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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신경숙씨. 사진은 지난 2009년 6월 25일 세종로 한 레스토랑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 당시 모습.
 소설가 신경숙씨. 사진은 지난 2009년 6월 25일 세종로 한 레스토랑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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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경숙 표절' 파문에 대한 당신들의 입장 표명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당신들의 의견에 마음이 전혀 움직이는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신경숙을 옹호하는 의견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았다면, 문인들의 비판과 문제제기가 지금처럼 거세지 않았다면 과연 당신들이 이렇게라도 의견 표명이나 했을까 하는 의문을 거둘 수 없습니다. 물론 오불관언하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의견을 발표한 것은 다행이지만, 대세에 밀려서 마치 사후약방문 격으로 발표된 것 같은 당신들의 의견에 저는 어떤 감동도 근본적인 성찰도 서늘한 인식도 자기비판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의식적 표절이 아니더라도 해당 대목이 상당히 유사한 것은 분명하다"로 정리될 수 있는 당신들의 의견이 얼마나 이 표절 파문의 진실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다소 뻔하고 예상 가능한 의견이었다고나 할까요.

전 <시사저널> 기자이기도 했던 페친 성우제씨는 "상품을 실컷 팔아 놓고 하자 있는 상품에 대한 손님들의 항의에 대해 이렇게 교묘하게 썰을 풀고 있구나. 시장 바닥의 옷장수도 이렇게는 안 한다"고 당신들에게 직설적인 비판을 전개하고 있는데, 저는 당신들의 의견 표명이 이러한 비판을 충분히 비껴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묻어가면 한국문학은 결코 개혁되지 않습니다"

이번에 소설가 신경숙과 더불어 문인과 독자들의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된 <창작과비평사>(창비) 이상으로 신경숙의 이런 엄청난, 그리고 슬프기까지 한 추락에 〈문학동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디 그동안 〈문학동네〉 지면을 통해 이루어진 신경숙 소설에 대한 글과 대담, 리뷰를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지요. 물론 때로 의미 있는 대목에 대한 적실한 분석도 있지만, 그 상당 부분이 신경숙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 문학적 애정 이상의 과도한 의미 부여, 영혼 없는 주례사 비평에 가깝다고 봅니다.

거기서 나는 어떠한 비평적 자의식도 최소한의 균형 감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문학동네>야말로 '신경숙 신화화'에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할 문예지 아닌가요. 저는 표절도 문제지만 이렇게 작가를 무비판적으로 신성시하는 문화가 이번 사태를 키운 더 중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신경숙 씨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소설에 대한 균형 잡힌 비판과 문제제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이번 파문에 대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대응, 관점에 따라 오만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대응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에 <창비>의 안타까운 상처에 기대서 <문학동네>가 적당히 묻어가면 한국문학은 결코 개혁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국문학에 새로운 희망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표절 파문에 대한 의례적인 의견 표명에서 더 나아가, 무엇보다 〈문학동네〉 지면의 혁신이 필요합니다. 가령 활발한 토론과 비판, 다양한 문제제기를 문학동네 지면에 제도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근본적 전환이 이루어 질 때, 이 더럽고 치명적인 추문을 벗어나 한국문학의 새로운 갱신과 도약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신경숙의 소설 <전설>이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신경숙의 소설 <전설>이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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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에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게는 평생 동안 어떤 청탁을 안 해도 좋으니, 부디 양심적이고 열정적인 비평가, 문학을 사랑하면서도 비판적 자의식을 지닌 젊은 비평가들에게 자주 청탁하여, 이제는 누구나 쓰고 싶어 하는 〈문학동네〉 지면을 자사 출판 작품에 대한 홍보 일변도의 장에서 변화시켜 주기 바랍니다.

신경숙이 이번 추문을 "창작활동의 한 전기(轉機)로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는 당신의 바람에 저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기, 기회가 단지 의지만으로 될까요. 그 전기는 자신의 작품을 엄중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문화적 감성과 균형 감각의 형성 없이는 지극히 제한적일 것입니다. 재수 없이 유탄을 맞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한 작가가 여론에 떠밀려 사과한다고 과연 문학권력을 둘러싼 침묵의 카르텔 문화가 없어질까요. 그래서 제가 당신들에게 제도적 혁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한국문학을 조롱하는 일이 유행이 된 것처럼 보이는 때일수록, 더욱, 한국문학이 독자의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이런 의지를 표명한 당신의 마음을 신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단지 신뢰만으로 당신의 의지만으로 한국문학으로부터 멀어진 독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출판, 비평, 문예지 문화의 근본적인 혁신과 제도적 변화 없이는 또다시 지금과 비슷한 추문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겁니다.

"문제는 영혼 없는 칭찬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나는 때로 당신들의 어떤 글들을 통해, 비평의 진정한 매력을 느껴보기도 했고, 작가와 문학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당신들의 글쓰기가 신뢰가 안갈 때가 많아지기 시작하더군요. 당신들의 비평을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순수하게 즐겁게 읽고 싶군요.

여기서 당신들이 늘 주장하고 있는 '칭찬하는 비평'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나 하는 상투적인 비판보다는 작품의 장점을 잘 찾아서 나만의 칭찬하는 비평을 하고 싶다고 했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상투적인 비판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좋습니다. 작품의 아름다운 미덕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비평은 얼마나 매력적인지요. 문제는 적확하고 설득력 있는, 말하자면 아름다운 칭찬이 아니라 영혼 없는 칭찬인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볼까요.

당신들의 논리라면 박근혜 대통령도 따뜻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박근혜와 이명박에 대한 지독하게 상투적인 비판을 왜 하나요? 그들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정책적 입장, 남모를 고민이 있을 텐데요. 당신들의 논리에 의하면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 참 쉽고 상투적이니, 그녀의 숨겨진 장점을 잘 포착해서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학과 정치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물론 문학과 정치는 다르지만 많은 면에서 유사하기도 합니다. 작품이 하나의 우주라면, 한 인간이 마주하는 정치적 지평 역시 하나의 우주가 아닐까요. 설마 문학은 칭찬하는 것이고 정치는 비판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요.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칭찬하는 일이 지닌 위험성은 비평가가 자신의 신용을 잃게 된다는 데 있다. 모든 칭찬은 전략적으로 볼 때 백지수표이다"(발터 벤야민, <문학비평에 대하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한번 인용한 바 있는데 이렇게 다시 인용한 이유는, 그 칭찬 일변도의 비평이 바로 지금 목도하는 한국문학의 초라한 모습을 가져온 원인이며, 한국문학의 경쟁력을 결정적으로 하락시킨 이유이며, 한국문인들의 자기 성찰 능력과 지성을 퇴락시킨 주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단 시스템의 모순과 치부에 대해서 더 날카롭게

저는 2년 전에 <시인수첩>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러니컬한 사실 하나를 지적하도록 하자. 그토록 비판적인 성향의 문인들도 정작 자신이 속해 있는 문학장이나 문학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나 문학작품에 대한 비판에는 소극적인 경우가 많다. 비판이 글쓰기의 중요한 스타일이자 실존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는 비평가 역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정권이나 정치적 아젠다에 대한 문인들의 비판은 활발하지만, 정작 유의미한 비판이 필요한 문학작품이나 문학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는 최근 십여 년 사이에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퇴행적인 정권이나 정치적 논점에 대한 비판은 양심의 징표로 수용될 수 있는데 반해, 스스로가 속해 있는 문학장이나 문학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은 유무형의 구체적인 손해와 불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와 같은 현상의 배후에 존재한다.

말하자면 정권 비판이나 대통령 비판, 혹은 정치적 아젠다에 대한 첨예한 문제제기는,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면 그 비판의 주체에게 특별한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한 문학작품이나 문학제도, 문학권력, 문학과 연관된 미디어를 비판했을 경우, 원고청탁, 문단 인맥, 문학상 등의 실제적인 손해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저는 바로 이 문제가 한국문학이 독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 대단히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고 세월호 사건을 질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인인 우리들은 그 이전에 우리를 둘러싼 문단 시스템의 모순과 치부에 대해서 더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야 했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이런 자세 없이 이루어지는 사과와 반성은 바로 지금의 난경을 일시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한국문학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표현한 "한국문학이 독자의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부탁컨대, 당신의 그 예리하고 아름다운 필력을 이 시대 한국문학의 결여와 모순에 대한 담대한 지적에 나눠주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표절에 대한 질타나 단죄보다는 뭔가 생산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충정으로 이 글을 써왔답니다. 마지막으로 모멸과 추문의 시대에 늘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김수영의 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건강과 건필을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2015년 6월 19일
일본 고다이라시 도쿄경제대 게스트룸에서
권성우 드림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권성우 님은 문학평론가이자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입니다. 이 글은 권성우 교수의 페이스북에 실렸습니다. 본인의 동의를 얻어 <오마이뉴스>에 게재합니다.



태그:#신경숙, #표절, #문학동네, #신형철, #권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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