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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면접에 가기 위해 만원 지하철에 오른 20대 청년, 전동차 출입문에 낀 옷을 빼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지만 여의치 않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청년 근처에 있던 여중생의 몸에 '검은' 손길이 뻗쳤다. 청년의 행동이 오해를 샀을까. 다음 정거장에 도착한 순간, 그 여중생은 청년을 '성추행범'으로 지목한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그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경찰은 "솔직히 인정만 하면 금방 풀려난다"고 짜증스럽게 대꾸한다. 억울한 청년은 당직 변호사에게도 도움을 요청해보지만 허사였다. 변호사는 무죄율이 0.1%에 불과하다면서, 되레 '피해자와 합의하고 자백하는 편이 낫다'고 충고(?)한다.

억울한 누명 쓴 피고인, 유죄 인정하면 풀려나지만 부인하면...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중 한 장면.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중 한 장면. ⓒ 위드시네마

유죄를 인정하면 바로 풀려나고 벌금형 정도로 끝이 난다. 반대로, 혐의를 부인하면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1년 넘게 재판을 받아야 한다. 더구나 무죄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청년은 승소 가능성이 희박한 법정 투쟁을 선택한다. 험난한 여정과 고난이 닥치리라는 점은 불 보듯 훤하다.

이는 2007년 개봉돼 주목을 받았던 일본 법정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줄거리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죄 없는 한 사람을 벌하지 마라.'

서두에 이 자막을 띄운 영화는 2시간 반 동안 무죄추정의 원칙이 무시되는 일본 사법 현실을 담담하게 고발한다.

이게 어디 일본만의 일일까. 0.1%까지는 아니더라도 낮은 형사사건 무죄율에, 종종 무죄추정의 원칙이 외면되는 사정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일본이 아닌 한국, 영화가 아닌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만일 당신이 영화 속의 청년처럼 무고하게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고 가정해보자. 억울하지만 범행을 인정하고 최대한 선처를 받겠는가, 아니면 징역형과 신분상 불이익을 각오하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겠는가.

이런 고민을 안겨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치열한 공방 속에 유죄와 무죄 판결이 오갔고,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김우철(가명, 35)씨의 사연이다.

[1심 판결] 결백 주장하다 고심 끝 자백, 결과는 '법정구속'

"피고인을 징역 8개월에 처한다."

지난 5월, 피고인석에서 판사의 판결선고를 듣던 김우철씨는 믿기지 않았다. 형량도 형량이지만, 고심 끝에 자백했는데 징역형이 선고되니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김씨는 법정에서 구속돼 난생처음 교도소에 수감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김씨는 지난해 8월 마사지 업소에서 직원 A씨(30대 여성)를 성추행하고 폭행까지 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게다가 김씨는 A씨를 거짓으로 형사고소한 혐의(무고죄)까지 추가됐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유죄가 인정된다며 지난해 12월 기소했다. 검찰의 공소장을 간추리면 이렇다.

'김씨는 A씨에게 6만 원을 지급하고 1시간 마사지를 받았다. 이어서 3만 원을 추가 지급하고 마사지를 받던 중 김씨는 갑자기 A씨를 성추행했다. A씨가 김씨를 뿌리치고 도망가려 하자 얼굴을 때렸다. 사정이 이런데도 김씨는 "A씨가 내 성기를 만지고 추행했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공소장이 전부 진실이라면 김씨는 강제추행, 폭행, 무고죄가 적용돼 중형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김씨는 경찰 조사 때부터 모두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내가 오히려 피해자고 폭행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시지를 조금 더 받으려고 했는데 A씨가 성기를 애무하여 경찰에 퇴폐업소로 신고하였고, 손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실수로 A씨 얼굴에 손이 닿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김씨에게 성추행과 폭행을 당했다는 A씨와 마시지 업주 B씨의 말에 신뢰를 보냈다. 게다가 김씨가 A씨를 성추행으로 고소한 사건은 무혐의 처분이 나왔다.

모든 상황은 김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재판을 앞둔 김씨는 법원이 선임해 준 국선변호인과 상담을 했다. 그런데 그는 상담 직후 돌연 법정에서 모든 범죄를 자백했다.

김씨의 주장에 따르면, 국선변호사가 "수사기록이 틀렸다는 증거를 가져올 수 없으면 무죄가 나오지 않고 실형이 선고될 수 있으니까 자백하는 게 낫다"고 조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선변호를 맡은 C 변호사는 16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자백을 강요하거나 권유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C 변호사는 "김씨와 함께 기록을 보고 토의하면서 (유무죄와 관련된)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는데, 김씨가 무죄 입증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자백을 하기로) 본인이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건기록을 직접 보고 판단해달라"고 강조했다.

어쨌거나 김씨는 자신만 기소된 상태에서 법원에서 자신의 결백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방안으로 자백을 선택했다. 무죄를 선고받기 어려울 바에는 차라리 자백해서 집행유예라도 받아보자는 심사였다. 하지만 김씨의 자백은 결과적으로 독이 되고 말았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1심 법원(서울북부지법)은 지난 5월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 조사 기간 내내 피해자를 매도하였을 뿐 피해회복을 위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이 법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범행을 자백하였을 뿐 아무런 피해회복이 없었다"면서 김씨를 법정구속했다. 뒤늦은 자백에 진정성이 없다고 본 셈이다. 김씨에게 동종전과와 집행유예 이상 전과가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2심 판결] 항소심 "허위 자백 가능성 배제할 수 없어"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중 한 장면.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중 한 장면. ⓒ 위드시네마

김씨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곧바로 항소했다. 항소심 변론을 맡은 임서경 변호사는 지난 1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처음엔 집행유예 정도가 나올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씨를 만나본 뒤 판단이 180도 달라졌다. 무죄를 예감한 것이다. 1심에서 김씨가 자백한 점이 큰 부담이었지만, 임 변호사는 2심에서 다시 범행을 부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문제는 마사지 업소 직원 A씨와 업주 B씨의 진술 등 유죄의 증거를 어떻게 반박하느냐였다. 우선 김씨의 친형이 손님을 가장해 마사지 업소를 찾았다. 그는 사장 B씨로부터 "추가 요금을 내면 전립선 마사지(남자 손님의 성기 부위를 자극하는 유사성행위)도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고, 법원에 녹음파일로 제출했다. 이는 "건전마사지 업소인데 김씨가 유사성행위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자 폭행했다"는 B씨의 법정 증언을 뒤집는 증거였다.

김씨가 성추행과 폭행을 했다는 시기와 방법 등에 대해 A씨가 진술한 내용도 조사 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 점도 미심쩍었다. 또한, 사건 당일 김씨가 112에 "마사지를 받는 중 A씨가 성기를 만졌다"는 신고를 하자 A씨가 업소 밖으로 몸을 숨긴 이유도 항소심 재판부는 납득할 수 없다고 보았다. 만일 A씨가 성추행과 폭행을 당했다면 경찰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김씨가 범행을 부인하는 진술 내용이 일관되고, 별다른 모순점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1심에서 국선변호인과 상담을 거친 뒤 자백한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조심스레 평가했다.

"관련 법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수사기관에서 계속 같은 주장을 하였으나 피고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기소되었는데, 법정에서까지 공소사실을 부인할 경우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구속될 수도 있다'는 두려운 마음에 허위의 자백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법원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던 A씨와 B씨의 말보다는 김씨의 주장에 무게를 두었다. 재판부(서울북부지법 제1형사부 재판장 홍승철)는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유죄 입증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결국 항소심에서는 지난달 24일 "증거가 없다"며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 그 사이 사건이 일어난 지 14개월이 흘렀다. 김씨는 곧바로 풀려났지만 넉 달 넘게 감옥에 갇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형사사건의 자백,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형사사건에서 자백은 진지한 반성으로 비쳐 피고인이 유리한 양형을 얻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섣부른 자백은 그 자체가 다른 증거를 배척할 정도로 강력한 증거가 되어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임 변호사는 "자백은 피고인에게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이 사건은 다행히도 피고인의 자백을 뒤집고 무죄가 나오긴 했지만 특이한 사례에 해당한다"면서 "1심에서 한 자백을 상급심에서 거짓자백이라고 뒤집는 일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이 상고하여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자백의 효력을 둘러싸고 공방은 계속될 전망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본다. "형사재판 최대의 사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죄가 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학자들은 이를 '소극적 실체적 진실주의'라고 부른다. 유죄 판결에 엄격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것은 '한 사람의 범인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적극적 실체적 진실주의'와 비교되는 개념이다.

시민의 인권이 강조되고 진정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지려면 전자가 더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법원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삼는 것도 한 사람의 무고한 시민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서 아닌가.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에서 청년은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최소한 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되뇐다. 현실 속의 당신도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1심과 2심 판결에서 유죄와 무죄를 오간 김씨는 대법원의 판결에 주목하고 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무죄#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무죄추정#판결대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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