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도와주지 않은 올 콩농사
이른 아침,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우리 동네 반장님입니다. 손에 달력이 들려 있습니다. 조합에서 나눠주는 새해 달력을 가져오신 모양입니다. 새 달력을 보니 해가 바뀌는 것을 실감합니다. 반장님이 우리 잔디밭마당에 넓게 깔려있는 서리태 더미를 보고 말씀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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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 덮게 위에 콩더미를 넓게 펴서 도리깨질하기 위해 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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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콩 못 털었는데, 이 집도 매한가지네 그려!""날씨가 유난스럽네요! 이맘때는 콩 털어 메주를 쑤어야 하는데 말이에요.""그러게 말일세. 오늘 낼 중으로 해 반짝일 때 털어버리라구?""그럴 참이에요. 근데 검불도 많고, 몇 개 까보니까 납작콩에 쭉정이가 많아요.""콩 여물 때 워낙 가물어서 그래. 우리 것도 그렇더라구!""그나저나 터는 것은 도리깨질하면 되겠는데, 검불이 많아 일이 더디겠어요.""콩체 없어? 그거면 있으면 좀 낫지. 없으면 우리 거 가져다 써!"콩체는 콩타작할 때 콩알과 바스러진 검불을 분리하는데 쓰는 도구입니다. 밑바닥 구멍 코가 큰 어레미이지요. 콩체를 이용하면 한결 수월할 것 같습니다. 반장댁에서 콩체를 빌려왔습니다.
오늘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콩타작을 끝낼 요량입니다. 해가 중천에 뜨고, 서리가 녹으니 날이 맑습니다. 콩타작하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콩깍지를 만져보니 쉽게 털릴 것 같습니다.
혼자 하려면 한 이틀은 해야 할 성싶습니다. 해가 짧은 데다 펼쳐놓은 양이 만만찮게 많습니다. 콩 터는 데 쓸 도구를 죄다 집합시켰습니다. 도리깨, 나무막대, 어레미, 갈퀴, 고무대야까지.
장갑을 끼웠습니다. 콩대를 한 움큼씩 가운데 모아놓고 도리깨질을 합니다. 휘익 휘익 도리깨 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뉴턴의 '관성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두들겨 맞은 콩깍지가 입을 쩍쩍 벌립니다. 그 사이로 튕겨 나온 서리태가 팔짝팔짝 튀어오르면서 춤추는 도리깨질에 장단을 맞추는 듯싶습니다. 다시 뒤집어 한 번 더 패대기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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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차게 도리깨질를 하면 콩깍지가 입을 벌려 콩알이 튀어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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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깨질 하고 난 뒤, 덜 털린 것은 나무막대로 두들겨 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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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농사가 좋으면 도리깨 돌리는 소리에도 흥겨울 것입니다. 그런데, 올 같은 경우는 털리는 게 시원찮습니다. 도리깨질에 힘이 더 들어갑니다. 덜 털리는 것은 다시 한 번 낭창낭창한 회초리로 매질을 해야 합니다. 서너 시간 똑같은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겨드랑이에 땀이 배입니다. 새참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갈증과 피곤을 달래봅니다.
콩농사가 쉬운 것 같아도...옛말에 콩꼬투리에 물이 줄줄 흘러야 콩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했습니다. 콩농사는 콩꽃이 진 뒤, 한참 여물어가는 8월 하순에서 9월 말까지 적당한 비가 내려야 콩이 실하게 많이 달린다는 것입니다. 몇 년간 콩농사를 지었지만, 이제야 그 사실을 헤아립니다.
올해는 가뭄이 심해 콩이 흉작입니다. 거기다 가을에는 잦은 비로 콩타작까지 힘들게 합니다. 한참 꽃 피고 여물 때는 가물고, 거둬들일 때는 잦은 비가 내려 애를 먹습니다. 올 콩농사는 내남없이 최악입니다.
원래 콩을 베고 난 뒤 볕이 좋으면 일주일 안에 타작을 합니다. 그런데, 올가을은 11월 초순경부터 심술궂게 사나흘 걸려 비가 왔습니다. 깍지가 말라 털라치면 비가 오고, 또 며칠 기다렸다 털려면 궂은 날씨가 훼방 놓기를 반복합니다. 가뭄으로 마른 저수지를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잦은 가을비가 감질만 내는 훼방꾼입니다.
콩농사가 쉬운 것 같아도 손이 많이 가는 농사입니다. 콩 심어 어린 싹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면 날짐승이 미리 입맛을 다시는 수가 있습니다. 자랄 때, 잡초가 콩보다 먼저 자라면 잡초에 치여 잘 자라지 못합니다. 풀한테 콩이 이기도록 초기에 풀 뽑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콩이 어느 정도 자라면 두어 번 정도 순치기를 합니다. 순치기는 콩농사에서 중요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키가 너무 커 비바람에 쓰러지고, 씨알 맺히는 것이 시원찮아 수확량이 줄어듭니다. 병충해가 있어 소독도 여러 차례 하는데, 나는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서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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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태꽃입니다. 보통 9월 초순경 해가 짧아지면 보라색 예쁜 꽃을 피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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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내려서 거둔다하여 서리태.어릴 땐 가느다란 허리가 애처로워 보입니다.저 잘났다 삐쭉이 고개 쳐들면 끝순을 질러줍니다.사람 돌봄 아는지 뿌린 튼튼해지고, 줄긴 곁가지 치며 실해집니다.녀석들, 장마 견디고선 태풍 맞설 두려움도 잊은 채 하늘하늘 춤을 춥니다.제 할 일은 하면서요.어느 날, 궁금하여 무성한 잎 들춰봅니다.앙증맞은 보라색꽃이 숱한 꿈을 키웁니다.누가 녀석에게 가르쳐 주었을까요?해 짧아지고 풀벌레 울면 꽃피우는 것을.'저절로 알아서 열매는 맺을까?'작은 꽃을 보고 또 봅니다.찬 서리 내리는 날, 콩깍지 속 푸른 몸에 까만 옷 걸치고당당히 나타날 알알이 기다려집니다.기다림은 행복이지요. - 전갑남의 시 <서리태> 전부그래도 일한 뒤의 보람다음 날, 도리깨질과 회초리로 두들겨 맞은 검불을 걷어내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으깨진 콩대와 깍지를 갈퀴로 살살 걷어냅니다. 콩알이 드러나면서 부피가 확 줄었습니다.
콩을 선별하는 게 타작하는 일 못지않습니다. '이럴 때 풍구가 있으면 수월할 텐데...' 예전에는 풍구라는 도구로 콩깍지와 잘게 부서진 검불을 바람에 날려 콩알을 쉽게 골랐습니다. 옛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풍구가 없으니까, 우선 어제 반장댁에서 빌려온 구멍이 큰 콩체로 걸러낼 참입니다. 수레에 콩체를 올려놓고, 손으로 살살 밀쳐내자 밑으로 콩알과 작은 검불들이 쏙쏙 빠집니다. 콩체 위에는 빠지지 못한 콩깍지만 남습니다.
한참을 일하고 있는데, 마침 이웃집아저씨가 놀러왔습니다. 답답한 내 일감을 보고 손을 걷어붙입니다.
"거긴 어레미질하고, 난 키질할 테니 어서 키나 가져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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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집 아저씨께서 능숙한 키질 솜씨로 콩깍지와 검불을 바람에 날려보냈습니다. 일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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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레미질하면 콩알보다 작은 것들은 밑으로 쏟아집니다. 선별작업 마무리 단계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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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레미질을 하고, 아저씨는 키질을 합니다. 아저씨가 거들어주니 일이 수월하게 진행됩니다. 까맣게 드러나는 콩알갱이가 검은 보석처럼 다가와 바닥을 구릅니다. '힘들게 가꿔 거두는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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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거둔 소중한 서리태콩입니다. 밥에 넣어먹고, 여름에 시원한 콩국수를 만들어 먹을 것입니다. 상 위에 놓고 마지막으로 선별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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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비해 소출이 어때요?""심기는 더 심었어도 작년만 못하네요.""그래도 올 같은 해에 이만큼이면 어디야?""그럼요. 감사하고 또 감사하죠!"아저씨가 세상이치를 말합니다. 세상일이란 게 사람 생각 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거라고 합니다. 농사도 마찬가지랍니다. '농사의 반은 하늘이 짓는다'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하늘이 주는 대로 받는 이치에 따를 뿐입니다.
콩타작을 끝내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합니다. 힘든 일을 마치고 난 뒤 이웃과의 막걸리 한 잔은 삶의 활력소입니다. 어려움이 많았던 콩타작으로 올 농사의 마무리를 짓습니다.
"나도 이젠 다리 쭉 펴는 겨울방학이다. 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