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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이맘 때 즈음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기자말

러시아의 아침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기차역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 슬류댠카 기차역 러시아의 아침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기차역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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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겨울아침은 어둡다. 한국을 떠나온 지 일주째, 오늘도 어색한 까만 아침을 맞는다. 어두컴컴한 아침풍경은 대략 난감이다. 등굣길 아이들은 야간학교에 다니는 듯하고 출근길 어른들은 퇴근하는 모습을 연상 시킨다. 시계가 틀어진 공간에 뚝 떨어진 기분이다.

슬류댠카 광장 근처에 전시된 멈추어선 기차의 모습. 새로운 숙소를 찾아 헤매다 갈 곳을 잃고 길 거리에 우두커니 선 내 모습을 닮은 듯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 멈추어 선 기차 슬류댠카 광장 근처에 전시된 멈추어선 기차의 모습. 새로운 숙소를 찾아 헤매다 갈 곳을 잃고 길 거리에 우두커니 선 내 모습을 닮은 듯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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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짓에 한숨, 재채기에 타박... 되는 게 없다

현지시간 2013년 1월 22일 오전 8시, 기차역 매표소에 2호실 열쇠를 반납했다. 2호실은 내가 묵었던 역사 안 게스트하우스의 방 번호다. 이른 아침 퇴실을 결정한 이유는 숙박료와 인터넷 때문이다. 이틀 후 환바이칼 열차에 오르기 전까지 묵기에는 시간제 요금이 예상보다 비싸다. 가이드 책이 없으니 정보검색을 위해선 와이파이도 필수다. 수화물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 다른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날이 어두워 마을로 향하는 길을 찾기 어렵다. 애먼 곳을 배회하다 날이 밝자 기차역 앞 육교 건너편의 작은 마을이 보였다. 아침부터 허튼짓에 체력만 낭비했다. 들어줄 이도 없는데 혼자 툴툴거린다. 실수를 줄이고자 인터넷을 사용가능한 곳을 찾아 헤맸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건물은 죄다 기웃거려봤지만 허탕이다. 용기를 내 길 가는 노신사를 붙자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으로 요청했다.

"부찌찌 다브릐. 빠마기찌 므네 빠좔스떠(실례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어젯밤, 러시아어 회화책을 보고 달달 외운 문장이다.

"컴퓨터, 인터넷."

발음과 억양이 부정확한지 노신사가 대답이 없다. 진땀이 흐른다. 이럴 땐 만국공통어 '바디랭귀지'가 정답이다. 손발을 이용해 무던히 애를 쓴 뒤에야 겨우 노신사가 알아듣는 눈치다.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아무튼 그의 손에 이끌려 광장 한편의 건물로 향했다. 건물 외벽에 대형 광고 현수막이 내걸린 사무실이다.

노신사는 사무실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내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아무래도 출근시간이 지체된 듯해 보였다. 그의 친절에 고마움을 표하고 사무실 직원에게 인터넷카드 한 장을 샀다. 그리고 안내에 따라 바로 옆, 우체국으로 향했다.

또, 다시 우체국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코앞에 컴퓨터를 두고도 엉뚱한 곳만 훑었다. 사무실 한 귀퉁이에 자리한 컴퓨터를 발견하자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기계가 이토록 반가운 적이 없었다. 책자에 적힌 사용법대로 전원을 켠 후 본체 카드주입기에 인터넷카드를 넣었다. 제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달랐다. 1시간이 넘게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달랑 사진 한 장밖에 건지지 못했다. 이유는 이렇다. 우선 인터넷 검색창이 열리기까지 한참 걸렸다. 거북이도 이보다 빠를 듯하다. 버퍼링도 심하고 무엇보다 러시아어 자판을 사용하는 게 어렵다.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다잡으며, 익숙한 한국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한 끝에 마우스자판을 클릭해 약도가 그려진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

공들여 찾긴 했으나 약도가 이상하다. 꼬불꼬불 이어진 빨간색 화살표 끝에 'Hostel(호스텔)'이라고 적혀 있을 뿐, 설명이 부실하다. 반복되는 허튼짓으로 애먼 시간과 돈만 낭비한 것 같아 자꾸 한숨을 쉬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 중년 아줌마에게 타박까지 당하고 나니 그야말로 '멘붕'이다.

사건의 발달은 이렇다. 컴퓨터를 사용 중 불쑥 재채기가 터져 나와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를 못 봤는지 한 중년 러시아 아줌마가 내게 걸어와 화를 냈다. 아무래도 모니터와 컴퓨터 자판에 침이 튄 줄 알고 나무란 듯했다. 열심히 손사래를 치며, 설명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다. 참 되는 일이 없다.

축 처진 어깨로 우체국을 빠져나왔다. 일이 꼬이니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약도가 그려진 휴대폰 사진 한 장이다. 이대로라면 와이파이도 안 되는 비싼 숙소에서 이틀을 더 묵어야 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약도를 천천히 살펴봤다. 우체국서 그리 멀지 않는 지점에 '호스텔(Hostel)'이 있다.

슬류댠카는 우리나라의 작은 면단위 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시골동네였다.
▲ 슬류댠카의 거리 슬류댠카는 우리나라의 작은 면단위 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시골동네였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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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쓸 방과 간단한 요리가 가능한 부엌... 끝은 해피엔딩

약도를 따라 호스텔로 짐작되는 위치에 도착했다. 외형을 보니 전혀 호스텔 같지 않다. 일단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본다. 인기척이 없다. 혹시 하는 마음에 대담하게 열린 대문을 비집고 들어가 현관을 두드린다. 역시 고요하다. 정말,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저 멀리 걸어오는 중년의 아줌마에게 다가갔다.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가 도움을 청했다. 잠자는 모양새를 취하니 움찔하던 그가 웃으며,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아무런 말이 없는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 한 상가 앞에 멈추어 섰다.

침묵을 깬 그는 기다리란 몸짓을 하곤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다른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는 새로운 여자를 쫓아가라며 손짓을 하곤 작별인사를 한다. 그의 친절에 "스바씨바(고마워요)"를 외치고 새로이 등장한 여자를 따라 나섰다.

두 번째 만난 여자는 걸어가며 누군가와 계속 전화통화를 했다. 간혹 고개를 돌려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을 했지만 별다른 말이 없다. 아까 와 본 광장을 지나쳐 바로 옆 도로 인근 붉은색 벽돌로 치장된 건물 앞에 두 번째 여자가 멈추어 선다.

이윽고 출입문을 열고 나온 또 다른 러시아 여자가 나를 반긴다. 그제야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두 번째 여자는 호스텔을 운영하는 세 번째 여자와 전화통화를 한 것이었다. 날 세 번째 여자에게 맡기고 떠나는 두 번째 여자에게 거듭 "스바씨바"를 외치고 새로운 숙소로 걸어 들어갔다.

인터넷이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곤 모든 게 만족스럽다. 혼자 쓸 방과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 그리고 세탁실과 화장실, 욕실까지 역사 안 게스트하우스보다 낫다. 악수로 계약을 체결하고 기차역 수화물 보관소로 가서 짐 가방을 찾아 되돌아왔다.

세 번째 만난 러시아녀, 집주인 아줌마는 다정다감했다. 한국에서 여행을 왔다는 소리에 상당히 호감을 보이며, 한국어 "안녕하세요"를 어눌하게 발음했다. 그의 사무실 한쪽 벽면을 채운 액자를 보니 한국인 여행객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있다. 만남을 기념하며, 서로 동전을 맞교환한 뒤 새로운 쉼터에 짐을 풀었다.

침대에 널브러지듯 눕자 안도의 탄식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다. 올려다 본 천장을 스크린 삼아 새로운 휴식처를 찾기까지 배회한 과정을 그려본다. 코미디 영화가 따로 없다. 끝이 해피엔딩인 게 천만다행이다.

함께 술을 먹자고 권한 러시아 남. 그는 수차례 이름을 가르쳐 주었지만 너무 어렵고 길어 미처 외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매번 제대로 이름 못 부르는 내게 웃음으로 화답하고 괜찮다며 술잔을 부딪혔다.
▲ 숙소에서 만난 러시아남 함께 술을 먹자고 권한 러시아 남. 그는 수차례 이름을 가르쳐 주었지만 너무 어렵고 길어 미처 외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매번 제대로 이름 못 부르는 내게 웃음으로 화답하고 괜찮다며 술잔을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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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세 남자와 어깨동무... 이국땅서 느낀 한국의 정

늦은 밤 시간,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 보니 옆방에 묵고 있는 러시아 남자다. 그와는 숙소 시설을 둘러보다 눈인사를 나눈 사이다. 술병을 손에 든 그가 함께 술을 마시자고 권한다. 잠도 오지 않아 무료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를 따라 부엌으로 향하니 또 다른 두 명의 러시아 사내들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반긴다. 의자에 앉아 맞은편 남자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들고 함께 건배를 외쳤다.

술이 거하게 취했을 즈음, 어느새 그들과 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했다. 세 남자에게 그동안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러시아 여행 계획을 몸짓으로 설명하자 그들은 휴대폰에 저장된 러시아 곳곳의 사진을 보여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술자리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하지만 자정 무렵, 주인 아줌마가 등장하면서 술자리는 끝이 났다. 세 명의 러시아 남자는 주인 아줌마에게 꾸중을 들었다. 반면 주인 아줌마는 내게 "혹시, 저들이 억지로 술을 먹이며 괴롭히지 않았냐?"며 걱정을 해준다. 좋은 친구들이고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단호한 주인 아줌마에 의해 그들과의 왁자지껄한 시간은 끝이 났다. 한바탕 소동을 마무리하고 침대에 눕자 취기가 오른다. 문득 누가 러시아가 위험하다고 했는지 궁금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러시아로 떠난다는 말에 우려부터 했다.

그러나 직접 여행을 하면서 들은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 섣불리 예단하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러시아도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는 점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러시아를 향해 쌓여 있던 마음의 벽이 조금 허물어지는 밤이다.

덧붙이는 글 | 여행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오블(http://blog.ohmynews.com/kaos80)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러시아 여행, #러시아, #슬류댠카 여행, #슬류댠카, #바이칼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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