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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란다. 좋은 직장을 갖기를 바라고, 평생 식지 않는 사랑을 바라고,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고, 심지어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는 우리의 잠재된 바람이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감사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별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인간이란 내일을 꿈꿀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들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들

나는 이 커다란 가르침을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나의 할아버지 고(故) 김창석씨는 시인이자 번역가였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나는 할아버지가 있는 요양원에 찾아갔다.

그 날 할아버지는 치매로 인해 온전하지 않은 정신으로도 자신이 지어준 내 이름 '여실(如實)'의 의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번역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야기를 할 때면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동자가 빛났다.

 할아버지가 번역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표지
할아버지가 번역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표지 ⓒ 국일미디어
할아버지의 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잡은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입으로는 많은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꽉 잡은 두 손으로 자신은 아직도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행복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때로는 책에서 그 답을 얻을까 싶어 무작정 독서를 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의 작품들도 읽었지만 어떤 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답을 책 속에서 찾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난 이미 그때부터 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닌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내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고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터득해갔다. 그러자 잊고 있던 꿈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아름다운 열정들이 샘솟기 시작했다.

나는 작년 한 해 영어공부를 하고자 뉴욕의 한 친구(Brian Miller, 작가)와 꾸준히 펜팔 메일을 주고 받았다. 브라이언(Brian)은 현재 한국의 1970년대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이다. 브라이언과 대화하며 서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대답했고, 나는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한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라고 알려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소설이기에 이같은 사실이 엄청난 우연(偶然)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난 그를 통해 인연(因緣)의 진귀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는 할아버지의 세계를 열렬히 꿈꾸고자 했던 내게 누군가가 보내준 선물이 아닐까 싶었다.

내게 일어난 기적

그렇게 할아버지의 세상, 나의 의미, 삶의 의미 등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기적이 일어났다. 브라이언이 뉴욕의 '루미나(Lumina)'라는 문학잡지에서 새로운 번역 작품을 찾고 있는데 할아버지의 시를 직접 번역해서 출품해보는 것이 어떻냐는 것이었다. 결국 지난 1일, 그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의 시와 번역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나의 이름이 바다 건너 미국 뉴욕의 '루미나'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기적과도 같은 2015년의 시작이었다.

중용 23장의 한 구절처럼 오직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하였고 귀찮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결코 변하지 않되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다보니 선물처럼 기회가 주어졌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꿈을 꾸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만날 사람들과 맞이할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누구고 무엇인지 알 수 없음에도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것이 또한 할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도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꿈을 간직한 자는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도 두려움이 아닌 반가움으로 내일을 맞이한다. 이것이 할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름다운 깨달음의 선물이다. 2015년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꿈꿀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김창석#행복#LUMINA#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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