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양극화'란 단어는 보통 사회경제적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이제 자연과 생물, 환경에도 대입 가능하다. 인간의 손이 생태계와 자연환경 전반에 '극과 극'의 상황을 만들고 있어서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바퀴벌레는 갈수록 증가하지만 바다 어류는 절반이 고갈됐다. 올해 초, 북미엔 혹한이 닥쳤지만 남미엔 100년만의 폭염이 찾아왔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넘어 인간이 지구의 자연과 환경까지 양극화시키고 있는 모습들이다.

특히 '날씨 양극화'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가장 크게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면산이 무너졌던 2011년 여름, 당시 서초구에는 하루에 비가 392mm 내렸다. 2000년대 연평균 강수량이 1375mm이니 한 해 내릴 비의 30%이상이 하루에 쏟아진 셈이다. 서울에 여름철 집중호우가 쏟아진 날은 40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짧은 시간 안에 좁은 지역에 한꺼번에 퍼붓는 집중 호우가 늘어났다. '물'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위도 극단적으로 변했다. 이미 미국에선 매년 1500명 이상이 더위로 사망한다. 이는 허리케인, 토네이도, 홍수, 지진 피해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다.

날씨만 양극화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국발 미세먼지 문제는 '공기 양극화'마저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중국의 미세먼지는 이미 세계적인 관심사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중국의 심각한 대기오염 상황을 '에어포칼립스(Airpocalypse)'란 단어로 묘사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종말'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반면 지구 반대편인 아마존에선 지구 전체 산소의 5분의 1을 생산해내고 있다. 한 쪽에서 공기를 오염시키면 한 쪽에선 열심히 공기정화를 하는 셈이다. '환경 양극화'는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진행 중이다.

이런 '환경 양극화' 문제를 정상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욕망을 조금 내려놓으면 된다. '부의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고소득층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거다. '환경 양극화'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고 개발하려는 욕심을 줄이고 손을 대지 않으면 상당 부분 나아질 수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쓴 팩션 소설 <인간 없는 세상>에선 인간이 사라지면 불과 몇 달 만에 지구 생태계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실제로 인간의 손이 오랫동안 닿지 않으면 생태계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체르노빌 출입금지구역은 그 증거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자 현재 유럽 최고의 야생생물 서식지 중 하나가 됐다.

이런 '자연 소유욕 내려놓기'에는 '개발 욕망의 포기'만 포함되는 게 아니다. '나무 옮기기'나 '숲 재생'처럼 얼핏 보면 생태계에 도움이 될 것 같은 활동도 해당된다. 자연에 대한 인위적 행위는 모두 독이라는 얘기다. 인도 날곤다 지역에선 생태계 보존을 목적으로 수령이 몇 백 년에 이르는 나무 27그루를 옮겨 심었지만 모두 죽었다. 인간의 호의적 손길도 자연에겐 고통이 됐다. 허리케인으로 숲 전체가 사라져도 손대지 않은 영국 스코드우드 지방의 사례는 그 반대다. 키 큰 나무가 여럿 뽑혔어도 그대로 뒀더니 숲에는 인동초, 헤더 같은 작은 관목이 번졌고 이로 인해 작은 새, 토끼 등이 더 많이 찾아왔다.

'자연 소유욕 내려놓기'는 자연을 '환경'이 아닌 '생태'로 보는 걸 의미한다. 고 박경리 선생은 "'환경'은 나를 중심으로 주변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는 관점인 반면, '생태'는 나를 포함한 자연 구성원 간의 작용-반작용 관계를 살피는 관점"이라고 했다. 즉 '자연 소유욕 내려놓기'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아닌 '자연과의 공존 추구'다. 실학자 홍대용도 '생물이 인간을 보는 입장과 인간이 생물을 보는 입장의 대립을 넘어 하늘이 보는 입장으로 갈 것'을 권고했다. 자연과 '대립'이 아닌 '공존'하라는 얘기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이 지속가능한 관계를 맺을 때, '환경 양극화'와 같은 지구의 경고는 사라질 수 있다.

스웨덴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인간에겐 소유욕과 존재욕이 있다. 소유욕은 경제적 욕망을, 존재욕은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하는 의지를 뜻한다. 그런데 그 존재욕을 희생해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건 병적인 사회다." 이미 인간은 과도하게 존재욕을 희생해 소유욕을 만족시키고 있다. 골프장은 사업자들의 소유욕을 채워줬지만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청계천 사업은 관광객을 끌어들였지만 생태계 먹이사슬을 없앴다. 4대강 사업은 토건업자들에게 일감을 줬지만 심각한 수질오염을 초래했다. 결국 지구는 '환경 양극화'와 같은 증상으로 병들었다. 이는 지구가 우리에게 '소유욕'을 멈추고 '존재욕'을 추구할 것을 종용하는 신호다. 이젠 '자연과 공존'하는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소유욕이 아닌 '존재욕'을 갈망할 때다.


#환경#자연#생태계#양극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