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극장에서 영화를 보든, 운동회 때 매스게임을 하든, 행사 때마다 애국가 다음으로 많이 들었던 노래가 있다. 초등학교로 개명되기 전인 국민학교 시절 '385자' 국민교육헌장은 강제여서 어쩔 수 없이 외웠다지만, 이 노랫말은 자주 듣다보니 저절로 외워졌다. 이제와 생각하는 거지만, 이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그때 정말 우리나라가 그런 곳이라 여겼던 걸까. 대강 짐작했을 테지만, '아, 대한민국'이란 노래다.

첫 구절부터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며 자랑했고, '우리의 마음속의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칭송했다. 후렴구에서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며, '대한민국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는 벅찬 다짐으로 끝을 맺었다. 뮤직비디오가 드물었던 당시, 환희에 찬 표정으로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장면이 겹칠 때면 뭉클하기까지 했다. 돌이켜 보니, 서슬 퍼런 '5공' 시절이었다.

생뚱맞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건전 가요'를 떠올린 건, 교육부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아래 전교조)이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제작한 '기억과 진실을 향한 416 교과서(아래 <416 교과서>)'에 대해 사용 금지 조처를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이유인즉슨, "학생들의 건전한 국가관 형성을 저해할 우려가 높다"는 거다. '건전한'이라는 '5공스러운' 수식어가 촌스럽기도 하지만, 바로 뒤에 '국가관'이라는 단어가 연결되니 파시즘의 냄새가 잔뜩 묻어난다.

'건전한 국가관'을 교육부가 판별한다고요?

전교조가 발간한 <416 교과서>
 전교조가 발간한 <416 교과서>
ⓒ 전교조

관련사진보기


부끄러이 고백하자면, 어릴 적 '건전한 국가관'을 친구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뽐냈을 때가 있었다. 그땐 '건전한'이라는 수식어가 종종 '투철한'이라는 단어와 혼용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명언(?)을 남기고 산화한 이승복 소년의 반공방첩 정신을 계승하자는 웅변대회에서다. 지금이야 이승복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아이가 드물지만, 그땐 그의 이름을 딴 상만 해도 여럿이었다.

'건전'이라는 단어가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얼마나 조롱당하고 더럽혀질 수 있는지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단어엔 죄가 없지만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아이들 앞에서도 웬만하면 '건전'이라는 표현을 강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가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금언도, 부러 '올바른'이라는 우리말로 바꿔 쓸 정도다.

서두가 길었다. 교육부는 '건전한 국가관'을 판별할 권능이 있는지 자문해보라 권하고 싶다.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권력자가 의지를 가지고 지시를 내리면 그것이 곧 국가의 명령"이라는 파시즘을 옹호할 게 아니라면, 함부로 국가관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416 교과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고 기억을 이어나가려는 교사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만들어낸 작은 성과물이다. 그들은 자비를 털고 퇴근 후와 주말 시간을 기꺼이 바치며 수많은 관련 자료를 모으고 대조하고 기록했다.

승진을 위해 점수를 따려는 것도 아니요, 책을 팔아 이윤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아이들 앞에서 정의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로서, 참사로 희생된 수백 명 아이들 앞의 '공범'으로서 진실을 밝히려는 행동이었을 뿐이다.

사실 416 교과서는 교사들이 나서기 전에 정부가 앞장서서 제작해 일선 학교에 배포했어야 할 책이다.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참사가 있은 지 만 2년이 지났지만, 뭐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게 없다. 여전히 유가족의 피눈물은 마르지 않았고, 사사건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정부를 믿지 못해 세월호 인양 현장이 보이는 섬에서 수개월째 풍찬노숙하며 감시하는 일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가 해야 할 몫을 애먼 교사들이 대신한 셈인데, 칭찬은 못 할망정 되레 전국 학교에 공문을 통해 사용 금지 조처를 내린 것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가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체 장사, 거지 근성' 운운하며 유가족들을 모독한 이를 비례대표 상위 순번에 배치한 여당 역시 정부와 한통속임을 드러냈다. 결국 흐르는 세월을 무기삼아 잊히기만을 바라는 야만적인 정부와 여당에 맞서려면, 남은 건 오로지 '기억 투쟁'뿐이다. 행동하기 위해서라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잊으라'는 정부

416세월호참사 특조위 제2차 청문회가 열리는 28일 오전 서울시청사 다목적홀에서 희생자 유가족들이 참관 도중 사고영상을 보고 오열하고 있다.
 416세월호참사 특조위 제2차 청문회가 열리는 28일 오전 서울시청사 다목적홀에서 희생자 유가족들이 참관 도중 사고영상을 보고 오열하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416 교과서를 반국가적, 반교육적이라고 매도하며 발끈하는 정부를 보노라니, 한사코 위안부 문제를 회피하며 교과서에서 누락시키려는 일본 아베 정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한일 양국 정부가 12.28 합의안대로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하려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게 있다.

바로 후세에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과서에 진실을 기록하고 가르친다는 조항이 삽입되어야 한다. 총리의 공식 사과와 천문학적 배상금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영화 <귀향>의 개봉에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호응한 것도, 평화의 소녀상이 전국 주요 도시는 물론 전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되는 것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을 굳이 되뇌지 않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고작 5년짜리 한시적인 정부가 '최종적'으로 매듭지을 수 없는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역사는 늘 현대사'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 투쟁의 성과다.

정부가 416 교과서를 사용하지 말라는 건, '세월호 참사를 잊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기 위해 만든 교재이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지적한 대로, 부정적 국가관 조장이 우려되는 부분이 있고, 사실이 왜곡된 내용을 찾았다면, 공개적인 토론에 부쳐도 좋을 것이다. 타당하다면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고, 보완할 수 있다. 이러한 검증 절차를 고민하기는커녕 발간되자마자 생뚱맞은 국가관을 들먹이며 낙인찍는 건 비겁한 짓이다.

더욱이 중고등학교용 교과서에 '국회 앞에서 진상규명을 호소하는 유가족을 외면하는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문구와 사진을 문제 삼는 부분에서는 어처구니 없음을 넘어 측은함마저 느끼게 된다. 오로지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근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해당 문구와 사진은 당시 언론에서 보도했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지금까지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5공 시절 모든 언론을 무릎 꿇린 '보도지침'처럼 교과서에도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싶은 것일까. 연목구어일지언정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교육부 공무원들에게 바란다. 왜 교과서에 대통령을 호의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는가를 따져 묻는 비굴함보다, 왜 대통령은 유가족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지 충언하는 당당함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소망한다.

교육부는 416교과서를 두고 '학생들에게 정부를 불신하게 하는 의도성이 있다'고 총평하듯 덧붙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우리 정부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이라는 걸,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헬조선'이라는 참담한 자조는 20~30대 청년들이 아닌 10대 아이들로부터 시작됐다. 416 교과서는 어쩌면 정부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이 대한민국에 대한 절망으로 비화하는 걸 막으려는 교사들의 눈물겨운 호소인지도 모른다.

교육부가 의도한 바는 아닐 테지만, 어제 오후 416 교과서가 발간됐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한 동료 교사와 학생들 몇몇이 대체 무슨 책이냐고 궁금해 했다. 어디서 구입하는지, 책값이 얼마인지 등을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교육부의 사용 금지 조처에 대한 기사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의 일이다. 교과서를 만든 교사들이 교육부에 감사패라도 만들어 드려야하지 않나 싶다.


태그:#4.16 교과서, #세월호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