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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해를 맞이하며

구미초등학교 2학년 때(1953년)
 구미초등학교 2학년 때(1953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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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맞이하는 새해이건만 나의 올해 감회는 다르다. 나는 해방둥이로 금년 꼭 7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1945년 11월 6일(음력)에 경북 선산군 구미면 원평동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내 호적과 주민등록상에는 1946년으로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여러 얘기가 있다. 그 하나는 젖먹이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출생 신고가 늦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그 둘은 해방 직후 혼란기이기에 미처 출생신고를 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고, 그 셋은 6·25전쟁 때 B-29 폭격기의 융단 폭격으로 내 고향 구미 면사무소가 홀딱 불에 타버려 호적을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정확한 사유를 잘 모른 채 살아왔다.

나는 출생부터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맞물렸다. 1944년 여름방학 때 일본의 한 중학교 졸업반인 아버지가 귀국하자 곧 할아버지가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어머니는 이웃 금릉군 어모면 처녀로 신랑과 동갑인 18세였다.

그 무렵은 태평양 전쟁 절정기로 곧 학병으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우려로 할아버지는 2대 독자인 아버지에게 씨라도 남겨두고 가라고 결혼을 서둘렀다. 또 외가에서는 외할아버지가 막내딸이 정신대로 끌려 나갈까 노심초사 중, 사돈 간에 서로 이해가 맞아 맞선조차 보지도 않고, 아버지 귀국 일주일 만에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결혼하자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당신 고향인 선산군 도개면의 한 마을에 피신시켰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서 주임에게 발각이 되어 전시에 젊은이가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도개 보통학교 임시 교사로 근무하게 했다. 그러다 아버지는 도개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해방을 맞았는데, 고향 후배들에게 일본말을 하지 않는다고 매를 들지 않아 친일 교사로 몰려 배척당하지 않고 오히려 무동을 타셨다는데, 그때 받은 감동으로 평생 민족주의자가 되셨다.

집안이 기울다

해방 후 곧 당신의 모교인 구미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는 봉급을 돈으로 주지 않고 쌀로 받았다는데, 득남 기념으로 쌀 한 가마니를 더 받았다는 얘기를 나는 할머니에게 여러 번 들었다.

내가 첫 돌도 되기 전에 대구 경북 일대에 10·1 항쟁이 소용돌이쳤는데 아버지는 그 항쟁에 연루, 교사직 사표를 내는 조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났다. 아버지는 분단된 나라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고 제3국으로 간다며 부산에 내려간 것이 그만 부산에서 정착케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들 따라 며느리는 신접살림을 내보냈지만 손자는 당신이 키운다고 두고 가게 하여 그때부터 나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 품에서 자랐는데 이불 속에서 여러 번 들은 얘기가 10·1 항쟁 때 신문사 지국장 박 아무개가 충청도에서 내려온 경찰 총에 맞아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형곡동 가는 고개 옆 공동묘지로 갔다는 얘기와, 도개 마을의 한 여인이 자그마한 신랑한테 소박맞은 얘기, 그 여인의 기구한 인생역정을 들려줬다.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서 빤히 바라보이는 금오산을 보시며 산세가 좋다고 저 산기슭에서 인물이 날 거라고 너새니얼 호손의 '큰바위 얼굴'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도 안 돼 집안이 기울었다. 가장 큰 까닭은 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 때문이었다. 그것도 경상도 감자바위라는 선산에서 야당인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했기에 낙선이었다.

그 무렵 밥술이나 먹는 집 아이들은 중학교를 대부분 대구나 김천으로 갔지만, 나는 고향 구미 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고교는 서울로 진학케 되었다. 하지만 고1때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여파로 나는 학교를 한 해 쉬는 아픔을 겪었다. 고교 시절 첫 시간부터 국어 선생님에게 발탁되어 교내에서 조금은 글로 이름을 날렸고, 선생님과 어머니의 권유로 학교 선생님이 되고자 국립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응시했으나 실력 부족으로 낙방해 할 수 없이 고교에 이어 대학도 후기대(전기와 후기로 나뉜 입학시험에서, 후기에 시험을 치러 입학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교사가 되다

중동고등학교 시절(1964년)
 중동고등학교 시절(1964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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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재학 중에 군대 문제로 고민하다가 병으로 가면 매 맞고 집에 돈을 가져다 써야 된다고 하여, 그럴 집안 형편이 되지 않아 학군단에 지원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 후 꼭 교단에 선다고 교직 과목을 이수했다.

졸업과 동시 임관 후 광주 보병 학교에서 기초 과정을 16주 이수 받고 전방 보병 사단의 말단 소총 소대장으로 2년여 근무했다. 전역을 하자마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소위 한 끗발 있다는 고향 후배가 당시 중진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추천하는 걸,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창피하게 따가리 노릇은 하지 않는다고 귀를 씻었다.

일찍부터 문단의 문을 두드렸으나 실력 부족으로 낙방의 고배를 숱하게 마시다가 1992년 48세의 나이로 문단 말석에 겨우 고개를 내밀었다. 호기 좋게 대뜸 장편 소설을 펴냈지만, 내 정성과 실력 부족으로 베스트셀러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들려주려고 펴낸 책 <아버지는 언제나 너희들 편이다>가 천만 뜻밖에 반응이 좋았다.

이 책을 보신 어느 변호사가 그 자리에서 3백 권을 사줄 뿐 아니라, 중국 대륙의 항일 유적지 답사를 권했다. 그러면서 모든 비용을 다 후원해 주셔서 귀한 독립운동가 후손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 선생과 김중생(일송 김동삼 손자) 선생의 알뜰한 안내를 받으며 중국 대륙을 누볐다.

나는 그 길에서 내 고향 출신의 한 파르티잔(허형식 장군)을 만나 그 이듬해 나 혼자 북만주를 헤매었고, 그 일로 당시 대한매일신문 특집부 차장인 까칠한 정운현 기자를 만났다. 나는 그분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았는데도 내 책 소개를 박스 기사로 실어주고, 나중에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인도해 주었다. 

소총소대장 시절(1969년)
 소총소대장 시절(1969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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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꿈

사실 나는 고교 시절 세 가지 꿈을 지녔는데, 교사·작가·기자가 되고 싶었다. 아무튼 교사와 작가 두 가지 꿈은 이뤘지만, 마지막 기자의 꿈은 실력도 되지도 않거니와 교직과 병행할 수 없어 일찍 포기했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 시민기자가 되어 이제까지 원 없이 기사를 썼다.

나는 고교 시절 경향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 신문배달원이었는데, 신문발행이 늦는 날은 광화문 본사로 가서 막 쏟아지는 뜨끈뜨끈한 신문뭉치를 어깨에 메고 보급소로 가서 그걸 나눠 갖고 배달 구역으로 뛰어갔다. 내가 3년 동안 배달한 구역은 서울 북촌의 가회동·계동·원서동·안국동, 그리고 서촌의 사직동·누하동 등지의 한옥이 많은 동네였다.

이대부고 교사시절(1984년)
 이대부고 교사시절(1984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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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이래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200여 꼭지의 기사를 넘게 쓴 것 같다. 이즈음 내 방 기사 통계 630은 새로 복직된 이후 것이다. 나는 한때 창작에만 전념한다고 시건방지게 탈퇴했다가 몇 골수 팬의 간곡한 권유로 슬그머니 복직했다.

나는 그동안 오마이뉴스의 매 기사를 쓸 때마다 프로 야구 마무리 투수처럼 전력 투구했다. 그 가운데 겁 없이 쓴 기사도 꽤 있다. 2004년 2월 6일자 "워싱턴 D.C 백악관 앞에서"라는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나는 오마이뉴스 누리꾼들의 성금으로 권중희 선생님과 백범 선생 암살배후 진상을 규명하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갔다. 그런데 그곳 아키비스트가 중요문서는 미국 국무성이나 CIA 등에서 이미 97~98% 수거했다고 하기에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자 사전답사를 갔다가 돌아온 뒤 그날 밤에 쓴 기사였다. 아래는 기사의 일부다.

워싱턴은 미 합중국의 수도답게 도시 계획이 잘되고 고풍이 깃든 도시였다. 하지만 백악관 언저리는 경계가 삼엄하여 정·사복 경찰이 길을 메웠고 상공에는 헬기가 계속 돌고 있었다.

자유와 평화의 상징 백악관이 이제는 테러의 표적으로 전전긍긍하는 것은, 마치 남의 곳간 양식을 노리다가 내 곳간의 금은보화를 잃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 같아 한국의 한 무명작가가 미국 지도자에게 정문일침을 가한다.

진정한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한다면 남의 주권도 존중해 달라. 당신 나라의 한 주보다 작은 한반도를 '결자해지' 곧 묶은 자가 풀어주듯이, 이제는 지구 상의 하나뿐인 한반도의 분단을 풀어주는 게 정녕 대국다운 아량이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이 아닐까.

지나가는 나그네가 무심코 장난삼아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치명상을 입듯이, 강대국들이 자기네 맘대로 그어 놓은 삼팔선, 휴전선 때문에 우리 겨레는 그동안 얼마나 서로 반목, 시기, 갈등, 저주의 나날을 보냈던가. 피를 나눈 형제끼리 한 하늘을 서로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로 살지 않았나?

왜 우리 한반도가 분단되어야 하나? 우리는 전쟁을 일으킨 적도, 패전국도 아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돼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되었는데도 여태 분단의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우리 겨레는 정말 억울하다. -기사 중에서

오마이뉴 시민기자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고에 들어가다(왼쪽 권중희 선생, 오른쪽 필자 2004년 2월)
 오마이뉴 시민기자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고에 들어가다(왼쪽 권중희 선생, 오른쪽 필자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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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작가회의 때 북녘 조선작가동맹 김병훈 위원장(왼쪽)과 버스에 나란히 앉아가다(2005. 7.).
 남북작가회의 때 북녘 조선작가동맹 김병훈 위원장(왼쪽)과 버스에 나란히 앉아가다(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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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내 이야기보따리를 모두 다 풀려면 장편소설 두 권 이상은 써야 할 것 같다. 이제 이즈음에서 마무리해야겠다. 나는 이즈음 프랑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즐겨 듣는다. 그는 가창력도 좋을뿐더러 그 노랫말이 내 삶의 일부를 말해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나는 바쁘게 살아왔지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모든 고속도로를 다 달리면서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더 중요한 건
I did it my way
난 이걸 내 방식으로 해왔다는 거야.

Regrets, I've had a few
후회, 하기야 했지만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하지만, 말할 거리가 있을 만큼 후회한 건 없어
I did what I had to do
나는 할 일만을 했고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그리고 있는 그대로만을 지켜봐왔어.
I planned each charted course
나는 정석만을 따랐고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서 걸어왔고
Oh,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I did it my way
난 그걸 내 방식대로 해왔다는 거야.

-'My Way' 중에서

그동안 내가 펴낸 책들
 그동안 내가 펴낸 책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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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단에서 꼭 32년 8개월을 보내고 정년을 5년 남긴 채 떠났다. 그동안 작품집을 30여  권 펴냈다. 고희를 맞는 올해는 3권 정도 펴낼 생각이다. 그리고 현재 연재하고 있는 '들꽃'이 끝나면 분단과 통일 문제를 다루는, 이미 써둔 미발표 장편소설을 새로 가다듬어 선을 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건강이 허용한다면 어렸을 적 이불속에서 할머니에게 들은 어떤 형제의 이야기를 써볼 생각이다. 가제는 이미 정해 놓았다. '형의 길, 아우의 길'로. 어쩌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교단에서 꼭 32년 8개월을 보내고 정년을 5년 남긴 채 떠났다. 누군가 나에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과찬을 하는데, 사실 나는 못난이로 실력도 없고 계속 실패만 했다. 나는 고교도 대학도 모두 전기에 떨어져 후기를 다녔고, 작가가 되고자 신춘문예 공모에도 아마 스무 번은 떨어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좋은 스승님을 만났다. 고교시절 박철규, 김영배, 홍준수 선생님, 대학시절 조지훈, 정한숙 선생님, 그리고 뒤늦게 만난 이오덕 선생님, 늘그막에 만난 염무웅 선생님... 그 어른 덕분에 교사로, 작가로, 기자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내 글샘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실패를 통하여 겸손을 배웠으며, 사물을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태그:#희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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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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