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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만화야."
"진짜 만화책이야?"

둘째 아이가 눈을 번쩍 뜬다. 만화책이라면 뭐든 읽겠다는 기세다. 표지를 보더니 커졌던 눈이 가자미 눈처럼 작아졌다. 그리고 금세 눈을 돌린다.

"재미없게 생겼네! 딱 봐도 알아."

웃음이 나왔다. 혹시 만화책이란 말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제목이 <짐승의 시간>이니 흥미가 떨어지나 보다. 어떻게 말을 해야 관심을 가질까.

김근태가 보낸 <짐승의 시간>, 만화로 그려내

<짐승의 시간> 책 표지.
 <짐승의 시간> 책 표지.
ⓒ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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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건웅의 책 <짐승의 시간>의 부제는 '김근태, 남영동 22일간의 기록'이다.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고문(아래 김근태)이 남영동 고문실에서 겪은 '짐승의 시간'을 담아냈다. 같은 주제인 영화 <남영동>이 나왔을 때도 보지 못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고문의 기록을 영상물로 볼 자신이 없었다. 만화책은 좀 다를 듯싶어 <짐승의 시간>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줄거리를 간략히 옮겨본다.

책은 김근태가 수배자로 살았던 유신독재 시절에서 시작한다. 도망 다니던 김근태는 훗날 아내가 된 인재근(아래 인재근, 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을 소개받게 된다. 둘은 수배자로 처지가 같았다. 비슷한 처지였기에 만나면 마음이 편안했다. 김근태는 인재근의 명랑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여러모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둘은 결혼했다. 1979년 말, 김재규의 총성에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렸다.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첫 아이 병준이 태어났다. 그리고 한 달 뒤 김근태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부부는 자유의 몸이 됐다. 어머님의 유언을 따라 4월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 해 5월,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들의 결혼식 사진에 나왔던 친구들은 수배자가 됐다. 그 뒤 인재근은 결혼식 사진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김근태는 다시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김근태는 집에 있는 식구들이 그리웠다. 잘 지내고 있을까 염려도 됐다. 그의 친구가 김근태를 대신해 집에 갔다. 친구는 집 앞에서 "병준이 엄마, 병준이 엄마"하고 불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들어가보니 인재근과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친구에게 아내와 아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근태는 괴로워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첫째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우슈비츠의 유대인과 다름없었다

"전태일 분신과 유신 발생 뒤에도 거의 흔들림 없었던 나는 난생처음 비참한 심정이었습니다." (본문 29쪽)

김근태는 아비로서, 남편으로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됐다. 안기부 국장을 만나러 간 김근태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게 된다. 인재근은 안기부로 직접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이보세요.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민청련을 인정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들이 저지른 폭행을 언론에 모두 알리겠어요!" (본문 75쪽)

그 뒤로 민청련은 정부의 공인을 받았다. 인재근의 대담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30분, 며칠간의 구류를 끝낸 김근태는 유치장을 나섰다. 유치장을 나오면서 밀린 잠이라도 실컷 자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유치장 밖에선 여덟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 이끌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땐 시동도 꺼지지 않은 차가 서있었다. 차는 곧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했다.

조사실에 끌려간 그는 팬티를 제외하고 모든 옷을 벗게 된다. 눈이 가려진 채 고문대에 올라가면서 스스로 생각했다. '고문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이건 협박용이다'라고. 고문대에 눕혀지면서도 생각을 했다.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 (주)아우라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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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우슈비츠에서 완전히 벗겨진 유대인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리고 그는 견뎌 보기로 다짐했다. 일제 독립운동가와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선 사람들처럼. 얼굴에 수건이 올려지고 샤워기의 물이 쏟아지면서 그의 꿈은 여지없이 깨졌다. 고문은 그렇게 김근태를 덮쳤다. 김근태는 고문을 당하면서 자기와 한 약속을 하나씩 허물어 간다.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약속, 누군가의 이름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 그렇게 고문은 그의 원칙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머릿속에 기록한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어도 그의 정신은 고문의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고문한 자들의 이름과 고문한 시간 그리고 고문 방법을 기억했다. 그 기록은 22일간 계속된다. 무엇을 위해서 그랬을까?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고문을 고발할 생각을 한 걸까?

남영동을 떠나는 날 그는 고문을 가했던 자의 몸집이 점점 작아져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악수하고 나오면서 고문 기술자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김근태는 검찰청 승강기에서 내리는 순간, 아내 인재근을 만났다. 변호사가 가족 면회도 못하게 하냐며 항의하는 틈에 인재근과 김근태는 잠깐이지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김근태는 처음엔 머뭇거리며 아내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내는 채근했다. 김근태는 아내에게 말을 했다.

김근태, 인재근 부부에게 진 빚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각각 5시간씩 열 번 당했어요. 4일, 8일, 13일 각각 두 번씩, 그리고 5일, 6일, 10일, 20일은 각각 한 번씩 당했어요."

<짐승의 시간> 한 장면
 <짐승의 시간> 한 장면
ⓒ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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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문당한 상처를 보여 주었다. 첫 고발이다. 머뭇거렸지만 그는 고문을 분명하게 증언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이 당한 고통을 말로 꺼내는 것. 그것도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보여주는 것. 보통의 아내라면 남편을 안아주고 같이 우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인재근은 달랐다. 남편과 함께 끝까지 싸웠기 때문이다. 그런 인재근이 없었다면 감옥 속 김근태도 고문을 증언하는 용기를 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이 걸렸지만 고문에 가담했던 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당시 김근태에게 고문을 가했던 수사관 4명은 지난 1993년 폭행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의 독직폭행 등)로 기소돼 징역 1년6개월에서 3년을 선고받았다.

김근태는 평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2011년 12월 파킨슨 병으로 사망했다. 인재근은 다시 진실을 위한 싸움을 걸었다. 그의 남편이 고문 후유증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지난 2012년 재심을 청구했고, 결국 김근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벗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28년 만의 일이었다.

민주주의가 한 발씩 나아가기 위해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잔혹한 사건을 기록하고 증언을 해야만한다. 개인에겐 힘겨운 일일지라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사회는 변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김근태와 인재근에게 빚이 있다. 아름답고 용감한 부부 이야기가 <짐승의 시간>으로 우리에게 왔다.


짐승의 시간 - 김근태, 남영동 22일간의 기록

박건웅 만화, 보리(2014)


태그:#짐승의 시간, #김근태, #인재근, #남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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