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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도로 가는 여객선 선실. "목포에 사는 딸내미한테 다녀오는 길"이라는 할머니 한 분이 선실 우리창 너머를 한참을 바라보고 계셨다. |
ⓒ 이주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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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텅거리는 연안여객선에는 트럭 여섯 대와 스무 명도 되지 않은 여객이 전부였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사람들은 선실에 누워 이내 짧은 잠에 들었고, 동네 마실 돌 듯 여객선이 몇 개의 섬을 경유할 때마다 차도 줄어들고 사람도 줄어들었다.
같은 항로를 타고 섬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덤덤했다. 그리고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헤어질 때의 인사도 간단했다. 이제 선실엔 할머니 한 분과 나만 남았다. 할머니는 선실 유리창 너머로 어딘가를 하냥 바라봤다. 그게 평생 당신을 이골이 나게 만든 바다인지 그나마 돌아가 누울 집이 있는 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목포 사는 딸내미한테 갔다오는 길"이라고 했다. 바다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몇 번 누르자 할머니는 "뭐 볼게 있다고 사진은 찍냐"라며 살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디지털 카메라에 담긴 모양들은 하나같이 뭐 볼 게 없었다. 할머니가 먼저 배에서 내리자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모두 삭제해버렸다.
압해도 송공항에서 출발한 배는 두 시간 남짓이 걸려 선도에 도착했다. 섬의 생김새가 매미 같다해 '선도(蟬島)'란다. 선도에는 나 혼자 내렸다. 선도는 다섯 동네에 주민 160여 명이 살고 있다. 지도읍 선도출장소가 행정 편의를 돕고 있고 이장 네 명이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농한기철에 물때도 안 맞아서 돔 낚시를 온다는 낚시꾼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털레털레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송공항에서 선도로 오는 시간과 얼추 비슷했다.
"운명이라는 운명"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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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도 선착장 옆에 있는 모래밭. 화장하지 않은 삶처럼 투박한 모습이 이곳을 더욱 운치있게 한다. |
ⓒ 이주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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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남아있는 선도 최초의 정착민은 선조 21년(1588)경에 지도에서 이주해온 순흥 안씨 성을 가진 이다. 그는 무슨 까닭으로 뭍에서 더욱 멀어지려 했던 것일까. 목포에서 북서쪽으로 51㎞, 그가 더 멀리 떠나고 싶었던 아픔이나 슬픔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선도 주민들은 주로 낙지를 잡거나 양파와 마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한겨울 마늘밭이 초봄 보리밭처럼 푸르다. 부지런한 섬농부는 밭고랑에 맬 김 한 가닥 남기지 않았다. 수만 번 허리를 구부렸다 폈을 노동의 징표다.
선착장 오른쪽으로 슬쩍 비껴가면 모래밭이 나온다. 모래는 백사(白沙)라기 보다는 황사(黃砂)에 가깝다. 풍화로 스러져 내리는 황토밭을 끼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입자도 곱지는 않다. 하지만 묘한 운치가 있다. 꾸미지 않은 인생 같다고 할까.
박씨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막배를 기다리는 선착장에서였다. 1970년에 군대를 가려고 선도를 떠난 3년 말고는 한 번도 선도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70년 가까이 선도에 살고 있지만 도회지 사는 것이 부럽다거나 섬살이가 신물 난 적은 없었으니 팔자라면 팔자고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나의 운명은 무엇일까. 신물 나지 않게 살 수 있는 나의 팔자는 무엇일까. 작은 스침에도 온 몸이 흔들려 자꾸 쓰러지고 마는 유약한 심신으로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저어기 연안의 섬들 사이로 막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기다리니 돌아보게 된다 아주 잠깐 전 스친 바람조차매번 유려하진 않았다어느 날은 미친 사자가 되어 나를 벼랑 끝에 몰아세웠고어떤 날엔 묘한 향기로 춤추게 했다돌아보니 다시 기다리게 된다언제나 지금이었던 어제거나 내일시간은 한 번도 미래형인 적 없었다어느 날인가는 나를 그 섬에 버려두고 왔고어떤 날엔 유채꽃에 취해 바다를 뛰게 하였다물끄러미 넘기는 시선 끝으로저벅저벅 늙은 배 한 척 걸어온다아 거기 또 뉘 실려 오는가여기 떠나지 못해 안달하는 세월 속으로.- <막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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