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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사업아이템들 내어보세요."

2005년 한 소규모 프랜차이즈 회사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평범한 디자인 업무로 시작한 그 회사는 우연히 체인사업을 하게 되면서 전국에 가맹점이 1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경쟁사가 늘어나게 되고 업체끼리의 무분별한 가격 경쟁으로 향후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다른 분야로의 프랜차이즈 사업 확장이었다.

여러 아이템 중 당시 회사 상황을 고려해 생선을 이용한 요식업을 하자고 결정이 났다. 디자인이 주업인 회사였기에 음식의 맛은 평균 수준이상만 되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일사천리로 회사는 새로운 요리사를 모집했고 사옥 1층에 본사에서 직영으로 운영할 아담한 식당도 마련했다.

요리사는 조리실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주 메뉴 개발에 주력했다.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시장에 가서 직접 선별하고 메뉴로 만들기까지 전 과정은 조리실장의 몫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메뉴는 직원들의 점심식사로 제공됐고 자연스럽게 맛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너무 맛있어요. 이 음식은 바로 판매해도 되겠어요."

직원들의 찬사는 조리실장의 일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질렀고 옆에서 보기에도 무척이나 열심이었다. 비록 혼자뿐인 신규부서의 실장이지만 새벽부터 전 직원이 퇴근한 밤늦게까지 그는 일을 놓을 줄 몰랐다. 그러던 며칠 후 사원들의 공식적인 메뉴 시식 자리.

"이 메뉴는 맛이 좀 ○○한 거 같아요. 어떠세요?"

사장의 다소 부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이 한마디가 끝나자 얼마 전까지 '맛있다', '바로 판매해도 되겠다'라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부정적 의견과 함께 비난을 쏟아냈다.

"신입이라서 안 되고, 계약직이라서 안 되는 드라마 <미생>"

장그래(임시완 분)는 사업계획서 결재에 통과했지만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담당자를 바꿔야만 했다.
 장그래(임시완 분)는 사업계획서 결재에 통과했지만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담당자를 바꿔야만 했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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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드라마 <미생> 16회에서 장그래(임시완 분)는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사업계획서 결재에 성공했다. 하지만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담당자를 바꿔야만 했다. 안영이(강소라 분) 역시 한 달간 밤을 꼬박새면서 완성한 사업계획서가 결재에 성공했지만 상사의 승진 욕심에 밀려 가로막히는 모습이 방영됐다. 한 사람은 계약직이라서 새로운 사업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한사람은 승진에 눈먼 상사의 희생양이 됐다.

자신의 사내 입지를 위해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타인의 공을 빼앗는 것. 드라마 <미생>에서는 대기업 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신입사원을 경계하고 시기한다. 더 높은 직책을 위해, 더 인정받기 위해 그들은 다른 사람의 노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랬다. 조리실장의 음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회사의 신규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그들은 사장이 맛있다면 맛있는 것이고, 맛없다면 그들도 맛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은 회사에서 절대적 권력인 사장의 눈에 들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마치 대기업의 임원진처럼.
   
"일 하고 싶어도 못하게 막는 드라마,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안영이(강소라 분) 역시 사업계획서 결재에 성공했지만 상사의 승진 욕심에 밀려 가로막힌다. 승진에 눈먼 상사의 희생양이다.
 안영이(강소라 분) 역시 사업계획서 결재에 성공했지만 상사의 승진 욕심에 밀려 가로막힌다. 승진에 눈먼 상사의 희생양이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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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야 종사자 중 인터넷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의 인지도가 있었던 정보사이트를 운영했었던 나는 사장의 계속된 입사 권유로 이 회사에 들어왔다. 때문에 나에 대한 회사의 대우는 제법 좋았다.

하지만 내가 들어오면서 신생된 인터넷 팀의 사업들도 조리실장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변덕스런 입맛과 줏대 없는 의견들 때문에 수개월이 흘렀지만 사업화하지 못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 팀에는 직원들의 '딴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앞선 조리실장의 경우는 식당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혼자 업무를 봤기 때문에 사무실 직원들과 만나는 시간이 드물었다. 그랬기에 소위말해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규 사업을 핑계로 한 사람을 흠집 내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에는 더 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딱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을 짓밟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섬유팀의 성 대리처럼.

하지만 주관적 평가로 음식의 <맛>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인터넷 팀의 일에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에는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 하시려는 일 하나도 못 하실 거예요."

사장보다도 나이가 한참이나 많으면서 이 회사에 가장 오래 근무하고 있는 현장 소장님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한 말이다. 내가 사업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호칭을 항상 높였다.

"사장님이 팀장님한테 날개를 달아 줄 거라 생각하세요?"

이 무슨 회귀한 말이란 말인가. 날개는 또 뭐고. 끝까지 듣고 보니 소장님 말인 즉은, 인터넷정보사이트를 운영했던 내가 이 분야에서, 그것도 이 회사에서, 다시 유사한 사업을 해서 잘 됐을 경우를 염려하는 것이란다.

"지금도 회사 직원들이 부서를 막론하고 퇴근 후 팀장님 위주로 모이는데 그 사업이 잘 되 보세요."

기가 막혔다. 사업이 잘 되면 회사가 좋고 결국 사장이 좋은 것 아닌가. 그리고 나는 단지 힘들게 고생한 현장 직원들에게 팀장으로서, 또 사무실에서만 일하는 게 미안해서 술을 자주 산 것뿐이었다. 술자리에서 회사 불평을 하는 직원들에게는 작은 사업이지만 먼저 해 본 사람으로서 회사 입장을 늘 대변했거늘.

"그만두기라고 하는 날에는 이 회사에서 그 사업 누가해요. 나가서 다시 회사 차릴지도 모르고..."

쩝,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쇠망치로. 그럼 왜 나를 이 회사에 둔단 말인가. 급여도 사장 다음으로 많았는데. 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만두는 걸 우려한단 말인가. 그럼 모든 회사가 다 사장이 할 줄 아는 일만 신규 사업으로 한단 말인가. 무척이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후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회의석상 등에서 인터넷 팀의 업무추진을 독촉했다. 나의 언성은 높아졌고 사장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소원해졌다. 인터넷 팀의 업무는 여전히 미루기의 연장선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무척이나 후회하는 처사였지만 회사의 의도를 알고 나서 나는 여러모로 삐딱하게 행동했다. 일례로 출근시간보다 꼭 5분에서 10분 늦게 출근했다. 출퇴근 카드를 통해 상황을 월마다 결산해서 패널티를 주는데 따른 반항이었다. 현장 직원들은 가맹점 오픈 날짜를 맞추기 위해 몇 시간씩 늦게 퇴근해도 시간 외 수당 한 푼 안주면서, 몇 분 늦었다고 급여에서 (소위말해)까는 것에 대한 나의 저항방식이었다.

이렇다 보니 나 역시 회사 생활에 의욕을 잃어갔다. 잘 나가던 내 사업도 사람을 잘 못 만나면서 사기 비슷한 일로 접어야 했다. 그래서 처음 입사하기로 할 때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전제가 됐었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한 3개월 후, 나는 그 회사를 나왔다.

내가 나올 때까지도 버티고 있던 조리실장은 몇 개월 후 결국 그만뒀고, 직영점을 하려했던 식당은 임대를 내면서 신규 사업은 무산됐다. 그리고 그 회사 역시 1~2년을 더 버티다가 결국 부도났다. 

tvN드라마 <미생>을 통해 대기업에 들어가 본적도 없고, 직장 생활도 길게 해 본적도 없지만 일을 하고자 함에도 '자사 이기주의'와 '개인 이기주의' 에 가로막혀 출발부터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체감하는 모습을 봤다. 얼마되지 않는 직장 생활이었지만 그때가 떠올라 이렇게 추억해 본다.


태그:#미생,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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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가야할 곳을 현실이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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