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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초기 한 여권 인사와 만난 자리였다. 박근혜 정부가 과연 과거 정권들처럼 전 정부를 제물로 삼는 기획 사정에 나설 것인지가 화제로 떠올랐다.

이 인사는 당시 "검찰에 쌓여 있는 정보로 준비야 하겠지만 실제 칼을 들 일이 있을까 싶다"라며 "보통 정권에 큰 위기가 찾아와야 '사정 카드'를 쓸 유혹을 느낄 텐데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그 정도로 빠질 일이 쉽게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라고 내다봤다.

당시만 해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60%대를 넘나들었고 웬만한 악재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콘크리트'로 불릴 정도로 단단한 고정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위기 수준으로 불리는 30%대로 추락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때문에 당장 효과는 탁월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사정 정국이 조성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었다.  

빗나간 예상... 집권 3년차 어김없이 막 오른 사정정국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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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빗나갔다.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로 고강도 사정정국이 개막했다. 검찰은 재계 전반에 사정의 칼을 겨누고 있고, 자원외교 비리와 기존에 추진해 오던 방위사업 비리 수사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이후 그 역할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 1부와 2부가 총동원 됐다. 수사 대상 기업도 첫 출발점이었던 포스코에 이어 신세계그룹과 동부그룹, 롯데그룹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원외교 비리 수사는 새누리당 친이(친이명박)계 성완종 전 의원이 회장으로 있는 경남기업을 압수수색하는 등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MB 정권과 밀접했던 대기업과 MB 정부 시절 자원외교에 참여했던 기업들이 표적이 되고 있는 셈이다.

여권 관계자는 "이 정도 규모의 수사라면 검찰이 그동안 청와대와의 교감 하에 오랫동안 준비해왔다는 의미"라며 "그만큼 국정 동력 확보를 위한 국면전환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수사를 본격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한 건 지난 연말부터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말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파문에 이어 올 초 연말정산 사태가 터지면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저 20%대까지 떨어졌다. 국정운영은 되는 것 하나 없는 사실상 마비상태였다.

집권 3년차 경기 침체 극복과 경제 활성화를 통해 성과를 내겠다며 연일 공직 사회를 다그쳤지만 공무원 연금 개혁 추진에 대한 반발로 추진력 확보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야 할 대기업들은 정부의 협조 요청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근엔 정부가 공개적으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에도 난색을 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면전환용으로 쓸 수 있는 카드로 두 개 정도가 거론됐다. 남북정상회담 같은 대형 남북관계 이슈 활용이나 전 정권을 겨냥한 사정이다. 하지만 꽉 막혀 있는 남북관계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상회담 카드는 애초에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권력기관을 동원하면 가장 손쉬우면서도 효과가 큰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비리 척결을 명분으로 전 정권을 희생양 삼아 정치권과 공직사회는 물론 재계까지 압박해 집권 후반 국정동력을 짜내보겠다는 의도가 뚜렷히 읽힌다. 

'사정의 유혹'에 빠진 정권들

포스코건설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포스코 전ㆍ현직 고위 경영진을 대상으로 소환 조사 일정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진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빌딩의 포스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포스코건설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포스코 전ㆍ현직 고위 경영진을 대상으로 소환 조사 일정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진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빌딩의 포스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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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에서도 집권 초·중반 고강도 사정을 통해 국정동력을 확보하고 국면전환에 나선 경우가 많았다.

이명박 정부만 해도 집권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 수사에 이어 집권 3년차에도 사정정국을 이어갔다. 2010년 10월 21일 이명박 대통령은 경찰의 날 치사를 통해 "만연해 있는 권력비리, 토착비리, 교육비리를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라고 예고한 후 대검 중앙수사부가 씨앤그룹 수사에 돌입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파문과 세종시 수정안 부결 등으로 이명박 정부의 리더십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집권 3년차는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국정 장악력을 회복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회복할 '사정의 유혹'이 가장 강력한 시기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비리 인사들을 혼내주고 부정부패를 없애겠다는 데 싫어할 국민들이 있겠느냐"라며 "5년 임기의 중간쯤인 집권 3년차가 정권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칼을 휘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다.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힘이 빠져, 대규모 사정은 하고 싶어도 못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번 고강도 사정은 지난 12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본격화됐다. 외견상 총리가 앞장 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청와대가 주도하고 있다.

수사 주도하는 우병우 인맥... 청와대발 고강도 사정 어디까지

박 대통령은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이번에야말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서 그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라며 검찰에 힘을 실어줬다. "앞으로 30년의 성장을 위한 토양을 새롭게 한다는 각오로 부패척결에 범정부적인 역량을 결집해 주기 바란다"라며 결연한 의지도 다졌다.

특히 수사에 앞장 선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인맥이 대거 포진해 있다. 재계를 정조준하고 있는 조상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은 지난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우병우 민정수석이 대구지검 특수부장으로 재직할 때 평검사로 손발을 맞췄다. 또 자원외교 비리를 수사를 이끌고 있는 임관혁 특수 1부장은 2005년 법무부 법조인력정책과장이던 우 수석과 평검사로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지난 검찰 인사 때 우병우 인맥이 전진 배치된 것과 이완구 총리가 취임 후 일사분란하게 정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오랫동안 묵혀놓은 기획된 수사라는 게 분명해 보인다"라며 "검찰의 칼끝이 어디까지 겨냥하게 될지 쉽게 선을 긋기 어려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의 첫 타깃이 된 포스코의 정준양 전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표적 측근으로 이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도 가깝다. 특히 포스코 비자금 수사는 MB 정권 실세들에게 자금이 전달됐는지 여부도 초점이 될 수밖에 없다.

또 방위산업 비리 수사도 이미 구속된 이규태 일광그룹 회장이 사업을 확장한 시점이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07년 이후라는 점에서 역시 전 정권 인사들이 줄줄이 엮일 가능성이 크다. 일부에서는 경남기업이 참여한 러시아 캄차카 석유탐사권 사업은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석유공사가 시작했다는 점에서 야권까지 수사 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검찰 수사 진행에 따라 전 정권과의 충돌 양상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이미 새누리당 친이계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새머리 기획"(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이라는 비아냥이 공개적으로 튀어나왔다.

집권 초엔 공안통, 집권 중반엔 특수통... 박근혜 정부의 검찰 사용법

1·2년차 박근혜 정부의 단골 국면전환 카드는 공안정국 조성이었다. 정권의 위기 때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 공안부가 움직였다.

3년 차 박근혜 정부는 조금 달라졌다. 공안통 대신 특수통이 주도하는 사정정국이 국면전환 카드로 등장했다. '공안의 달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물러난 뒤 '검찰 사용법'이 조금 달라진 셈이다. 하지만 검찰을 통치에 앞세운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속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공기업 운영에 부정부패가 있었다면 반드시 처벌하고 재발을 막아야 하지만, 검찰 수사가 정치적 의도를 의심 받게 되면 성공해도 정치·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라며 "만약 이번 수사로 인한 신구정권 갈등이 보수 분열로 치달을 경우 내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태그:#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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