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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군이 쉬는 틈을 타 자전거를 탔다. 서울 남산 순환도로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들른 곳이 남대문 시장이다. 칼국수, 보리 비빔밥, 왕만두 등 남대문 시장 별미 먹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남대문 시장을 구경하다가 가까운 회현역 옆 지하로 연결된 특별한 시장이 눈길을 끌었다.

보통 '회현 지하상가'라고 부르는데 입구에 써 있는 공식이름은 '회현 지하쇼핑센터'다. 남대문 시장에서 을지로, 명동까지 지하로 길게 연결되어 있다. 지하도 입구로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빈티지 지하 여행'을 할 수 있다.

달러 골목에서 음악 상가로

명동과 남대문 시장을 잇는 특별한 지하세계.
 명동과 남대문 시장을 잇는 특별한 지하세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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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 지하상가는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 비교적 한가하다. 또, 지하에 있다 보니 한겨울 매서운 한파, 여름날 폭염과 장마에도 부담없이 다닐 수 있다. 온갖 먹거리를 파는 시장과 상점들이 가깝고 지하상가엔 화장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표, 옛날 돈을 사고파는 가게의 주인 아저씨는 최첨단 공기정화시설이 24시간 돌아가고 있어서 공기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한다. 더불어 이 지하상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1960년대 중반 남대문 시장과 명동 주변에 불법 환전 상인이 영업했던 속칭 '달러 골목'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달러 골목으로 흘러나온 LP(long playing record) 음반들을 수집한 사람들이 이 골목에서 장사를 했다. 1977년 회현 지하도로가 생긴 뒤 1979년부터 이곳 회현 지하상가로 상인들이 내려와 음악 상가를 이루게 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바로 위 지상에 있는 한국은행과 서울중앙우체국의 영향으로 우표 및 기념화폐 수집점포가 이어서 생겨났다.

회현 지하상가는 그후 중고 오디오, 카메라, 역사 자료 등 수집·판매하는 가게가 추가로 자리 잡으며 마니아, 수집가라면 반드시 한 번쯤 들러야 할 명소가 됐다. 특히 중고LP·오디오 가게는 전국 100여 개 점포 중 15개 점포가 회현 지하상가에서 영업 중일 정도로 회현 지하상가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2009년 회현 고가차도가 철거되고 지상에 횡단보도가 생겨나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다고 하니, 횡단보도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류의 영향으로 외국 손님들 북적이는 지상 상점들과 달리 이곳은 도심 속 시간이 멈춘 섬 같은 곳이 되고 말았다.

수집가, 마니아들의 지하 보물섬

반세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고 LP가게.
 반세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고 LP가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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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 짜리 지폐,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500원 짜리 지폐,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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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LP, 우표, 오디오, 수동 카메라 등을 구경하며 지나가다 보면 도시에서 바삐 사느라 잊었던 추억과 감성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디즈니사에서 나온 이채로운 만화우표, 88올림픽 때 발행된 기념주화, 위인전에서 봤던 인물들이 나오는 외국의 옛 화폐, 세계 여러 나라의 희귀 주화, 독특한 엽서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 유명해진 아프리카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 산다는 희귀 동물들 사진이 담긴 엽서는 아름답고 생생해 몇 장 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동전인 500원짜리 지폐가 보여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화폐 가게 아저씨는 초기 우리나라의 화폐제작 기술이 부족해 영국 회사에 만 원권과 오천 원권의 초상화는 영국 회사에 의뢰해서 만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영국 회사가 그린 세종대왕과 율곡 이이 선생의 모습이 서양인과 비슷하다는 논란이 일었고, 500원 권의 이순신 장군부터는 국내 자체 기술로 표준 영정을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화폐와 우표를 파는 것뿐만 아니라 매입하기도 한다고 하니, 우표나 주화·화폐를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겠다.

워낙 새것, 신상을 좋아하는 나라다 보니 어느새 사라져 버린 LP음반은 회현 지하상가의 대표 상품이다. 상가 밖에까지 수많은 LP들을 내놓은 음반가게는 명동에서 30년, 회현 지하상가에서 20년간 대를 이어 50년째 LP 음반장사를 하고 있는 가게라고 해서 놀랐다. 5만장의 LP를 진열해 놓은 이 가게 말고 창고에 30만 장의 LP가 있다니 반세기를 이어가는 LP가게답다. 회현 지하상가는 국내에서 중고 LP가 가장 많은 사고 팔리는 곳이란다.

10년 전 사라졌던 LP의 부활

들어보고 싶고 소장하고픈 LP음반들이 많다.
 들어보고 싶고 소장하고픈 LP음반들이 많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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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LP가게를 구경하다가 015B(공일오비), 김광석, 스팅 등 나도 소장하고픈 국내외 명반들이 진열돼 있어 반가웠다. 어느 가게에선 맘에 드는 LP가 있다면, 가게 안에 있는 턴테이블로 들어볼 수 있어 좋았다. 산울림 밴드 김창완 아저씨의 LP가 눈에 띄어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감상을 했다. LP음반이 천천히 둥글게 돌아가면서 디지털 음원으로 느낄 수 없었던 아날로그만의 감성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안녕 내 작은 사랑아
멀리 별들이 빛나면
네가 얘기하렴 아무도 모르게
울면서 멀리멀리 갔다고

가수 김창완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추모곡으로 불러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한 노래 <안녕(1987)>. LP로 들어서 그런지 김창완 아저씨 특유의 담담한 노랫소리가 더욱 절절하게 들려왔다. 

LP는 음폭이 커서 그런지 음색이 푸근하고 풍성한 게 무척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턴테이블 바늘이 LP판 골을 긁는 특유의 잡음이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 CD가 보편화된 세상에 LP를 애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을 만했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가왕 조용필, 지드래곤, 아이유, 장기하 등 여러 가수들이 LP앨범을 제작 발매하는 보기 드문 일이 생겼다. 이런 이례적인 '사건'에 힘입어 10년 전 서라벌 레코드가 문을 닫은 이후 처음으로 경기도 김포에 LP를 제작하는 공장이 생겼다고.

LP가 발명된 건 불과 70여 년 전이다. 녹음 시간의 한계로 여겼던 마의 3분대를 넘어설 수 있는 저장 장치가 탄생한 것. 음악 대중화에 한 획을 그은 발명이었다. 하지만 CD를 지나 MP3 시대에 이른 지금 LP는 구식 장치요, 음악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LP의 생산이 공식적으로 중단되면서 음원 저장 장치로서 그 용도를 상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끊임없이 거래되고 사람들이 찾는다.

클래스가 느껴지는 컬렉션의 세계

클래스가 느껴지는 수십 년된 수동 카메라, 아직도 작동이 잘 된다고.
 클래스가 느껴지는 수십 년된 수동 카메라, 아직도 작동이 잘 된다고.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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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의 추억이 담겼을 옛 카메라도 빠질 수 없다. 한 눈에 봐도 사진가의 애정 어린 손길과 클래스가 느껴지는 오래된 수동 카메라, 필름 카메라. 국적도 다양해 마치 카메라 박물관에 온 듯했다. 카메라 수집가인 가게 아저씨가 관리를 잘 해서 수십 년이 지난 오래된 카메라지만, 아직도 셔터가 작동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단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카메라를 처음 만졌던 것이 수동 필름 카메라였고, 동네에 사진을 인화해 주던 사진관이 흔히 있었다. 필름 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다양한 구도를 상상하고 정성 들여 찍곤 했던 필름 카메라. 무한대로 마음껏 찍을 수 있는 편리한 '디카'에 빠져 잊고 살았던 투박한 내 첫 사진기 올림푸스 수동 카메라가 망각위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진이 현상되기까지 마음 설레며 기다렸던 기억도 함께.

사진과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겠다. 조선시대 백자에서 여러 도자기, 고려시대의 청자 등을 파는 어느 가게는 미술관에 들어가 예술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눈길을 끈 가게 이름 '유진 컬렉션'은 백발이 성성한 주인장 아저씨의 오랜 노력과 수집가로서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내 인생의 '컬렉션'은 무엇이 될까 문득 생각해보게 했다. 젊은 층에게는 새롭고, 중장년층에겐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끼게 하는 회현 지하상가. 희귀하고 개성 있는 물건들을 쓰고 소장하기 좋아하는 마니아 혹은 '오타쿠족'의 천국이 아닐까 싶다.

'통기타 든 소녀' 아이유, <무한도전>의 '토토가' 등에서 보듯 복고(復古)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가 괴로우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남대문 시장이나 명동에 가게 되면 회현 지하상가에 꼭 가게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ㅇ 지난 1월 10일에 다녀왔습니다.
ㅇ 위치 : 수도권 전철 4호선 회현역 7번 출구, 명동역 5번 출구 도보 10분



태그:#회현지하상가, #회현지하쇼핑센터, #LP, #수동 필름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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