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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은 얼은 무밭
 1/3은 얼은 무밭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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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거 받아."
"어? 이게 웬 돈인데?"
"주말농장에서 무 하고 배추 팔았어."

7만 원을 내놓는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보겠네. 진짜 주말농장에서 농사지은 것을 판 거야? 그것도 7만 원어치나? 누가 사갔을까 정말 궁금하네."

"아까 밭에서 따로 담은 것을 팔은 거야"라며 남편이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아~, 그랬구나.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을 했어야지."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지난 15일 동생네가 김장을 한다기에 무를 뽑으러 갔다. 그 집은 작년부터 절임배추를 사서 김장을 하니 배추는 필요하지 않아 무와 파·갓 등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 동생부부가 와서 나도 따라 나섰다. 남편은 일찌감치 밭에 가 있었고.

요즘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우리도 무를 뽑아다 놓기로 했다. 남편은 "아마 무가 많이 얼었을 거야"란다. 나는 "아무리 비닐도 덮어 놓았는데 얼었을까?"라고 답했다. 하지만 밭에 와보니 서리가 하얗게 앉았고, 남편이 덮어놨다는 비닐의 1/3은 날아가버렸다.

며칠 전 날씨가 영하로 내려간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남편이 비닐 등을 덮어놨지만, 바람 때문에 비닐이 날아간 곳의 무는 많이 얼어 있었다. 반면 비닐이 잘 덮여있는 곳은 멀쩡했다. 얇은 비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무·배추를 따로 담는 남편

아주 싱싱한 배추 밭
 아주 싱싱한 배추 밭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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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배추는 덮어놓지 않았는데도 싱싱한 그대로 잘 있었다. 배추는 무보다 추위에 더 강하다고 한다.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무는 땅위로 얼굴을 내밀고 수분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닐는지.

얼어버린 무는 잘라서 버리고 얼지 않은 부분은 깍두기로 담가 먹으려고 갖고 왔다. 그냥 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내가 지은 농사는 아니지만 남편이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은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젠 진짜 농사꾼 아내가 되고 있나 보다.

동생네가 가지고 갈 무와 갓 파 등을 뽑은 뒤 남편이 무와 배추를 따로 주섬주섬 담는다.

"그건 왜 따로 담는데?"
"응, 이거 누구 좀 갖다 주려고."
"웬걸 그렇게 많이 갖다 줘?"
"아니, 그런 게 있어."

그러더니 남편은 대파·쪽파·갓 등도 골고루 담아 자동차에 따로 실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올케도 "이런 것도 다 갖다 주시게요, 형님 말대로 너무 많아요"란다. 내가 한 마디 더 했다. "누군지 몰라도 그렇게 많이 주지 말고 경비아저씨들 배춧국 끓여 드시라고 몇 포기씩 나눠 주지…"라고 말했다. 남편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장사 수완 없는 남편, 알고 보니...

풍성하게 잘 자란 갓
 풍성하게 잘 자란 갓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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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파 밭
 쪽파 밭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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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부부가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집에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고는 따로 담은 무와 배추를 갖다 주고 온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곤 한 시간 정도 있다 돌아오더니 그 무와 배추를 팔았는데 아주 싱싱하다면서 자기 동생네도 소개 시켜준다고 하더란다. 남편은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집이나 딸아이집도 점점 김치를 적게 먹어 올해는 김장을 조금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심어놓은 무와 배추는 작년보다 훨씬 더 잘됐다. 그래서 "누굴 그냥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씨앗 값이라도 하게 조금이라도 팔았으면 좋겠다"라며 지나가는 말처럼 몇 번인가 읊어댔다. 남편도 많다 싶었는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모양이다.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 남편에게 물어봤다.

"솔직히 말해봐. 그 사람 누가 소개해줬지? 그렇지 않고 당신이 다른 사람한테 무랑 배추랑 사라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제야 남편은 "사실은 내가 밭에 갔다올 때마다 우리 아파트 경비들한테 조금씩 나눠줬거든, 그랬더니 경비가 소개해준 거야"란다. 그런데 잠시 후 어디에선가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내용은 좋은 무 배추 뿐 아니라 파·갓도 많이 줘서 고맙다며 보답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언제 기회가 되면 막걸리나 한잔하지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상대방도 우리 무랑 배추가 마음에 든다니 저절로 흐뭇해졌다. 남편에게 받은 돈은 도로 돌려줬다. 남편은 사양하다가 내가 "더운 여름 내내 고생했으니 당신이 써, 정 섭섭하면 난 만 원만 줘도 돼"라니 남편은 얼른 만 원을 내게 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마지막 머루포도라며 한 상자를 사왔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키워 돈을 받고 팔아보고, 그 물건이 좋다는 말까지 들으니 남편의 정성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큰돈은 아니지만 남편도 작은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당신 앞으로 일 없으면 농사 지어 팔면 되겠다"라고 하니 남편은 못들은 척 딴청을 부린다.


태그:#주말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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