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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워 보이는 고추밭이지만 가까이 가면 시들하다.
 싱그러워 보이는 고추밭이지만 가까이 가면 시들하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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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하늘을 먼저 살핀다. 이것은 몇 주 전부터 생긴 습관이다.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뿌연 안개가 마당 가득한 걸보니 온종일 해가 쨍쨍하겠다. 마당에 피어난 꽃들, 그 모습이 너무나 힘겨워 보인다. 도대체 비는 언제 내리는 걸까. 몇 주째 하늘을 보고 또 쳐다봐도 비가 올 기미가 없다. 마당을 거닐다 흙먼지가 일어나는 걸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난다.

지난 18일, 온다던 비는 찬바람만 몰고 왔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당을 돌아다녔지만 내 머리칼도 적시지 못했다. 농사를 망칠까 걱정이다.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모내기도 고추 모종도 끝냈다. 엊그제는 복분자 수확도 끝냈다고 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아 복분자를 땄지만 씨알이 작고, 일부는 말라버렸단다. 수매가도 떨어져 어르신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멀리서 바라본 고추는 싱싱하게 자라는 듯해도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잎들이 시들해 오그라들어가고 있었다.

"이거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주인장은 웃기만 한다. 헛하고 웃는 것이 그 또한 답답하다는 것이다.

<영조실록>에 보면 긴 가뭄으로 임금이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 후에 곧바로 비가 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런지 않는 걸까? 혹시 종교적인 맥락으로 해석돼 온나라가 시끄러워 지려나? 행여나 대통령이 기우제를 지내면? 하늘이 놀라 눈물을 흘려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산으로 산으로

농업이 중요해지지 않은 뒤로 이런 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가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머리가 복잡하다. 이럴 땐 산으로 가야 한다. 아침을 먹고 집안 청소도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다.

지난해 4월에는 주인장을 따라 하루가 멀다 하고 산으로 갔다. 내가 좋아하는 고사리를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고사리를 꺾기 위해 지난해 4월 한 달간 이 산 저 산 돌아다녔다. 그러나 올해는 개인적 사정으로 4월에는 산을 전혀 오르지 못했고, 5월 중순쯤에야 흙을 밟을 수 있었다.

산을 오르기 위해 주머니에 사탕 두 개를 찔러 넣고, 창이 넓은 모자를 눌러 쓰고, 낡은 땡땡이 가방을 둘러메고 나면 준비가 끝난다. 나는 산에서 산딸기를 봤다는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가방에 반찬통도 넣었다. 고사리를 꺾다가 산딸기를 발견하게 되면 이 반찬통에 담아올 것이다. 아직 산딸기를 보지 못했지만, 생각만으로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산 초입부터 주인장의 뒤꿈치만 보며 걷는다. 5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숨이 차오른다. 산딸기와 고사리를 따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다. 주인장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멀리서도 주인장이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려온다. 나의 숨소리는 그의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달리 거칠다.

"산딸기다."

땅만 보며 힘겹게 걸어가는 내게 들린 그의 목소리. 무겁던 내 발걸음이 일순간 재빨라진다. 한참을 서서 숨을 고르고는 조심스레 산딸기를 내려다본다.

"에게, 요거 밖에 없어요?"

내 손바닥에 세 개의 산딸기가 올려졌다. 그것도 손톱만한 크기의 작은 것이다. 비가 오지 않아 산딸기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그만 익어버렸다고 했다. 이것이라도 고맙다.

비밀스러운 장소

땅속에서부터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온다.
▲ 겸손한 고사리 땅속에서부터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온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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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사리가 많이 나는 지역 여러 곳을 알고 있다. 이곳은 우리에게 비밀스러운 장소다. 우리 외에는 고사리를 꺾는 이를 본 적이 없고, 누군가가 꺾어간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고사리를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고사리는 땅속을 뚫고 나올 때부터 고개를 숙인 채 세상 밖으로 나온다. 고개 숙임이 어찌나 어여쁜지 내 시선을 자꾸만 땅으로 향하게 만든다. 내가 고개를 디밀고 그것을 바라보면 산을 향해 고개를 숙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최대한 땅과 가까이 한다. 그러다 일어나면 다리가 저리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힘이 든다. 그러나 산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몸을 낮추는 것을 택했다. 

고사리가 군집해 있는 곳에서는 항상 무덤을 볼 수 있다. 잠든 이에 대한 미안함이 생겨 그곳으로 발을 들여 놓기가 쉽지 않다.

"실례합니다."

무덤가에 자리한 고사리 군집
 무덤가에 자리한 고사리 군집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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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덤가를 가면 항상 인사를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 무덤 주위나 무덤 위로도 고사리가 피어나는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무덤의 주인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으면 고사리에게까지 자리를 다 내줬을까. 나처럼 고사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오라고 그러는 걸거야.'

고사리 입장에서 보면 무덤 주위가 그들이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무덤 가는 사람의 발길이 뜸하니까. 주인장과 나 같은 집요한 사람을 만나지만 않으면 고사리들은 그곳이 다 제 세상이다.

고사리를 꺾으며 "미안해"라는 말도 반복한다. 고사리에게 몸통을 꺾어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너무 잘 먹어. 허허."

맞다. 주인장의 말이 맞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을 잘 먹는다. 된장국에 넣어서도 먹고, 육개장을 끓여서도 먹고, 볶아서도 먹는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미안하다면 꺾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그 맛의 유혹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날 우리가 찾아간 무덤가에는 야들하고 통통한 고사리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손이 바빠진다. 흙과 가까이 닿은 부분은 질겨서 먹을 수가 없다. 줄기를 만지며 툭하고 끊어지는 부분을 꺾어야 한다. 한 시간 가량 손을 바삐 움직였더니 비닐봉지에 고사리가 가득하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난다.

"제가 심마니 하면 잘할 것 같아요"... 그저 웃지요

내가 산에서 채취한 고사리와 딸기다.
▲ 길쭉 고사리와 동글 산딸기 - 내가 산에서 채취한 고사리와 딸기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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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다 말고 멈춰 섰다.

"심봤다!"
"뭐야? 뭐야?"
"저기, 저기요. 산딸기. 빨간 것이 산딸기 맞죠? 이야!"

산딸기가 붉은 얼굴을 내밀고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반찬통에, 주인장은 모자에 산딸기를 따다 담는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땀이 흐르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도 산딸기만 바라보면 덥지 않다.

"선생님, 저는 심마니가 되면 정말 잘 할 것 같아요. 그쵸?"

산을 내려오면서 내가 한 말이다.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저 웃기만 한다. 5분도 안 돼 숨을 헐떡이던 내가 산을 누비는 심마니를 운운했으니 우스울 게다. 나도 폐활량이 좋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허나 내 몸 속에 심마니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태그:#고사리, #산딸기, #기우제, #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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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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