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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호 호숫가에도 수양버들이 심어져 바람에 날린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비스듬히 빗겨서는 풍경에 형체가 없는 바람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지가 수면에 닿을 듯 말 듯한 수양버들은 '사랑의 슬픔'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다. 애틋하게 그리워하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연인을 떠올리게 한다. 수나라 양제는 이런 멋을 즐기려 대운하를 건설하고 운하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는 사람에게 비단 한 필을 주겠다고 했을까.

버드나무로 둘러싸인 동창호 북서쪽에 자리한 운하문화박물관을 찾았다. 베이징, 톈진, 허베이, 허난, 산둥, 안훼이, 장쑤, 저장성 등 8개 성시가 연합하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해 작년에 성공했다. 1794km의 중국 대운하 중 산둥성 510.5km 구간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산둥성에서는 남쪽부터 자오쫭, 지닝, 타이안, 랴오청, 더저우를 대운하를 거친다. 정치 중심인 북방과 경제 중심인 남방을 연결하는 대동맥인 대운하 주변으로 타이얼좡(臺兒莊) 고성 등이 형성됐다. 경제활동을 위한 각종 기관과 시설이 생겨났는데, 랴오청의 산섬회관(山陝會館)도 그 중 하나다.

중국의 상인 공동체 '상방', 관우를 추앙했다고?

중국운하문화박물관 랴오청의 동창호 북서쪽에 위치한 중국운하문화박물관이다.
▲ 중국운하문화박물관 랴오청의 동창호 북서쪽에 위치한 중국운하문화박물관이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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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운하 용의 여섯 번째 아들 공하가 악귀를 막기 위해 운하변을 지킨다.
▲ 중국대운하 용의 여섯 번째 아들 공하가 악귀를 막기 위해 운하변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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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나와 산섬회관을 찾아가는데, 가는 길 바로 옆으로 대운하의 물줄기도 나란히 따라 흐른다. 그 물줄기 옆에서 할아버지는 옥수수를 말리고, 할머니는 빨래하는 모습이 정겹다. 용의 여섯 번째 아들 공하(蚣蝦)가 물길을 따라 흘러올지도 모를 악귀를 막기 위해 대운하 언저리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대운하는 그렇게 2000년 넘게 중국인들의 삶 일부로 그 곁을 흘러온 셈이다.

산섬회관 입구에 도착하자 대운하 바로 곁에 세워진 그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건축 조각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산섬회관은 산시(山西)성과 산시(陝西)성 상인들의 모임 장소로 건륭 8년인 1743년에 착공해 8차례에 걸쳐 확장 보수되었다. 현존하는 회관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편이다. 규모 면에서도 동서 77m, 남북 43m, 총면적 3311㎡에 160여 칸의 방이 있어 큰 편이다.

세계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상술로 유명한 중국의 상인. 그들이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결성했으니 그것이 바로 상방(商幇)이다. 역사적으로 10대 상방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 산시성의 남부 진남(晉南)에서 시작된 진상(晉商)이다.

진상은 춘추시대부터 산시성의 함수호에서 생산되는 자연 결정 소금을 매매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최초의 상방이었다. 또한 가장 오래 명맥을 유지한 중국 최대의 상방이었다. 청대 연간 재정수입이 은자 약 4000만 냥 정도였는데 산시성의 열네 가문의 재산이 약 3000만 냥이었다고 한다.

산섬회관의 입구 산문이라 불리는 아기자기한 나무 조각이 화려하다.
▲ 산섬회관의 입구 산문이라 불리는 아기자기한 나무 조각이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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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처마의 조각과 협천대제 협천대제라는 글귀가 관우를 모신 사당임을 의미하고 있다.
▲ 화려한 처마의 조각과 협천대제 협천대제라는 글귀가 관우를 모신 사당임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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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있는 곳에 산시사람이 있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곳이면 어디나 산시상인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시상인 진상의 활동무대가 넓었다. 산둥성과 산시성의 접경을 지나는 대운하 곁에 산시상인 진상은 산시(陝西)상인 섬상(陝商)과 연대하여 이렇게 멋진 산섬회관을 짓고 그들의 경험과 비결을 공유했다.

중국 고대 최고 경영자들의 회의장이었을 산섬회관은 어떤 모습일까. 그 정문인 산문(山門)을 들어서야 하는데 입구의 경관부터 예사롭지 않아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정충관일(精忠貫日), 대의참천(大義參天)이란 글귀가 당시 상인들의 기본적인 기업철학이 충(忠)과 의(義)였음을 느끼게 해 준다. 또 평화와 중용의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의 '이중(履中), 도화(蹈和)'도 당시 상인들의 경영 철학 일면을 보여준다.

산섬회관 글씨 위에 협천대제(協天大帝)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관우를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다. 상인들은 왜 관우를 이렇게 재신으로 높게 모셨을까. 관우가 장수에서 성인으로 그리고 신으로 추앙된 것처럼 상인들도 자신들의 낮은 지위가 관우처럼 점점 높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또 의(義)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상인들에게 관우는 어쩌면 가장 적절한 캐릭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중국 고대 최고 경영자들의 회의장, 산섬회관

연극 무대인 희루 최고의 상인들이 연극을 관람하며 휴식과 여유를 누렸던 곳이다.
▲ 연극 무대인 희루 최고의 상인들이 연극을 관람하며 휴식과 여유를 누렸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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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앞의 돌사자 정교한 조각상의 돌사자 한 쌍이 관우를 모신 정전 좌우를 지킨다.
▲ 정전 앞의 돌사자 정교한 조각상의 돌사자 한 쌍이 관우를 모신 정전 좌우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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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을 들어서자 그 안쪽에도 이중으로 된 화려한 나무 조각 처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희루(戱樓) 라는 연극 공연을 위한 누각이 멋스럽게 자리해 있다. 업무와 관련한 얘기만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에 당시 유행하던 연극을 보며 휴식과 여유를 즐겼던 모양이다.

누각에 올라보니 공연된 연극의 제목과 배우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는 중국 청대의 희곡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희루에서는 관우가 홀로 적진에 들어간 단도부회(單刀赴會)를 기념한 5월 13일과 관우의 생일인 6월 24일 각각 3일 동안 공연을 벌이며 관우를 숭배하고 있다.

희루 양옆으로 종루와 고루가 멋스럽게 자리해 있다. 시계가 없던 당시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관우를 모신 사당에서 예를 행할 때 낮에는 종을, 밤에는 북을 쳐서 엄중함을 더했을 것이다.

관우를 모신 정전 앞 정원에는 고목이 된 홰나무가 자리해 있고 그 뒤로 두 마리의 돌사자 상이 예사롭지 않은 조각 솜씨를 뽐내며 버티고 섰다. 은 633냥을 들여 산시성에서 조각해 운하를 통해 이곳에 운반해 온 것이라고 한다. 정전 주변으로 악귀를 물리치는 불교의 법보인 검, 우산, 비파, 탑 등의 조각상이 있다. 유교, 불교, 도교의 통합을 건축에 최대한 반영한 결과이다.

관우상 가운데 관우, 우측은 아들 관평, 좌측은 부하 주창이 모셔져 있다.
▲ 관우상 가운데 관우, 우측은 아들 관평, 좌측은 부하 주창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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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최고 CEO의 회의장 정전에서 바라본 정원과 희루의 모습이다. 재신에게 재물을 기원하면서도 여유와 멋을 챙기는 풍모가 느껴진다.
▲ 중국 고대 최고 CEO의 회의장 정전에서 바라본 정원과 희루의 모습이다. 재신에게 재물을 기원하면서도 여유와 멋을 챙기는 풍모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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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유리기와를 얹은 정전 앞 기둥에는 안묘와 맹묘에서 봤던 목단, 매화, 연꽃 등의 조각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다. 관제대전이라고도 불리는 정전으로 들어서자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의 '부국유민(富國裕民)' 글귀 아래로 가운데 관우, 우측에 아들 관평, 좌측에 관우를 모시던 신하 주창이 검은 얼굴로 서 있다.

관제대전 우측으로 재신 대왕전이 있고, 좌측으로는 문창신을 모신 문창화신전이 있다. 정전 안에는 또 중국 고대 24효(孝)에서 발췌한 고사를 7폭의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19세기 세계 최대 갑부였던 진상은 재신에게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공간에서조차도 철저하게 충효와 의리의 가치를 챙기고 있는 셈이다.

정전 뒤쪽으로 춘추각이 있는데 관우가 늘 곁에 두고 읽었다는 <춘추>라는 책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금은 관우와 삼국지 인물의 생애가 소개되어 있는데, 원래 각종 서화를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중국 최고의 상인들이 모여 재물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업무를 논했다. 연극을 관람하며 여유를 즐기고, 독서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공간이 바로 산섬회관이었던 셈이다.

전국에 이런 회관이 50여개 있었다고 한다. 제도적 보장이나 사회적 신뢰가 없던 시절, 지역과 가족 형태의 상방이 서로 의지하며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한 흔적이라고 하겠다.

산섬회관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거상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진상은 성실함으로 무장한 뛰어난 장사 수완, 의리와 신용을 앞세운 경영 철학으로 중국 최대의 상방으로 불렸다. 그들의 회관에 아기자기한 건축의 미를 구현하면서도 충효, 의리, 유불도의 통합 등 철저하게 당시 사회의 이념을 녹여 자신들의 공간을 꾸며 놓았다.

최소한 그들이 쉽게 얄팍한 속내를 드러내는 그런 장사치가 아니라, 멀리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믿을만한 상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친다. 산섬회관 앞을 흐르는 대운하 곁 버드나무가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있다. 바람이 멀리서 버드나무를 찾아온 모양이다.


#산섬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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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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