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GOP총기난사 사건 임병장 현장검증 강원도 고성군 22사단 GOP 총기난사 후 도주해 구속된 임 병장이 7월 8일 오후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 GOP총기난사 사건 임병장 현장검증 강원도 고성군 22사단 GOP 총기난사 후 도주해 구속된 임 병장이 8일 오후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관심에도 등급이 있다. 내가 받은 관심은 A급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각별하진 않았다. C급도 아닐 것이다. 종종 선임들과 언쟁을 벌이곤 했으니. 아마 B급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관심병사'였다.

훈련보단 작업이 많았던 후방 부대였다. 자대 배치를 받고서 한동안 미화 작업에 투입됐다. 화단에 장미와 칸나를 심었다. 빨리빨리 하라는 명령에 다들 급하게 땅을 파고 묻기에 바빴다. 그렇게 심은 꽃이 필 리가 없었다. 뽑고 다시 심었다. 그래도 피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침 취사병 자리가 비어 자원을 받는다고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죽을 꽃을 심는 것보다, 만들면 누군가는 먹는 밥을 짓고 싶었다. 취사장으로 올라갔다. 주말은 없었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었다. 요리라기보다 '생산'이나 '가공'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다.

사소한 실수에도 '갈굼', 벌로 쌀 포대 들고 뛰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터졌다. 부대원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훈련 째고 싶어서 취사장 간 거 아니냐, 벌써부터 빠졌다." 운운.

대가도 없고 의미도 없는 고통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 군 생활의 많은 갈등이 여기서부터 생긴다. 병사들끼리의 서열 놀이도 대개는 이 '고통의 분배'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모두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게임의 특징이다.

다들 '내가 제일 힘들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나보단 편하다고 상상한다. 그렇게 일종의 피해의식을 키워 간다. 미필자와 여성을 대하는 예비역 남성들의 시선도 이와 같다. 내가 일할 때 누군가는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고 미움이 쌓일 수밖에. 그리고 그 미움은 군대에서든 사회에서든 상대적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소문은 빠르게 돌고 돌아 취사장의 선임에게까지 갔다. 갓 병장을 단 그는 나를 '빡세게' 조련해 자기의 일을 모두 넘기고 남은 군 생활을 편하게 보내고 싶어 했다. '빠진 이등병'을 후임으로 받은 그의 불안감을 이해했다. '꿀은 내가 빨아야 하는데. 이놈 때문에 내가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 이후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병태 같은 생활을 했다. 사소한 실수에도 한 시간 남짓 '갈굼'을 먹어야 했다. 벌로 수십kg짜리 쌀 포대를 들고 뛰었다. 쉬는 시간은 없었다. 그런 생활이 한 달 쯤 계속되었을 때다. 참다 참다 이렇게는 못 하겠다고 말했다. 소문은 다시 퍼졌다. "누가 개겼다더라", "이등병이 왕고한테? 미쳤네, 부대 개판이다."

지옥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일과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오면 내 관물대(사물함) 안에 있던 여러 물건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친한 동기와 후임들은 좀 견뎌보자고, 곧 나갈 사람들이지 않느냐고 나를 달랬다. 그러마고 했다.

하지만 선임병들이 내가 받은 편지와 일기장을 돌려보던 걸 발견했을 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사적 공간은 보장해줘야 하지 않나. 견뎌야 할 최소한의 이유조차도 찾기 힘들었다.

한판 대거리를 하고 간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되레 징계위원회에 불려간 것은 나였다. 죄목은 하극상. 부당함에 항의했을 뿐이었지만, 휴가는 날아갔고 보직은 바뀌었고, 나는 관심병사가 되었다.

임아무개 병장 생포 속보를 보면서

특별히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 생각했다. 휴가를 나와 자기 부대의 관심병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나보다 먼저 입대했던 친구들의 모습과 부대 선임들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휴가를 나온 나를 맞아준 친구들 앞에서, 나는 나의 고민과 내게 찍힌 관심병사라는 낙인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가장 친하던 친구들한테도 속마음을 토로하지 못하던 그 순간엔 술도 들어가지 않았다. 무언가를 먹고 싶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부대의 동기들을 제외하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휴가를 나오면 혼자 영화를 보거나 조용히 방에 누워 책을 보곤 했다.

다행히 갈등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나는 오해를 덜어내기 위해 애썼고, 나와 다투던 선임들은 차츰 전역했다. 간부들은 나를 '할 말은 하는 녀석' 정도로 여겼다. 내가 겪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했기에, 후임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누가 군대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나는 대체로 즐거웠다고 이야기한다. 사실이다. 나완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과 만날 수 있던 기회였고, 그들과 2년을 살아내며 성장할 수 있던 계기이기도 했다. 낙인을 지우고 다시 돌아간 취사장에선, 동료들과 손발을 맞추며 몸으로 일하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다만 GOP에서 동료들을 살해하고 도망쳤던 임아무개 병장의 생포 속보를 보면서, 나는 '관심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 순간의 단절감과 고립감을 되새긴다. 내가 속한 곳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느낄 때의 무력함을 기억한다.

운 좋게 그 낙인에서 벗어났던 나와는 달리, 그 낙인에서 끝내 헤어 나오지 못했던 그와 그 낙인 때문에 고립돼 있을 수많은 평범한 병사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손을 내밀어줄 사람들이 곁에 있길 바란다. 이번 참사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안우혁씨는 현재 인권연대 청년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군문제#임 병장#윤 일병#군대 폭력
댓글

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