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규슈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고양시 녹지과 직원들과 규슈올레 탐방에 나선 것이지요. 제주올레에서 일본에 수출한 규슈올레는 제주올레와 길 표시가 같았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간세와 리본, 화살표가 똑같아 전혀 낯설지 않았고,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지요. 길은 아름다웠고, 걷기 좋았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게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걷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지요.
우리 일행은 규슈올레 3개 코스를 걸었습니다. 오이타현의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와 오쿠분고 코스와 사가현의 다케오 코스입니다. 코스마다 특색이 있어 걷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 기자 말우리 일행이 묵었던 호텔에서 다케오온센역은 아주 가까웠다. 내 방에서 다케오온센역이 아주 잘 보였다. 다케오온센역은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케오 코스를 걷기 전날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다케오온센역을 기웃거렸다. 잠이 오지 않아 홀로 호텔을 나섰고, 가까운 다케오온센역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이 옮겨졌다. 역사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20대로 보이는 남자 셋이 바닥에 주저앉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역사 안은 조명이 켜져 있어 환했지만 적막했다. 상점은 문을 닫았다. 이곳이 규슈올레 다케오 코스의 출발지였다. 안내지도가 있기에 한 장 집었다. 그리고 역사를 빠져나왔다. 내가 역사에서 나온 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제복을 입은 역무원이 역사를 잠그고 불을 껐다.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는 길
고코노에 야마노미 코스와 오쿠분고 코스는 오이타현에 있지만, 다케오 코스는 사가현에 있다. 이틀 동안 벳부에 머물면서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와 오쿠분고 코스를 걸은 뒤, 우리는 사가현에 있는 다케오 시로 이동했다. 이곳 역시 온천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역 이름에도 온천이 들어갔다. 일본식 발음은 '온센'이지만 한자는 온천(溫泉)으로 표기한다.
다케오 코스는 전체길이가 14.5km이며, 소요 예상시간은 4시간으로 안내책자에 나와 있다. 하지만 실제로 걸으니, 6시간이 넘게 걸렸다. 도시락을 먹으면서 시간이 지체된 이유도 있지만, 키묘지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다케오 시 도서관에 들러서 구경을 하면서 여유를 부린 탓이다.
참 이상했다.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길을 걸었지만, 규슈올레처럼 느긋하게 걷기는 처음이었다. 우선은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즐기면서 걸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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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기 좋은 숲길이 이어진다. 이 길에서는 오래 머물러도 좋으리. |
| ⓒ 유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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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분고 코스를 걸으면서 쫄쫄 굶었기 때문에 호텔을 나서기 전에 도시락을 먼저 준비했다. 역시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샀다. 도시락으로 배낭은 묵직해지지만 마음은 든든해진다.
다케오 코스는 다케오온센역에서 출발, 다케오 시내 주택가를 지나 산으로 이어졌다가 도심으로 돌아왔다가 온천마을에서 끝난다. 때문에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길이다. 걷기 전에 다케오온센 역사로 들어가 보자. 다케오 코스 지도도 있고, 스탬프도 찍을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다 걸은 뒤에 다시 다케오온센역으로 돌아와 스탬프를 찍었다.
다케오온센 역을 벗어나니 길은 주택가로 이어진다. 집집마다 빨래나 이불을 널어놓은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은 사람 사는 모습이 어딜 가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만든다.
주택가 한쪽에서 검은 기차 한 량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석탄을 때면 나오는 증기로 철도를 달리던 기차를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C11259'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기차는 쇼와(昭和) 19년 1월 29일에 만들어졌고, 30년 뒤엔 쇼와 49년에 운행이 정지됐다. 그런데 쇼와 19년이면 몇 년도야? 일본 연호는 아무래도 낯설 수밖에 없다.
깔끔하게 잘 지어진 주택 옆으로 추수가 끝나 텅 빈 논이 펼쳐진다. 논이 있으니 농촌마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쪽을 둘러보면 도시의 주택가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시라이와 운동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 잘 가꾼 숲 같다.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대나무 역시 빽빽한 숲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올레를 걷지 않더라도 공원을 찾아와 삼림욕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공원의 전망대에서는 아담한 다케오 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다케오 시는 인구가 5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니 작고 아담한 도시인 것만은 분명했다.
참 이상한 종... "저거 LPG 통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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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묘지의 불상들은 빨간 털실모자를 쓰고 있었다. 일부는 빛이 바랬다. |
| ⓒ 유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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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묘지(貴明寺)는 들러볼만한 절이었다. 1574년에 창건된 키묘지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규슈올레를 걷는 이들이 언제든지 들러서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게 준비돼 있다. 차를 마시니 주지스님의 따뜻한 마음이 차에 녹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묘지에는 이밖에도 특별한 것이 있다. 종각에 매달려 있는 종이다.
"저거, 가스통 맞지?"페인트칠이 지저분한 허물처럼 벗겨진 종은 아무리 봐도 LPG 가스통이었다. 설마, 가스통일리가 있나 하면서 자세히 살폈지만 결론은 가스통이었다. 가스통이 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느 스님의 생각인지 몰라도 대단하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저 종(?)은 대체 어떤 소리가 날까?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남의 나라 절에 와서 함부로 종을 쳐 볼 수는 없지. 그냥 궁금한 대로 절을 떠날 수밖에. 절을 나서는데 붉은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붉은 꽃잎들이 흩어진 길을 걸었다.
그곳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일본 여성을 만났다. 이 여성은 온화한 얼굴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지만 한국어가 서툴렀고 우리는 일본어가 서툴렀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환하게 웃으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케노우치 호수는 엄청나게 컸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했다. 호수를 따라 한참을 걸으니 A코스와 B코스 갈림길이 나온다. A코스는 산으로 이어지는 난이도가 조금 높은 길이고, B코스는 난이도가 낮은 길이다. 걷기에 자신이 없으면 B코스를 택하면 된다.
우리는? 당연히 A코스였다.
사가현립우주과학관 앞을 지나 한참을 걸으니 산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간세 표지판에 '산악유보도'라고 표기도 있다. '산악유보도'(山岳遊步道)라면 산악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인가? 이 길은 삼나무가 우거진 숲을 따라 이어지는데 참으로 걷기 좋은 길이었다. 직선으로 곧게 잘 자란 삼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다.
이 길도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선택을 해야 했다. 정상으로 가는 길과 올레 코스가 이어지는 길이었다. 나와 한범씨는 올레 코스를 선택했고, 김운용 과장과 창식씨는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우리가 걸은 길은 정말이지 걷기 좋은 길이었다. 길은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 속 어디선가 새들이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낮 12시 40분쯤 양지바른 곳을 찾아 돗자리를 펼쳤다. 오전 9시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3시간 반 넘게 걸은 셈이다. 허기가 진다. 도시락이 꿀맛인 것은 당연했다. 배낭의 무게는 줄고, 몸은 무거워졌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길은 숲에서 도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케오시 문화회관과 신사를 지났다. 다케오 신사에서는 3000년 묵었다는 녹나무를 보러 갔다.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야 했다. 굵은 대나무들 역시 어찌나 키가 큰지,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든다.
녹나무는 가까이 가기 전부터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는 사람의 존재를 아주 작은 티끌처럼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무는 아랫부분이 비었는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계단이 놓여 있었다.
3000년이라는 세월을 한 자리에 붙박여 있다면 아무리 나무라 할지라도 신의 경지에 다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100년도 못 사는 존재인데 그런 인간에게 3000년의 세월은 영원과 다름이 없다. 3000년의 세월을 버틴 녹나무가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녹나무를 보고 돌아나와서 다케오시 도서관에 들렀다. 도서관에 딸린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잠시 쉬어가자고 들렀는데, 카페가 스타벅스였다. 카페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고, 커피를 주문하려고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섰다.
3000년 된 녹나무를 보러 가는 길
주택가는 한산했고, 숲길이나 산길에서는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사람들이 죄다 어딜 갔나 했더니 도서관에 다 있네, 싶었다. 커피 마시면서 여유를 부리겠다는 생각은 금세 포기했다. 일본까지 와서 그것도 규슈올레를 걸으면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셔야 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도서관은 꼭 한 번쯤은 들러볼만한 곳이었다. 우리나라 도서관과는 전혀 다른 내부공간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하루쯤 여유를 부리면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사진촬영은 금지돼 있단다. 아쉬워라.
다케오시 도서관은 규슈올레 코스에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올레 코스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3000년 이상 됐다는 츠카하시 녹나무를 보러 갔다. 이 나무는 조금 전에 보고온 다케오 녹나무와 모양이 달랐지만, 품어져 나오는 포스는 더 강했다.
거대한 나무는 죽은 듯했지만 살아 있었다. 나무의 아랫부분은 텅 비어 너른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무의 윗부분은 잘라져 나갔지만 한쪽에서 뻗은 나뭇가지가 거대한 나무기둥이 돼 생명을 보존하고 있었다. 두꺼운 나무껍질은 튼튼하고 질긴 가죽처럼 보였다. 이런 형태의 나무는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나무였다. 다케오시에서 지정한 천연기념물이라는 표지판이 나무 가까이에 세워져 있었다.
올레 리본은 우리를 다시 주택가로 인도했다가 산길로 이끌었다. 사쿠라야마 공원이었다. 산길에는 이끼가 낀 돌부처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돌부처들은 죄다 붉은 앞치마를 둘렀는데, 붉은 빛이 아주 선명했다.
알고 보니 사람들이 와서 빛바랜 앞치마를 새것으로 바꿔주고 있었다. 부처님에게 붉은 앞치마를 불심을 담아 공양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앞치마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산길을 오가는 이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눈 여겨 보니 어떤 앞치마에는 이름이 쓰여 있기도 했다. 공양하는 이의 이름을 써넣은 것이다.
다케오 온천 안내소가 규슈올레 다케오 코스가 끝나는 도착점이다. 이곳은 온천에 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가 온천의 상장이라는 누문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40분께.
소요 예상시간이 4시간이라는 다케오 코스를 우리는 6시간 40여 분이나 걸려 걸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너무 천천히 걸었나? 그 때문인지 걸었던 규슈올레 가운데 여운이 가장 길게 남는 길이기도 했다, 다케오 코스는.
2014년까지 12개 코스였던 규슈올레는 올해 3개 코스가 더 생겨 전부 15개가 된다. 규슈올레 3개 코스를 걸었더니 15개 코스를 전부 걷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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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슈올레 다케오 코스 출발지인 다케오온센역에서 김운용 고양시 녹지과장과 정창식·최한범 주무관이 출발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 ⓒ 유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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