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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만 8천 원을 위해 혼 빠지는 산길을...

우린 지금 몇 명의 캠퍼가 추천한 시에나를 향해 가고 있다. 96%의 여행자는 이탈리아 북부를 지날 때 고속도로로 엄청나게 많은 굴을 빠르게 통과하겠지만 리씨네 가족은 해변에 위치한 마을 기차역까지 가야했다.

시에나로 향하기 전 친퀘테레 등반을 시도했던 첫날 '도전 실패'와 함께 얻어 온 '19.6유로'짜리 어음 성격의 철도 승차권을 현금으로 바꾸러 가고 있다. 길은 정말 꼬부랑길이었고 폭은 많이 좁았으며 마주 오는 차들은 모퉁이에서도 중앙선 침범을 수시로 즐기는, 운전의 베테랑들이었다. 웬 오토바이들은 그렇게 추월을 많이 하는지 여러모로 혼이 쏙 빠지는 운전이다. 길이 이럴 줄 알았다면 '19.6유로'를 바꿔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을 것이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이 거짓말 같진 않다.

이탈리아 북부의 사람들은 한국으로 따지면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에 집을 짓고 길을 닦고 사는 사람들 같다. 그것도 산 정상에 가까운 곳에 길을 만들어 놓았다. 공룡능선에서 내려와 해변에 닿으니 길은 어찌나 협소한지 운전하는 것이 스트레스다.

우리나라 돈으로 2만 8000원 바꾸는데 역무원은 내 여권 정보를 거의 모두 필요로 했다. 그나마 3만 원에 가까운 돈이니 별 고민없이 바꾸러 왔지 10유로 미만의 어음을 가졌으며 이쪽 길에 대해 아는 여행자라면 별 고민 없이 그냥 고속도로를 타고 떠났을 것이다. 여하튼 이탈리아는 여행자에게 불편한 이와 같은 시스템을 통해 얻는 이익을 고스란히 불로소득으로 챙길 것이다. 분명하다.

분위기상 열차가 들어올 것이라는 방송 같다. 한 여행자가 역무원과 상담이 길다. 그 뒤에 섰던 연인은 싸우기 시작한다. 방송이 한 번 더 나올 때 여자는 더 이상 상담이라고 하긴 뭣한 민원제기를 포기하고 그냥 돈을 지불하고 표를 샀다. 사람들의 표는 다양했다.  나처럼 어음을 가진 사람, 비행기 보딩패스처럼 딱딱하고 커다란 티켓을 가진 사람 등등. 뭐가 뭔지 모르겠으나 궁금하지 않다. 그냥 그 조잡한 종류, 복잡한 방식에 짜증만 난다.

나보다 급해 보이는 사람들, 내 뒤로 3명에게 자리를 양보한 후 맨 뒤로 가서 섰다. 다행히 그들은 표를 모두 구입했고 열차가 왔다. 어음을 돈으로 바꿔 차로 돌아오자 남편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고 현은 앞으로 시작될 드라이빙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지 토했다. 막 기차에서 내려 우리 차 옆을 지나 해변으로 향하던 여행자들은 어떤 동양인 여자 아이가 차 안에서 반찬통에 얼굴을 묻고 토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시에나까지 이정표를 찍어봤더니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왔던 공룡능선 버금가는 산길을 조금만 되돌아가면 고속도로에 닿는다.

"잘 있어라. 공룡능선아!"
"여보, 우리 이 돈으로 맛난 거 사먹자!"

#. 무일푼 여행자, 피사를 가다

이미 마음은 짜증으로 기울었다.
 이미 마음은 짜증으로 기울었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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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무일푼이냐. 사실 은행 계좌엔 경비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음에도 우리가 무일푼이었던 이유는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 머문 곳이 산이었던 까닭도 있다. '산'이란 이유로 아래 세상에는 닭똥집과 물을 사러 작은 규모의 마트에만 두 차례 다녀왔을 뿐 거의 산을 떠나지 않았었다. 캠핑장 마켓의 물가는 '이탈리아는 쌀 것이다'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매우 비쌌다. 물 1.5리터가 거의 4000원 돈이었으니까. 프랑스보다도 비싸다. 저런. 몹쓸.

산이란 여러 가지 현실적인 것을 잊기에 좋은 공간이다. 그래서 우린 그동안 현금이 바닥이 난다는 사실도 잊고, 숙박비를 후불로 내기로 했다는 것도 잊은 채 지냈다. 체크아웃하기 바로 전날 "돈 있지? 우리 숙박비"라고 했고 남편이 표정으로 당혹스러움을 나타낼 때 난 상황을 짐작했다. 돈을 탈탈 털었더니 4일치 숙박비가 딱 나온다. 우리의 숙박비는 20유로, 10유로, 5유로짜리 다양한 지폐와 동전 2유로의 조합으로 딱 92유로로 맞춰졌다. 다행인데 문제는 이제부터 무일푼이다. 19.6유로를 바꾸기 전까진.

타다가, 달리다가, 돈 내다가를 반복하는 이탈리아 북부의 고속도로에서 톨게이트와 마주쳤을 때 남편은 "돈이 없잖아!"라고 말했고 나는 "19.6유로 있잖아"라고 말했다. 여행 중 현금카드는 국가별, 업종별로 종종 '사용불가' 란 판정을 받곤 했다. 그랬기에 고속도로통행료는 주로 현금을 내고 통행했는데. 무섭다. 통행료를 내고 나니 이제 돈은 절반만 남았다. 점심 때가 가까워지고 아이들은 오줌 마렵다, 쉬었다 가자, 찬 물 좀 달라고 아우성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엔 '오토그릴'이란 음식점이 주로 있었고 규모는 아담하지만 시설은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카드를 쓸 수 있는가이다.

남편 : 어, ATM 에서 돈을 뽑을 수 없네.
나 : 뭐야. 어떻게 하냐?
남편 : 들어와 봐. 뭐 먹을지 좀 봐봐.
나 : 돈도 없잖아.
남편 : 카드로 먹어야지.
나 : 카드도 안 되면 어떡해? 카드가 되는지 봐야지.
남편 : 그럼 내가 일단 작은 거 하나 사고 카드가 되는지 확인할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뜨거운 오후 식당 지붕 밑에 가서 섰다. 식당 안쪽으로 밥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동양인 모녀 1종 세트인 우리가 왜 이리 그지 같아 보이던가. 마음이 심하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처럼 과거에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나라는 절대왕정 시대에 많은 식민지를 두었고 그 후로 스페인어를 쓰는 식민지 사람들이 스페인으로 이주해 살아왔다. 그렇기에 스페인은 인종 구성면에서 다양하다. 다양하다는 것은 인종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폭이 넓을 뿐 아니라 그것이 퍽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즉 나와 같은 소수가 그나마도 위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란 뜻이다. 물론 프랑스 등을 비롯한 많은 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교육, 경제, 정치 안정들을 이유로 다양한 국가로부터의 이민이 꾸준히 있던 탓에 인종 구성이 다양하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요즘 들어 지중해를 건너오는 난민을 적극 받아들이긴 하지만. 유럽 여러 국가를 거쳐 오는 동안 이탈리아에서 유독 유색인종을 많이 보지 못했다. 특히, 오늘 이 휴게소에는 전혀 없다. 

그네들이 경제적, 문화적 꽃을 피운 시기는 르네상스가 절정이었고 그것은 너무나 오래된 일이었다. 동유럽의 구성 또한 그럴 것이라 짐작은 하지만 여하튼 이탈리아에서 난 가장 '창백한 백색 인간'들을 많이 보았다. 금전적으로 심하게 위축된 상황도 그렇지만 진정 단일민족 같아 보이는 그날 그들의 혈색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커먼스 가족'이라 일컬어지기 딱 좋은 우리 가족은 유독 눈에 띄었다. 무섭고 쫄렸던 마음. 그 백색으로 인해 우리가 제노포비아의 대상이 될 것만 같은 공포감.

남편 또한 목까지 뻗힐 힘이 없을 것이 분명함에도 가족 부양을 위해 카드 사용 가능 여부를 점검해야 했다. 안쪽에서 지친 듯 안도하는 남편의 얼굴을 본 후 난 아이들 손을 잡고 시원한 식당 안으로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내 주위로 남녀노소 현지인은 모두 창백했다. 꼭 피 빨아 먹을 때가 된 드라큘라처럼.

위축된 나는 괜히 아이에게 자세를 바르게 하라, 입가에 왜 뭐가 묻었나, 너무 지저분하다 등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며 신경은 모두 남편이 있는 계산대로 쏟고 있었다. 카드가 들어가고 흰 종이, 즉 명세서가 카드기에서 나올 때서야 난 한시름을 놨다. 해산물이 들어간 리소토와 그릴에 구운 고기가 맛있었다. 가격 또한 많이 양호했다. 우리가 수저를 들 즈음 시간은 2시였기에 백색인간들은 모두 차를 타고 갈 길을 갔다. 그때서야 밥이 술술 넘어간다.

10유로 정도의 현금과 이탈리아에선 사용불가 판정을 더 자주 받아 전혀 믿을 수 없는 현금카드, 신용 카드를 가지고 또 고속도로에서 내려왔다. 이제 손엔 정말 동전 몇 유로 밖에 없다. 피사는 의외로 시에나를 가는 길목에 있었고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당일 관광지로 유명한 시골마을의 영업 방식은 대륙, 종교, 국가를 초월해 비슷한 면이 있다. 모든 것을 파악할 필요도, 머리도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 '뒤통수 맞을 일'이 많다. 왜냐하면 여하튼 관광 종사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당일' 관광자의 지갑을 열어야 하니까.

피사에 접근하자 '피사의 탑에 가려면 이곳에 주차하시오'란 주차 표시가 있었다. 하마터면 그곳에 주차하고 뙤약볕에 한참을 걸어갈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나쳤고 그곳을  지나치자 주차장이 많았다.

우린 어느 주유소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몇몇 사업자는 개인적으로 마을 관공소에서 하나씩 배당받은 '국제적 주차 구역 표시인 P 판'을 적당한 자기 땅에 박아 놓고 주차하는 차들로부터 주차비를 받아 챙기는 형태로 운영하기도 했다. 여하튼 주차장에 3유로를 내고 피사의 탑으로 걸어갔다. 몸으로 느끼기에 정말 더운 것인지 아니면 차에서 내리기 전 남편이 "39도네"라고 말한 그 온도를 나의 뇌가 너무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탓인지 여하튼 죽을 것만 같이 짜증이 났다.

나 : 지금 돈을 뽑을까?
남편 : 에이~ 나오면서 뽑아야지.

그래서 우린 그냥 갔다. 저 멀리 끝내주게 멋진 외관을 자랑하는 피사의 사탑이 보인다. 걸어가는 동안 그늘이라곤 당일 관광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의 천막들이 베푸는, 너비 1m의 그늘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물건을 사는 사람, 딱 의자에 앉아 있는 상가 주인의 부피 때문에 무일푼 우리는 요령껏 그늘과 양지를 번갈아 드나들며 걸어야 했다. 현은 부모의 경제 사정도 모르는 듯 미지근한 물 치우고 시원한 물을 달라고 난리 짜증 법석이다.

"에잇, 부모 속도 모르는 철부지 같으니라고." 

39도의 더위. 다국적 여행자들은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39도의 더위. 다국적 여행자들은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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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은 이후 미지근한 탄산수(아바마마가 방심하여 구입한 탄산수 12병)를 흔들어 기포 빼고 먹은 뒤 미지근한 보통 물이 그토록 귀하고 맛있는 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시아 식구들을 가장 많이 본 날이다. 인도와 그 근방 식구들, 중국, 반가운 태국과 인접 국가들, 그리고 일본과 한국. 피사의 사탑이 아시아 각 나라 시험 문제에 빈도 높게 출제되어 매우 친근한 것이 분명하다.

10대, 20대는 모두 경계석에 올라가 탑을 밀어 올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동일한 그들의 포즈에 반감이 생겼는지 나는 탑을 무너뜨리는 방향에서 잡아 보겠다고 아이디어를 냈으나 사진 찍는 각도가 의외로 수월치 않다는 것과 경계석에서 찍으려면 줄까지 서야 하는 상황에서 인내심 약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착한 남편에게 짜증내고 포기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여보. 사실 당신에게 말은 안 했지만 앞서서 걷는 당신의 등판에 대고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여러 번 말했어."

그러나 내가 등판에게 말하는 사이 그 등판은 은행 ATM에 들어가 현금 뽑기를 시도하는 걸 잊고 말았다. 이로 인해 우린 그 다음 날 아침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밥상을 대하고 난 후 약 5시간 냉랭한 공기 속에서 숨을 쉬어야 했다.

그렇게 우린 땡전 한 푼 없는 '상그지'가 되어, 이탈리아를 10번 온 영국 아줌마로부터 '러블리'란 수식어를 얻은 시에나에 왔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시에나는 러블리, 베네치아는 '뵈어리 뵈어리 뷰티플'이란다. 기대해 볼까나?

기우는 가정경제는 생각하지 않고 끝가지 포즈를 잡는 리씨네 가장
 기우는 가정경제는 생각하지 않고 끝가지 포즈를 잡는 리씨네 가장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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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태그:#리씨네 여행, #유럽캠핑,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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