 동물 흉내를 내는 거지요. 그러면 구경 온 사람들이 '와, 동물이다!' 하며 환호하는 상황이 이곳에서는 매일 벌어집니다.

가짜 동물들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대장 고릴라의 말로는 "관람객들의 머릿속에 있는 고릴라"를 표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합니다. 고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바나나랑 가슴을 탕탕 치는 행동이지요. 그래서 동물원의 고릴라들은 매일 바나나를 수도 없이 먹고, 가슴도 멋지게 탕탕 쳐줘야 합니다. 가끔은 관람객들과 눈도 마주치며 팬서비스도 해줘야 하고요.

무엇보다 고릴라로써 관람객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는 영화 속 킹콩의 모습을 재연해야 합니다. 1993년, 미국에서 제작된 <킹콩>이란 영화는 우리에게 킹콩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이미지를 심어줬지요.

영화 속 킹콩처럼 동물원 고릴라들도 안전장치라곤 없는 12m 철제 기둥을 마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오르듯 기어 올라갑니다. 꼭대기에선 가슴을 탕탕 치며 포효도 합니다. 그럼 관람객들은 "멋져, 굉장해" 하며 탄성을 내지릅니다. 고릴라들은 이 위험천만한 일을 할 때마다 5000원을 법니다. 기본급은 없고 위험수당이 월급의 전부라고 해요.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게 쉽지 않아 동물이 돼야 했던 사람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주인공은 자괴감에 시달립니다.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닌 것 같고, 이건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동물이 낫다, 인간보다

세렝게티 동물원 속 동물들은... 모두 사람이었다.
 세렝게티 동물원 속 동물들은... 모두 사람이었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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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젠가부터 고릴라로 사는 게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람처럼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것보다, 괜한 욕심만 버리면 고릴라로 살아가는 게 마음은 더 편한 것 같거든요.

"그럴지도 모른다. 사람이면 어떻고 고릴라면 어떤가. 사람이라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다. 고릴라가 불행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권? 존엄성?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게 없다. 다 옛말이다." - 본문 중에서

책의 후반부에선 약간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실제론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왠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일이기도 합니다.

동물원 동물들이 한 마리(한 명), 두 마리(두 명) 사라집니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벌어지는 일입니다. 전화기 너머의 그 동물(사람)은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여긴, 행복해." 이 한마디 말에 동물들은 목소리가 있는 곳을 향해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지요. 여기서 '모든 것'이란 '인간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동물의 탈을 쓴 동물들은 저 넓은 초원에서 인간이길 포기하고 동물이 돼 살아가기로 합니다. 진짜 동물들과 함께, 동물인 척하며, 행복하고 또 행복하게. 사람들과 있어도 사람답게 살지 못했으니, 동물들과 함께 동물처럼 사는 것도 그리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웃기고 재미있는 가운데 강한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황당한 설정이 황당하게 여겨지지 않는 건, 바로 이 페이소스가 그 설정 한 가운데를 든든히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이었구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사람답게 사는 게 힘들어지는 순간. 이 소설은 바로 이 순간을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론 밀리고 밀려 마지막까지 밀려난 곳에서 소설 속 사람들처럼 처절하게 12m 철제 기둥을 올라가야 하기도 하니까요.

12미터 철제 기둥 위에서 소설 속 사람들은 두 가지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에 순응하며 그대로 살거나, 아니면 더 행복한 장소를 찾아 떠나거나.

이 두 가지 길 외의 또 다른 길도 우리 앞에 놓여 있을 겁니다. 순응도 하지 않고, 떠나지도 않는 길. 힘없는 개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밀어붙이는 사람들의 팔뚝을 제지하는 길. 그래서 그 누구도 안전장치 없는 12m 철제 기둥을 올라가지 않게 하는 길.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드는 길. 이런 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고 또 그리는 일. 그래서 결국은 현실화 시키는 일. 정말 '굿바이, 동물원'할 수 있는 길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굿바이 동물원>(강태식/한겨레출판/2012년 07월 13일/1만2천원) /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한겨레출판(2012)


태그:#강태식, #소설,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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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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