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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50대 초반인 80년대 전반기에 19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과 1982~1983년 퐁피두센터 회고전, 1984년 위성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을 연이어 발표해 전성기를 맞는다. 뉴욕, 파리에 이어 서울에서도 세계적 작가로 떠오르다. - 기자의 말

80년 '인터넷' 예언, 82년 '휘트니' 회고전 성공

백남준 I '비라미드(V-yramid)' 대형·소형TV 모니터 40여 대 1982년 작품. 휘트니미국비엔날레 소장품으로 그의 TV연작을 총망라한 '비디오조각'의 진면목을 보여주다.(왼쪽) 그리고 1988년에 이걸 더 업그레이드 시킨 ‘다다익선’ 1003개 TV(개천절 의미) 1988 (오른쪽).
 백남준 I '비라미드(V-yramid)' 대형·소형TV 모니터 40여 대 1982년 작품. 휘트니미국비엔날레 소장품으로 그의 TV연작을 총망라한 '비디오조각'의 진면목을 보여주다.(왼쪽) 그리고 1988년에 이걸 더 업그레이드 시킨 ‘다다익선’ 1003개 TV(개천절 의미) 1988 (오른쪽).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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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80년 3월 25일 '랜덤액서스정보'라는 뉴욕현대미술관 특강에서 "21세기 회화는 극히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벽지가 될 것이다, 비디오나 TV는 브리태니커사전처럼 항목이나 페이지로 찾을 수 없지만 앞으로 임의로 찾는 방식이 개발되면 책도 사라진다"라며 종이 없는 인터넷시대'를 예언했다.

그해 가을, 백남준은 또 베를린 국제무선전신엑스포에 레이저기술자 '호르스트 바우만'과 함께 비디오작품인 '레이저 비디오 공간1'을 출품해 '레이저아트'를 처음 시도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그 후 오랫동안 자금과 여건이 안 돼 미뤄오다가 2000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완성도 높은 레이저아트 '야곱의 사다리' 등을 선보였다.

1982년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는 '백남준 대규모 회고전'이 성황리에 열렸다. 이 전시에서 32대 컬러TV과 8대 흑백TV로 만든 비디오조각 '비라미드(비디오+피라미드 합성어)'가 발표되는데 호응이 좋았고 이를 계기로 이 미국미술관 소장품이 돼 백남준의 새 미국시대를 열었다. 이 작품은 후에 '다다익선'으로 재탄생한다.

백남준은 이 전시를 더 홍보하기 위해 인기가 없어진 '로봇 K-456'을 이 미술관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하는 해프닝은 벌려 당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또한 그해 5월 이 미술관에서 당대 유수한 미술관관장들이 모여 백남준의 미술사적으로 재평가하는 '토론회'도 열려 '비디오아트'란 새 장르의 위상이 더 확고해졌다.

일찍이 백남준의 재능을 발굴해 그를 연구하고 전시해 온 큐레이터 '핸하르트', 그는 휘트니전 전시도록에서 백남준에 대해 "통찰력을 가지고 비디오아트를 연 개척자로 미적 표현의 새로운 비전과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는 또한 비디오분야만 아니라 퍼포먼스, 작곡에도 일가를 이뤘다"라고 평가했다.

1982~1983년 '퐁피두' 회고전 성황

백남준 I '삼색 비디오(Tricolor Video)' 1982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선보인 대형작품. 2014년 2월 1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백남준문화재단 주최)에서 '라티고'교수가 설명할 때 쓴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백남준 I '삼색 비디오(Tricolor Video)' 1982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선보인 대형작품. 2014년 2월 1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백남준문화재단 주최)에서 '라티고'교수가 설명할 때 쓴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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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또 미국뿐 아니라 70년대 말 독일 뒤셀도르프 조형대 교수가 되면서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미국에서 백남준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를 알린 '핸하르트'가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소르본대 영상학 교수인 '장 폴 파르지에(J. P. Fargier)'가 있었다. 그는 백남준을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라며 극찬했다.

'파르지에'는 1982년 백남준 퐁피두센터 개인전을 앞두고 1981년 백남준의 사상적 기원(L'Arche de Nam June 22분)'이라는 인터뷰영상을 제작한다. "'색(color)'이란 시간을 뜻하고, 섹스를 뜻한다"라는 백남준의 말로 시작하는 이 대담에서 한 발언은 단순하나 깊이가 있고 파격적이라 당시 프랑스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백남준은 '자아형성·사랑과 금전·시간과 공간'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원이 된 맑스는 물론 그의 예술적 이론과 실천에 큰 영향을 준 맥루한, 케이지, 보이스, 마치우나스 그리고 프랑스소설가 스탕달과 시인 발레리 등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놓아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퐁피두센터에서 1982년 12월 15일부터 1983년 4월 11일까지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렸다. '파랑·하양·빨강' 프랑스국기를 '전자국기로 변형한 '삼색 비디오(Tricolor Vidéo)'를 선보였다. 256대의 컬러TV와 128대 흑백TV(총 384대)와 8개 비디오테이프가 오색찬란한 영상을 연출해 이곳 전시장 한 코너를 점령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전시에서 "나는 TV 안에 인간의 뇌를 심고 싶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작품설명을 하면서 예술과 일상을 반반씩 뒤섞었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예술에서 대중의 참여와 취향이 매우 소중함을 피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영국에서 유행한 '일상으로 내려가는 예술(down to earth)'과도 일맥상통한다.

김광우 미술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헝가리출신의 프랑스조각가 니콜라스 셰퍼(N. Schaffe 1912~1992)는 레이저로 쏘아 300m가 넘는 인공두뇌조명탑을 세워 프랑스국기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으나 그의 아이디어가 물리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걸 비디오아트로 구현해 프랑스인에게 흡족함을 줬단다.

1983년은 첫 '위성아트'를 위한 폭풍전야

소르본대 안-마리 뒤게 교수 등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백남준 아카이브 프로젝트' 중 한 장면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년 2월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백남준문화재단 주최)의 발표자 '라티고' 생테티엔(Saint-Etienne)대 교수의 영상자료를 찍은 것
 소르본대 안-마리 뒤게 교수 등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백남준 아카이브 프로젝트' 중 한 장면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년 2월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백남준문화재단 주최)의 발표자 '라티고' 생테티엔(Saint-Etienne)대 교수의 영상자료를 찍은 것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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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살이 된 1982년 백남준은 이렇게 뉴욕과 파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전 지구적으로 충격을 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런 면에서 1983년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한 '폭풍전야'와 같은 해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은 이미 'TV'를 예술화했지만 이번에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예술을 상상했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아했다. 그래서 그해 8월 백남준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 케이지를 찾아가 그들 설득한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막을 이용우 미술평론가가 글로 남겼는데 그걸 여기 소개한다.

"당신과 보이스가 인공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소설가)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야심작을 성사시키려 인사들을 두루 만났고 그 중 미국방송(WNET) 프로듀서인 '캐럴 브란덴버그'도 있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83년 여름 어느 날 백남준이 찾아와 다짜고짜 하는 말이 내년 1월 1일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 오웰에게 한수 가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인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TV쇼를 하겠다고. 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그 짧은 시간 내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말렸죠. 그런데 그는 이미 프랑스채널(FR) 3TV와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고 퐁피두센터와도 프로그램 대한 결정을 해놓고 있었어요. 나는 영락없이 백남준에게 걸려든 셈이 됐어요."

1984년 백남준이 비행기 안에서도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는 모습. 2014년 방송된 <KBS 파노라마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 백남준2편 : 디스토피아를 넘어서>의 한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
 1984년 백남준이 비행기 안에서도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는 모습. 2014년 방송된 <KBS 파노라마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 백남준2편 : 디스토피아를 넘어서>의 한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
ⓒ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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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여부가 결정되자 백남준에게 이번엔 제작비 40만 달러가 문제였다. 록펠러재단에서 17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나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자 아이디어를 내 케이지, 보이스, 커닝행, 긴즈버그가 만든 판화를 만들어 팔아 7만 달러를 충당했다. 이밖에도 서울 원화랑 정기용 사장이 4만 달러를, 프랑스방송과 KBS 등에서도 협찬했다.

백남준은 프로젝트 방영 후에도 빚 갚느라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 개인파산을 전제로 부채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1984년 6월 귀국했을 때 만난 유치원친구 이경희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그 빚을 갚는 데 조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려 했으나 그런 한국 돈은 쓸 수 없다며 간곡히 거절한다.

다시 작품이야기로 돌아가 백남준은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란 경계를 흐리게 했다. 그래서 대중예술가와 고급예술가를 번갈아 등장시켜 동급으로 놓았고 '대중 쇼' 방식을 취했다. 이 난제는 누구도 풀기 쉽지 않은데 백남준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춤, 노래, 코미디, 퍼포먼스 등을 융합하며 탈장르를 시도했다.

백남준은 당시 스타급 연예인과 예술가 100여 명을 그것도 1월 1일 한 곳에 모으는 초능력을 보였다. 뉴욕에선 '앤더슨, 긴즈버그, 무어먼, 케이지, 커닝햄' 등이, 파리에선 '사포, 보이스, 삭스, 팅겔리, 생팔' 등이 출현했다. 백남준은 전설적 전위무용가 '커닝햄'을 14년만에 방송에 출현시켰고, '보이스'도 6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미술사에 유래 없는 기념비적 사건

'2천5백만을 위한 예술(Art for 25 mill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4년 11월 28일부터 12월 9일까지 베를린 '다아트갤러리(DAADgalerie)'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초대용 포스터 ⓒ DAADgalerie
 '2천5백만을 위한 예술(Art for 25 mill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4년 11월 28일부터 12월 9일까지 베를린 '다아트갤러리(DAADgalerie)'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초대용 포스터 ⓒ DAADgal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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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1984년 1월 1일 뉴욕(정오), 샌프란시스코(오후 3시), 파리(오후 6시)를 동시에 연결해 한국, 일본,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 11개국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로 송출했다. 이는 세계미술사에서 유래가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위성오페라 쇼로 백남준은 명실 공히 세계적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 프로젝트는 뉴욕에 있는 '공영방송(PBS/WNET)'이 주관했는데 당시 방송제작자 중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거라 긴장했고, 뉴욕과 파리의 위성을 잇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화면이 자주 끊겨 환희와 실망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시청률이 초반에는 7%까지 올라가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위성 쇼는 뉴욕의 사회자인 플림튼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신을 만날 시간이네요. [...]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TV는 우리의 뇌를 먹지요, 하지만 조지, 당신은 오버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것은 아직도 남아있어요, 봐요, 당신은 좀 틀렸군요"라는 멘트로 시작한다.

이 작품명은 영국의 민주사회주의자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 1946년부터 2년간 쓴 소설제목에서 차용한 것인데, 이 내용은 1984년에 되면 '빅 브라더(Big Brother 가상의 독재자)'가 나타나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담겨있다.

그러나 백남준은 오웰의 생각이 반만 맞았다며 그의 '빅 브라더'론을 조롱했다. 하긴 오웰의 예측이 다 틀린 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형편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첨단미디어기술'이 개발되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쌍방소통이 가능할 거로 낙관했다. 그러나 오웰은 '인터넷-SNS시대'가 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왜 생방송인가?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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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백남준은 화면이 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이 '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을까? 1987년 그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에베레스트나 알프스빙벽에 도전하는 이유가 위험한 것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열정 때문이 아닌가. 프로메테우스와 콜럼버스 이래, 이런 열정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라고 대답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걸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그게 아방가르드 정신인데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작가적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는 60년대 초부터 '미래의 빛(A Satellite)'이라는 뜻이 담긴 '위성'을 가지고 예술을 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미래를 사유하는 자로서 경계 없는 지구촌을 그려왔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생방송'인 또 다른 이유를 추론해 보면 그건 바로 방송이 오웰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권력자에 의해 정보가 임의로 조작되고 왜곡·굴절되는 것을 최소화하자는 상징적 조치였고, 쌍방형 미디어로 소수인 '빅 브라더'가 대다수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하려는 걸 막자는 주도면밀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소통과 참여'는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에 소개된 그의 사진과 그의 어록(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을 합성한 것임.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에 소개된 그의 사진과 그의 어록(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을 합성한 것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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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백남준은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맥루언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시켰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 바로 백남준 예술의 핵심인 '참여와 소통'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누구나 즐기는 '댓글' 같은 게 백남준이 상상한 '참여와 소통'의 '에스페란토(국제어)'였다

이런 정신은 백남준이 60년대 가담한 '플럭서스' 운동과도 상통한다. 플럭서스 즉 영어로 'FLOW(흐른다)' 소통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세상을 염원하는 것인데, 백남준은 이런 발상으로 '인터넷' 없는 시대에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국경·인종·언어는 뛰어 넘는 '인터페이스' 세상을 만들려했다.

'굿모닝 미스터오웰'의 내용에서 동구권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굿 장면'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할애되는데 이는 백남준이 동서 간 정보결핍으로 발생하는 오해를 제거하고 서양이 동양을 사회문화적으로 깔보는 일을 없애려는 사전조치였다.

또한 이런 '참여와 소통' 방식은 '오웰'이나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사회 그리고 그 이전에 맑스가 말한 '소외와 착취'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킹 방식은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한 식구라는 묘한 연대감을 주며 평등하게 참여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해주었다.

그때 백남준은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놀라운 말을 던진다. 그는 20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연 셈이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를 꿈꾼 지 20여 만에 세계를 호령하며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문화칭기즈칸'이 됐다.

34년 만에 금의환향한 백남준의 '폭탄선언'

1984년 새해맞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 프로젝트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저녁 8시 김포공항에 귀국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기자회견하는 모습. 여기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왼쪽은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
 1984년 새해맞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 프로젝트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저녁 8시 김포공항에 귀국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기자회견하는 모습. 여기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왼쪽은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
ⓒ 백남준 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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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세계적 아트스타로 부각되면서 한국에서도 덩달아 유명해져 34년 만에 금의환향한다. 그래서 "80년대 역수입된 한국산작가"라고 불렸다. 그런데 1984년 6월 26일 모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폭탄선언'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다. 그 인터뷰내용 중 일부를 여기에 인용한다.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이에 대해 이용우 미술평론가는 "그가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 제스처 등을 보여 온 '플럭서스' 철학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기론'과 관련해서 백남준의 귀국시기가 묘하다. 국내적으로는 신군부독재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고 언론통제가 심해 학생·민주화운동이 더 격하게 일어났고, 국외적으로는 1984년 LA올림픽에 구소련이 불참하는 등 신냉전체제가 고조되었다. 당시 상황은 백남준이 작품에서 그린 평화와 공존의 세계와도 정반대였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 선보인 이 작품은 신군부독재와 신냉전 시대를 질타하는 메시지가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고 오히려 미학적이라 당국도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백남준은 마치 교란자가 된 듯 독재와 냉전의 주제를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계산된 고등사기를 친 셈이다.

하여간 이 작품은 당시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다. 외국 언론은 '1984년 하이테크 아트가 폭발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국내언론도 백남준이 6월 귀국했을 때 폭압적 전두환 시대였음에도 '첨단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나 '식을 줄 모르는 백남준의 열기'와 같은 제목을 붙이며 대서특필했다.

김홍희·천호선 부부 현장에서 참관기

독일 '비스바덴미술관(1984.07.02~1984.12.08)'에서 열린 백남준 전을 보려온 김홍희·천호선 부부에게 백남준이 자신의 작품 'TV로댕'을 직접 설명해주는 모습. 가운데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남편 천호선 씨는 사진에 찍히지 않았다.
 독일 '비스바덴미술관(1984.07.02~1984.12.08)'에서 열린 백남준 전을 보려온 김홍희·천호선 부부에게 백남준이 자신의 작품 'TV로댕'을 직접 설명해주는 모습. 가운데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남편 천호선 씨는 사진에 찍히지 않았다.
ⓒ 천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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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백남준이 퐁피두센터 앞에서 이 작품을 총 지휘할 때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과 그의 남편 '천호선'씨가 어떻게 보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1980년 김 관장의 남편은 당시 뉴욕 한국관공보관이었고 두 부부는 거기서 우연히 전위무용가 '커닝햄'의 후원회장인 '툴' 여사를 알게 돼 그 소개로 백남준을 만난다. 마침 뉴욕 '키친'에서 열린 백남준 전위예술을 보고 전율을 느낀 김 관장은 적지 않은 나이에 미술사전공자로 변신한다. 1983년 말 남편이 마침 덴마크공보관으로 발령이 나 유럽에 거주했고 그래서 1984년 첫날 퐁피두센터에서 백남준이 총 진행하는 걸 다 볼 수 있었다. 그 추억을 김 관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한다.

"남편이 1983년 말 덴마크공보관으로 부임된 후라 운 좋게 우리 부부는 백 선생이 1984년 1월 1일 퐁피두센터 앞마당 중계차본부에서 교통정리 하듯 뉴욕이나 파리에서 온 화면을 내보내지고 받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편집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어요.

KBS도 돈을 내고 방영권을 따 한국에도 중계했죠. 남편이 이걸 연결하는 데 몫을 했어요. 정말 놀라운 위성오페라를 보면서 감격했지요. 그게 전 세계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꿈만 같았어요. 중계가 다 끝나고 남편이 공무원이라 돈은 없었지만 백남준 선생과 한국에서 오신 방송스태프에게 퐁피두센터 근처 '르 몽 로제르' 카페에서 저녁을 한턱냈지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2년 후 '86아시안게임'을 맞아 '바이바이 키플링(1986)'로 이어졌고, 4년 후 '88서울올림픽' 때에 맞춰 '손에 손잡고(1988)'가 나오면서 위성오페라 3부작이 완결된다. 백남준은 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브랜드가치가 전무한 한국의 위상을 높이면서 한국을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4 백남준아트센터 특별전-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 11월16일까지

이부록 I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 비닐스티커에 프린트 300×450cm, 120×480cm 2005-2014. '워바타'는 '전쟁'(War)과 '아바타'(Avatar)의 합성어로 된 '그림문자(픽토그램)'다. 작가는 2005년부터 현재까지 기존의 기호나 이미지에 이 스티커를 붙여 우편으로 보내거나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통해 그들에게 전쟁이라는 극단적 비극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이부록 I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 비닐스티커에 프린트 300×450cm, 120×480cm 2005-2014. '워바타'는 '전쟁'(War)과 '아바타'(Avatar)의 합성어로 된 '그림문자(픽토그램)'다. 작가는 2005년부터 현재까지 기존의 기호나 이미지에 이 스티커를 붙여 우편으로 보내거나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통해 그들에게 전쟁이라는 극단적 비극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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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백남준아트센터 특별전_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가 백남준아트센터 1, 2층에서 다음달 16일까지 열린다. 백남준 외에도 로렌조 비안다, 솜폿 칫가소른퐁세, 엑소네모, 하룬 파로키, 핑거 포인팅 워커, 폴 게린, 모나 하툼, 윌리엄 켄트리지, 김태윤&윤지현, 이부록, 리즈 매직 레이저, 질 마지드, 뵤른 멜후스, 옥인 콜렉티브, 리무부 아키텍쳐, 송상희 등도 참가한다. 총 50여 점이 전시되고 그 장르도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 다양하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7시까지이며 둘째·넷째 월요일은 휴관이다. 또한 '자료전'으로 1984년 말 독일에서 KBS 이원홍사장에게 보낸 총 9장 편지 등도 전시된다.

덧붙이는 글 | [굿모닝 미스터 오웰 유튜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SIQLhyDIjtI



태그:#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휘트니미술관회고전, #퐁피두미술관회고전, #위성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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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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