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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그냥 대강 합시다. 이거 까놓은 것 사다 먹읍시다."
"대강이라니요, 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의 건강을 결정한다. 몰라요?"

아내와 내가 출연(?)하는 <마이 스위트 홈>이란 영화에 거의 빠지지 않는 단골 신(Scene)이요 대사다. 그것도 하루걸러 하루씩 이와 비슷한 장면을 찍는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식상해서라도, 지쳐서라도 벌써 그만뒀을 장면이다. 그러나 우리 집 영화 <마이 스위트 홈>의 감독은 아내다 보니 지치지도 않고 그 삭막한 장면을 잇달아 자꾸 찍는다.

아내가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대강하자는 대사는 밑동부터 없다. 하지만 아내가 '책상 앞에 앉아 나만의 일에 몰두하는 장면1'을 싹둑 자르고 반강제적으로 자신의 일에 동참시키는 '마늘 까는 남편 역할 장면2'로 이끄니 이런 불평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은 마늘을 까는 장면이지만, 어제는 제주도산 더덕을 까서 두들기는 장면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신이 기다리는지. 참 싫다. 항상 싫다. 하지만 매양 그 싫은 일을 한다. 가정의 평화와 건강, 더 나아가 아내의 행복을 위하여.

'슬로푸드'는 아내의 전문 분야

 <슬로 농부>(행복이가득한집 지음 / 디자인하우스 펴냄 / 2015. 11 / 262쪽 / 1만 5000 원)
<슬로 농부>(행복이가득한집 지음 / 디자인하우스 펴냄 / 2015. 11 / 262쪽 / 1만 5000 원) ⓒ 행복이가득한집
이쯤 되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내 또래 남편들은 대강 어림잡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긴 나만 이러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장에 가면 널린 게 까놓은 마늘이고 까놓은 더덕이다. 그런데 굳이 아내는 6쪽 마늘이니, 의성마늘이니, 제주도산 화산재 묻은 더덕이니 하며 마늘 종류나 식물의 주산지를 거명하며 고집을 부린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입니다.(You are what you eat)"

책을 펴들자마자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어라? 내 아내에게 듣던 말이 여기도 나오네. 조금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얼마나 닮은 말인가. '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의 건강을 결정한다'와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책은 <슬로농부>란 제목을 가진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부가 발행한 것이다. 내 아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며 고생을 자처하는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와 먹을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주변과는 좀 다르게 느리지만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 그들의 농산물로 맛있는 음식을 자아내는 이들의 사명감 충만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런 먹거리라면 내 아내의 전문분야다. 오늘도 집안 한 귀퉁이에서 산야초며 매실, 오미자, 복분자 효소가 항아리에 담겨 구시렁구시렁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다. 그 옆으로 지난해 사다 항아리 속에 방치한 뾰주리감이 식초가 되어 떨떠름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고. 뭐, 그뿐이 아니다. 마늘이나 마늘종, 곰취가 장아찌가 되어 그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내게 '슬로푸드'란 대강 이런 것들이다. 그 온 국민이 즐긴다는 튀김 닭이나 햄버거, 피자는 한국전쟁 때 먹어보고는 못 먹어 본 것 같다. 하하. 신토불이니, 슬로푸드니, 친환경이니, 무농약이니 하는 단어들과는 하도 친해서 난 이미 건강한 먹거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건강한 먹거리 이야기가 <슬로농부>에 등장하는 걸 보며 먹거리 배움도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의 반대말? 맞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슬로푸드는 음식만 말하지 않는다. 먹거리의 생산, 저장, 요리 과정, 먹는 방법 등에 대한 총체적 용어다.

슬로푸드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건강한 먹거리 운동으로 ▲ 좋은(good) 음식 ▲ 깨끗한(clean) 음식 ▲ 공정한(fair) 음식을 일컫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 지역에서 나는 제철 음식 ▲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생산한 음식 ▲ 생산자의 수고가 보상되는 음식을 말한다.

홍감자에서 한국의 하몬, 생햄까지

책 <슬로농부>에는 23가지 음식에 대한 생산에서부터 음식 조리까지의 과정들이 담겨있다. 책을 열자 울릉도 특산품인 홍감자가 등장한다. 자주감자가 우리나라 토종으로 알고 있는 나로선 좀 생소한 감자다. 하지만 '진짜 음식, 우리 고유의 맛'이라며 책이 진지하게 다루는 걸 볼 때 엔간한 토종이 아닌 모양이다.

겉은 붉고 속은 고구마처럼 샛노란 홍감자는 1883년 울릉도에 이주한 첫 이주민들에 의해 심겨지기 시작한 울릉도만의 토종이다. 마이클 폴런은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진짜 음식을 "증조할머니가 아는 음식, 신선하고 살아 있으며 우리의 오감에 말을 거는 음식"이라고 말하는데 그 진짜 음식에 딱 맞는 것이 홍감자라고 책은 소개하고 있다.

"홍감자의 독특한 점은 손자 감자를 키워 종자로 사용한다는 것. 손자 감자란 봄에 심어 7월에 캘 때 뿌리 끝에 알알이 맺힌 감자 중 크기가 아주 작은 감자를 다시 심어 10월말이나 11월초에 또 한 번 수확한 감자를 말한다. 즉 7월에 캔 감자를 아들 감자, 11월에 캔 감자를 손자 감자라고 이르는 것. 손자 감자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심으면 알이 크고 튼실한 토종 홍감자를 수확할 수 있다." - <슬로농부> 19쪽

바이러스 때문에 해마다 새 종자를 심는 관행 농법과는 확연히 다른 재래식 농법이다. 다국적 종자 대기업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고, 질병이 없어 친환경 재배가 가능하다. 2014년에는 국제슬로푸드협회로부터 토종을 지키려는 운동인 '맛의 방주'로 지정되었다. 맛 또한 좋다.

책은 스페인 전통 음식인 하몬의 우리식 음식도 소개하고 있다.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한 '생햄'이 그것이다. 지리산 산골마을 솔마당의 오인숙씨가 '생햄' 생산의 주인공이다. 좋은 소금으로 절인 질 좋은 지리산 흑돼지를 신선한 바람으로 2년간 발효시키고 건조시킨 생햄은 '자연'이 조미료다. 콘래드의 이승찬 총주방장에 의해 건강한 리소토로 재탄생한다.

이밖에도 과메기, 전통 장류, 친환경 인삼, 친환경 유정란, 아가리쿠스 버섯, 황태, 감태, 오아로 파푸리카, 벌꿀 참외, 우엉, 추성주 등 수많은 건강 먹거리를 발로 뛰며 찾아 소개해 주고 있다. 책은 슬로푸드 운동은 "농부들이 농사짓는 법을 바꿀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소비자의 밥상이 바뀌어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삶이 행복해진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 집 옆 인삼밭에는 농약인지 영양제인지 모를 희뿌연 액체가 일 년을 갓 넘긴 인삼 이파리들을 염색하며 흩뿌려지고 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행해지는 풍경이다. 우리나라 인삼 하면 세계가 알아준다. 그러나 인삼 농사 짓는 걸 곁에서 보면 건강을 위해 인삼 먹을 생각이 안 든다. 물론 모든 인삼 농사를 이렇게 짓진 않겠지만.

아내가 슬로푸드 타령을 하면 난 그저 귀찮아만 했다. 내게 그 불똥이 떨어지니... 이제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것 같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입니다' 이 말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슬로푸드를 적극적으로 즐김으로 힘들게 농사 짓는 슬로농사꾼들을 돕고 건강 또한 챙기는 게 바른 삶이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슬로농부 - 슬로푸드를 만드는 사람들

행복이가득한집 편집부 글.사진, 디자인하우스(2015)


#슬로농부#슬로푸드#행복이가득한집#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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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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