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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행렬(1950. 8.)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행렬(1950. 8.)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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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영병과 교전

군 당국 "고성에서 '총기난사' 탈영병과 교전 확인 중"(2014. 6. 22. 연합뉴스)

6.25전쟁 64주년을 사흘 앞둔 지난 22일 온라인에 뜬 기사 제목이다. 아래는 6.25 전쟁 64주년을 하루 앞둔 오늘 새벽 기사 제목이다.

무장탈영병 총기로 자살 시도… 43시간 만에 상황종료 (14. 6. 24. 한국경제)

나는 앞 기사 제목 '교전'이라는 용어에 참담하고 하늘 보기에가 부끄러웠다. 총을 쏜 자나 맞은 자 모두가 이 나라 백성의 아들로 불쌍했다. 어제까지 같이 근무했던 한 병사와 교전하는 나라가 지구상 그 어디에 있을까?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나는 여섯 살 소년으로 조숙한 탓인지 우리 마을에서 벌어진 당시의 일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피난에서 돌아온 어느 날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손잡고 두 동강난 나라를 하나로 합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소련제 미제 무기 마구 끌어다가 애꿎은 백성들 마이(많이) 죽였다. 네가 어른이 될 때는 남북통일이 되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될 거다."

기총소사로 들길에 쓰러진 피난민들(1950. 8. 25.)
 기총소사로 들길에 쓰러진 피난민들(1950. 8. 2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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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그새 그 손자가 군에 다녀온지 40년이 흘렀고, 이즈음은 그 손자의 손자들이 군에 가서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아직도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이다. 이번 고성 전방 GOP(최전방 초소) 총기난사 사고를 지켜본 내 마음은 매우 착잡하다.

우선 나는 군대 시절을 무사히 잘 넘겼다는 안도감과, 아직도 우리는 짐승보다 못한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 짐승이 70년이 되도록 한 하늘 아래서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짓을 하는가.

나는 102 학훈단(ROTC) 출신으로 1969년 2월 20일,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1971년 6월 30일 전역했다. 임관 후 곧장 광주보병학교에서 16주 기초보수 교육을 받았다. 곧 국방부 인사명령에 따라 1969년 6월 하순부터 전방 보병 00사단 00연대 1대대 3중대 2소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그 뒤 꼬박 24개월 동안 융통성이 매우 없었던 탓으로, 전역 날 아침까지 현지부대에서 근무했다. 전역식날 아침 근무지에서 더블백을 멘 채 대대장이 보내준 지프차를 타고 사단 전역식장에 갔다.

그 이전 나는 사단 보충대 시절 처음으로 휴전선을 시찰했다. 그때 휴전선을 처음 보고 정신이 '핑' 돌고 아찔했다. 실무부대 배치 후 중대 뒷산 OP(관측소)에서 포대경으로 휴전선 너머 북한 지역을 보고 새삼 소스라치게 놀랐다. 북한 농촌에서도 흰옷 입은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가, 이가. 박가 등 한 핏줄로 불과 25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에게 학대받던 같은 백성이 아니던가.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박고 죽은 인민군 병사(1950. 7. 29. 경북영덕)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박고 죽은 인민군 병사(1950. 7. 29. 경북영덕)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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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사고 원인

그때 우리 부대의 주 임무는 수도 서울 외곽을 철통같이 지키는 '경계'였다. 우리 부대는 보초를 제외한 전 장병들이 낮에 잠을 자고, 밤에는 잠복호에서 가상 무장공비의 예상 침투로를 지키며 밤샘 근무를 했다.

2년 남짓 군생활을 하며 별 일을 다 보았다. 부대 내 안전사고, 총기사고, 병사들의 탈영, 그리고 나 자신도 한 차례 위기가 있었다. 충북대 출신의 서아무개 내 동기는 전역 열흘을 앞두고 부하가 터트린 수류탄에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왜 부대 내 총기사고, 탈영사고는 끊이지 않을까?

내 생각은 첫째 '우리의 적이 누군가?'에 대한 회의이다. 아무리 학교에서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군에서 정훈교육을 해도 병사들은 밤을 지새우며 총부리를 겨누는 적이 누구냐고 회의할 수밖에 없다.

둘째 그 당시 전방 소총소대로 전입해 오는 병사들은 대부분 휴전선 철책을 지켜야겠다는 애국심보다 돈과 '백'이 없어 전방에 왔다는 생각들이 대부분이었고, 혹 집이 부자고, '빽'이 있는 녀석은 전입해 오더라도 곧 후방으로 전출 되거나, 아니면 보안대 등 특수부대로 차출되었다.

전방에서 밤샘 잠복근무를 하는 병사들은 그야말로 힘 없고 가난한 백성들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사회 모순과 돈과 '빽'에 놀아나는 병무청 및 군 부대의 고질적인 인사 비리에 대한 불만이 컸다.

셋째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 비리로 얼룩졌다는 점이다. 잠복호에서 밤샘 근무 후 내무반에서 총기손질을 하는 시간, 혹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들리는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 비리의 뉴스에 몇몇 혈기 왕성한 병사들은 자기 M16 소총 방아쇠를 '자동'에다 두고 그들에게 갈기고 싶다고 우스갯소리처럼 지껄이곤 했다. 부정부패의 주인공이 대통령이 되고, 장차관 국회의원이 되는 뉴스에 그들은 더 분개했을 것이다.

필자의 전방소총소대장시절 마지막 근무지에서 소대원들과(뒷줄 가운데 모자를 쓴 이가 필자다)
 필자의 전방소총소대장시절 마지막 근무지에서 소대원들과(뒷줄 가운데 모자를 쓴 이가 필자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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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 체결이 답이다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반도의 평화를 논의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정치지도자의 길이요, 역사에 죄를 짓지 않는 일이다.

나는 남북통일에 앞서 우선 남북 평화협정이라도 체결하라고 남북 정치지도자에게 청원을 드린다. 남북 분단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 나라의 분열과 부정부패, 기회주의자의 발호 등 여러 문제는 백약을 써도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북이 대치하는 가운데 피차 경제발전을 이룬다 해도 핵무기 개발로, 국제무기 강대국으로부터 첨단무기를 사는데 막대한 돈을 쓰기에 남북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다. 또 젊은이들은 휴전선 철조망 곁에서 아까운 청춘을 보내며, 그 모순을 극복치 못하고 일부는 애꿎게 죽거나 부상당하고 있다.

나는 이 시대의 작가로서 6.25 전쟁 64주년을 맞이하며 남북의 정치지도자에게 읍소한다.

"우선 남북 평화협정이라도 체결하라."  

학살 시체더미에서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1950. 11. 14. 함북 덕산)
 학살 시체더미에서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1950. 11. 14. 함북 덕산)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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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6.25, #평화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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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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