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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국수 한 그릇
콩국수 한 그릇 ⓒ ko.wikipedia.org

자식을 두고 우스갯소리로 딸만 둘이면 금메달, 아들만 둘이면 '목매달'이라는 말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딸도 딸 나름이야." 나만큼 무심하고 무뚝뚝한 딸이 있을까? 결혼을 하고 큰애를 낳을 무렵 두 남동생 중 큰 동생도 결혼을 했다. 맏딸을 결혼시키고 2년이 채 되지 않아 아들까지 장가를 보낸 후에 헛헛했을 울 엄마. 결혼 전에는 저녁마다 내 방에 들어오셔서 "니 아빠가~" 하고 푸념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서는 가끔 전화로 속풀이를 하셨다.

"아줌마, 안 죽고 살아 있네! 손가락은 멀쩡허다냐?"

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는 나를 놀리듯 아줌마라고 불렀다. 엄마는 갓 시집간 딸이 시집살이라도 할까 맘 놓고 딸네 집에 드나들지 못해 속상한데, 그 속도 몰라주고 전화 한 통 없는 딸을 나무라듯 손가락 타령을 하셨다. 얘기는 으레 "니 아빠가~"로 이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 술 한잔 했구나" 하며 무심하게 전화를 받곤 서둘러 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은 혀가 꼬여, 전화를 받자마자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엄마, 술 마셨어?"
"그래! 일 끝나고 아줌마들이랑 한잔 했다. 왜, 나는 술 마시면 안 된다냐?"

'아, 진짜!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엄마는 인테리어 현장에서 페인트 기술자로 일하신다.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을 하면서 가끔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씩 하는데, 그날은 좀 과하다 싶었다. 순간 짜증이 밀려왔지만 전화를 끊을 수 없어 건성으로 엄마의 타박을 듣고 있었다. 전화 한 통 안 하는 매정한 딸년(나)부터 시작해 아빠 욕까지 실컷 토해내던 엄마는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해버렸다.

"니 아빠가 어떤 사람인 줄 아냐? 널 낳자마자 딸을 낳았다고 노발대발 하더니 산에 내다버린다고 들고 나가더라. 정말로 너를 내다버릴 것 같아 쫓아가 뺏어왔다. 니 아빠가 그런 사람이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져 그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만 멍하니 듣고 있었다.  아무리 첫 자식이 아들이기를 바랐다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러고 보니 아빠는 늘 말끝마다 "기집애가!"라는 말을 했다. 아빠는 고모가 하나에 걸걸한 삼촌들만 있는 7남매 중 장남인데 첫 자식이 아들이 아닌 것이 그리도 화를 낼 일이었을까? 장남이어서? 조선시대 종가집도 아닌데 그깟 장남이 뭐라고…. '엄마… 그 말은 하지 말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래서 나를 대학 못 보낸다고 했을까?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진학상담을 하러 학교에 온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선생님한테, 아들도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했는데 딸을 어떻게 공부시키느냐며 상고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왜? 왜 내가 상고를 가야 해?"
"이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 걸어다닐 수도 있고, 이름 있고 좋은 학교랜다." 
"싫어, 나 대학 가야 된단 말이야. 나보다 더 공부 못하는 애들도 다 인문계 가는데 왜 내가 상고를 가! 나 그 학교 안 갈 거야!"

그렇게 교무실에서 한 시간을 울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도 엄마 땜에 선생님이 되려던 꿈을 접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왜 또….' 상처를 주는 엄마만 보였고 나만 아팠다. 왜 상처 주는 엄마만 보이고 아픈 나만 억울하게 느꼈을까?

"딸 낳았다고 버린다고 들고 나가더라... 니 아빠가 그런 사람이야"

두 아이를 낳고 어느새 큰애가 중학생이 되고 보니 이제야 그때의 엄마가 보인다. 엄마는 혼자 아프게 '오춘기'를 앓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에 아빠가 사우디에 가셨다. 197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아빠들이 사우디 건설현장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는데, 아빠도 큰돈을 벌 요량으로 가셨다고 한다.

아빠는 목돈을 1년에 두어 번 보내주셨고 그렇게 보내온 돈은 외상값 갚기가 무섭게 바닥이 나곤 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엄마는 갓난쟁이를 들쳐업고 길에서 채소라도 팔아야 했다. 몇 년을 남편 없이 삼 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엄마의 손에는 부업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조화를 조립하는 일, 목장갑 손끝을 마무리 하는 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 바구니 만드는 일….

엄마는 품삯을 받으면 라면 한 박스를 사다 놓았다. 맛있는 것 많이 못해주고 과자 한 봉지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것이 안쓰러워, 삼남매 기죽지 말고 라면이라도 실컷 먹으라고 하셨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은 친구를 불러 자랑삼아 생 라면을 부숴 먹었고, 라면 한 박스는 일주일도 채 가지 않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일을 하면서 늘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바다가 소주라면, 바다가 소주라면, 해 뜨는 부두에서 홀짝홀짝 마셨을 것을~."

엄마가 개사(?)한 애창곡이다. 어린 나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노랫말이 정말 '소주'인 줄 알았다. 어린 내가 아빠를 찾을라치면 월남전 사진 속 아빠를 보여주었고, 노래 불러서 아빠에게 보내자며 노래를 녹음해서 우편으로 보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고단함을 노래로 이겨내셨던 모양이다.

 바다가 '소주'라면
바다가 '소주'라면 ⓒ 이정혁

엄마에게 아빠는 지금도 그리움일까? 삼남매를 키우며 그리웠던 울타리, 여자이기에 그리웠던 사랑,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한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엄마를 흔들어놓았다. 외롭다 못해 이제는 치가 떨려 그렇게 아프게 오춘기를 혼자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식 셋을 모두 품에서 내려놓고,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없었나 보다. '나'라는 존재 없이 살았던 삶이 억울하고 비참했나 보다. 무식해서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살았다는 억울함에 엄마는 피를 토했다.

자식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부부싸움을 매일 했다. 문짝이 부서져 나가고 식탁 의자가 부서지고…. 더 이상 엄마는 살림을 하지 않았다. 밥도 짓지 않고, 반찬도 만들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았다. 이혼을 하겠다며 자식들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했다. 하지만 자식들 누구 하나 동의해주지 않았고,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엄마는 무너지고 있었다.  

엄마에게 병이 생겼다. 갑상선 이상과 자궁암. 동시에 둘을 수술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갑상선은 암까지 가지 않아 약물치료로 대신했고,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만 했다.

"엄마, 괜찮아?"
"암 덩어리만 떼내고 항암치료 하면 괜찮다는 것을 내가 그냥 들어내라고 했다. 할머닌디 자궁이 없으면 어떠냐?"

사색이 된 딸 앞에서 엄마는 괜찮다며 편안히 웃어 보였다. 수술은 잘 끝났고 경과도 좋았다. 좋아진 것은 몸의 건강만이 아니었다. 엄마 스스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빠와 관계도 좋아졌고 5~6년이 지난 지금은 예전의 엄마로 돌아왔다. 

감자와 콩국수에 담아 전하는 마음... 이제 엄마가 보인다

며칠 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장난기 어린 말투였다.

"안 죽고 살어는 있냐?"
"뭔일이어요?"
"내가 느그 집을 다리 아퍼서 못 가야."
"긍게 말여~. 엄마 울 집 왔다가면 무좀 생겨~. 무좀은 한번 생기면 고질병이라 낫지도 않어."

엄마랑 나는 한바탕 웃었다. 시집살이 하는 딸네 집에 편히 다녀가지 못하는 엄마의 안타까움을 농담과 웃음으로 넘겼다. 지난번에 엄마한테 준 된장이 짰다며 콩을 삶아 섞으라는 얘기와 함께 콩을 사다 놨으니 가져가라는 얘기를 했다. 콩 얘기에 내가 주말에 해먹은 콩국수가 생각났다. '엄마는 아빠랑 둘뿐이라 귀찮아서 이런 거 안 해드실 텐데….'

퇴근길에 콩을 핑계로 친정에 다녀왔다. 콩국수를 해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이 어중간했다. 뭐라도 사갈까 싶어 시장에 들렀는데 콩국수 집이 눈에 들어왔다. 콩국을 보니 직접 갈아서 만들었는지 걸쭉한 게 고소해 보였다. 콩국과 삶은 국수를 사들고 친정으로 향했다.

엄마는 치과치료 중이어서 이가 없어 발음이 샌다고 듬성듬성 빠져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이가 없어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다며 삶은 감자를 내오셨다. 감자 좋아하는 딸과 함께 먹으려고 쪄놓았다고 했다. 쩍 갈라진 껍질 사이로 포실포실 감자분이 일었다. 어릴 적 호호 불며 맛있게 먹었던 하지감자가 생각났다. 

"엄마가 쪄주는 감자가 젤 맛있지! 우리 집에서 감자를 찌면 왜 이런 맛이 안 나나 몰라!"

감자 바구니 옆에 콩국수를 말아 놓으며 엄마를 챙겼다.

"집에서 콩 삶고 갈아서 자주 해먹는데 사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 엄마도 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삶아서 믹서에 가는 건 괜찮은데 껍질 까는 것만 한 시간이야."
"괜찮아, 집에 믹서기도 없어서 해먹지도 못해."
"오다 뭐라도 사려고 시장을 갔더니 콩국수 집이 생겼더라. 콩을 직접 삶아 갈았나봐. 맛있어 보여서 샀어. 엄마 이도 없는데 잘 사왔네."

나는 감자를, 엄마는 콩국수를 막 먹고 있는데 아빠가 들어오셨다.

"어? 누구야, 웬 아줌마가 왔어?"

현관을 들어서던 아빠가 어쩐 일로 왔냐는 투로 말을 했다.

"그러게요~. 딸이 심심해서 동네 마실 나왔지요."

아빠는 "나는 딸이 없는데?" 하며 멋쩍게 웃어 보이셨다. 지하철로 30분 거리인데 1년에 겨우 몇 번 다녀가는 딸이 못마땅해 한마디 하려다 농담으로 넘기신 것 같았다. 엄마는 아빠가 저녁을 드시고 올 줄 알았다며 한 젓가락 뜨다 만 콩국수를 두 그릇으로 만들어 드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콩이며 누룽지며 장바구니 두 개에 가득 채워 담더니 무겁다며 지하철역까지 들어주겠다고 기어이 짐을 뺏어 드는 울 엄마. 중학교 입학해서, 키도 작은데 이 무거운 가방을 어찌 메고 다니냐며 1년을 학교 입구까지 들어주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와 짧은 두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도 죄스럽던지….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어린 딸이었다.


#콩국수#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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