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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팽>의 저자 백시종
 장편소설 <팽>의 저자 백시종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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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다. 소설가로 명성을 얻어 현대그룹 홍보실에 채용돼 사보 제작을 맡았다. 1980년대 내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 등을 보필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0년 만에 홍보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승진 다음 날, 갑자기 파면 통보를 받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잡지에 연재했다. 이명박 회장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MB가 저를 불렀습니다. 건설사 하청 업체를 하나 줄 테니 운영하라고 했습니다. 대신 현대그룹에 대한 나쁜 감정은 버리라고 회유하더군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하청 업체 사장들이 좋은 차를 몰고 잘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제안을 받는다면, 소설을 팔아 한몫 잡은 사람이 되는 불명예가 남습니다. 작가의 양심을 팔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절했지요."

그는 최근 자전적 소설 <팽>(새움출판사)을 낸 백시종(72)씨다. 출간일인 지난 2일 오후, 경기도 양평의 자택에서 백씨를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대한 평가도 들을 수 있었다.

경남 남해 출신인 백씨는 1966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한국소설문학상, 한국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 류주현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필화 사건 26년 만에 다시 꺼낸 자전 소설

소설 제목으로 삼은 '팽'은 고대 형벌 중 하나로, 삶아 죽이는 사형인 팽형(烹刑)에서 나온 말이다. 소설 부제는 '필요할 땐 다급하게,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다. 승진한 다음 날 아침에 '팽'당한 명광그룹 홍보부장 박종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팽>은 실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소설 속에서 현대그룹은 명광그룹으로, 정주영 그룹 회장은 왕득구로,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은 유문봉 회장, '엠비유'로 그려져 있다. 왕 회장은 복잡한 여자 관계에 얽혀 있고, 비이성적인 언행 탓에 직원들의 불만이 높다.

엠비유는 왕 회장에 버금가는 실세로 나온다. 주인공 박종산이 홍보부장에 내정된 뒤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파면 당하는데, 그 후임으로 K라인이 들어온다. 박종산은 엠비유가 파면에 개입했음을 확인한다. 이후 명광그룹의 부조리와 횡포를 고발한 소설 <돈황제>를 펴내지만, 명광그룹의 돈과 권력으로 서점에서 책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실제로 백시종씨는 1989년 현대에서 파면 당한 뒤 <돈황제>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다. 하지만 책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서점에서 자취를 감췄다. 당시 <한겨레>의 기사 "소설 <돈황제> 대형서점서 '증발'"을 보면 이 같은 정황이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사에서 서점 관계자는 "책이 안 들어오고 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라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책이 사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이 소설은 필화 사건으로 번지면서 화제가 됐다. 1993년에는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매일 여론 조사 결과만... 정주영 3위로 밀리니 배신"

 직접 수기로 쓴 원고 옆에 최근 출판한 장편소설 <팽>이 놓여있다.
 직접 수기로 쓴 원고 옆에 최근 출판한 장편소설 <팽>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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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정주영 회장과 MB는 주종관계였습니다. 정 회장 출마설이 나올 때부터 MB는 매일 여론조사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정 회장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의리를 지켰어야 했지만 MB는 YS에게로 갔습니다. 정 회장이 3위로 밀리니까 주인을 배신한 것입니다."
 "사실 정주영 회장과 MB는 주종관계였습니다. 정 회장 출마설이 나올 때부터 MB는 매일 여론조사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정 회장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의리를 지켰어야 했지만 MB는 YS에게로 갔습니다. 정 회장이 3위로 밀리니까 주인을 배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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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아래 MB)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의 주요 부분을 읽었다. 그는 MB 회고록과 현실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고 말했다. 먼저 회고록 1장, '나는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다'를 비판했다. 회고록에서 MB는 '재벌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라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정주영 회장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했고, 결국 그 때문에 결별하게 됐다고 썼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게 백씨의 주장이다. 20여 년 전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자 담담했던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제 정 회장이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MB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민주자유당으로 옮겨 그해 국회의원이 됐다.

"사실 정주영 회장과 MB는 주종 관계였습니다. 정 회장 출마설이 나올 때부터 MB는 매일 여론조사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정 회장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의리를 지켰어야 했지만 MB는 YS에게로 갔습니다. 정 회장이 3위로 밀리니까 주인을 배신한 것입니다."

<팽>에는 엠비유가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공언하는 부분이 나온다. 백씨는 MB가 서울시장을 대통령으로 가는 징검다리쯤으로 여겼다고 봤다. 정치적 야욕이 있었다는 것이다.

"MB는 평소 정치인을 평가했습니다. '국무총리 저 사람 자격 없어', '그릇이 아니야' 그런 평가였죠. MB는 정주영 회장도 한 수 아래로 봤습니다. '정 회장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이 될 그릇이 안 된다'는 식의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막강 MB라인, 정치인 된 뒤에는 모두 사라져"

백씨는 "회사 내 조직은 MB가 정주영 회장보다 더 넓다는 소문이 있었다"며 "MB라인이 돼야 출세하지, 정 회장에게 붙어서는 출세 못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런 경험으로 볼 때, 회고록 중 '현대에서 보낸 27년' 부분은 MB의 공과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MB는 현대가 키워준 인물이지만 현대에서의 일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실수를 했지'라고 잘못을 고백하는 게 회고록의 본질입니다. MB는 자기가 고생했던 얘기, 자기 자랑 일색이에요."

"사실 그분이 현대에서 컸지만 국회의원이 되고 서울시장이 됐을 때 현대 시절에 같이 일했던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자기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치부가 드러날까 자신의 사람을 쓰지 않은 것이죠."

그는 MB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악어는 물속에서 왕이고, 호랑이는 땅 위의 왕이듯 MB는 토목의 왕이었다"며 "MB는 인건비, 사업비 계산에 빨라 거대한 토목 사업이 욕심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부 고속도로처럼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공사가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벌가 '갑질'을 향한 한 소설가의 경고

 "앞뒤 가리지 않는 갑질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하들은 오너의 갑질에 항의할 수 없고, 항의를 해도 부도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소설만이 그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를 바꿀 수는 없지만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썼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는 갑질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하들은 오너의 갑질에 항의할 수 없고, 항의를 해도 부도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소설만이 그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를 바꿀 수는 없지만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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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팽>은 왕 회장과 엠비유의 부도덕성을 고발한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을'을 약탈하는 '갑'의 횡포를 여실히 드러냈다. 영문을 모른 채 파면 당한 박종산처럼 오너의 말 한마디에 결정되는 '을'들의 삶을 그려낸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다시 소설로 쓰게 된 계기를 묻자, 백씨는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그룹의 비자금 문제를 폭로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김 변호사의 폭로를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며 말을 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는 갑질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하들은 오너의 갑질에 항의할 수 없고, 항의를 해도 부도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소설만이 그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를 바꿀 수는 없지만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썼습니다."

백씨는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을 일으킨 대한항공 일가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승무원에게 교수직을 제안하고, 사무장을 겁박하는 행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함. 실제 MB가 자신에게 현대건설 하청 업체 대표직을 제안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창업 3세대의 횡포가 더 악질"이라며 "창업자들은 고생 끝에 업적을 이뤄냈지만, 3세대는 '갑질'만 이어받아 괘씸한 행동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그룹에서의 경험 이후 그는 <대물>, <재벌본색>, <에덴의 북쪽> 등의 기업 소설을 써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유명 신문사의 소설 연재 제안을 거절하고 지방으로 도피한다. 1992년 대선을 앞둔 시점, 왕 회장의 사생활을 폭로해달라는 인터뷰가 소설 연재의 전제 조건이었다. 당시 신문사 연재는 작가에게 최고의 기회였다. 그는 유혹을 뿌리쳤다. 소설이라는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소설 연재 제안을 거부한 것은 재벌, 언론, 권력 등의 갑질에 대한 을의 정신적 우월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 위에 소설이, 인간 정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절대 다수가 을의 입장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시종#팽#이명박 회고록#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돈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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