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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풍경. 관람객들이 최란수 명창 유품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전시장 풍경. 관람객들이 최란수 명창 유품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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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고 최란수(전라북도 무형문화재 2호) 명창의 삶과 예술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전시회가 <월산 최란수 명창의 삶과 예술>이란 주제로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3층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8월 28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2014 지역 인물 조명 시리즈 두 번째 기획전으로, 지난해 작고한 최란수 선생이 평생 득음과 명창의 꿈을 품고 국악인이 되어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노력했던 치열한 삶과 지역사랑 등으로 꾸며졌다.

전시장 입구 벽면에 걸린 최란수 명창 말풍선과 그의 스승 박초월 명창
 전시장 입구 벽면에 걸린 최란수 명창 말풍선과 그의 스승 박초월 명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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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최 명창 유족이 기증한 유품 200여 점과 남원 시립국악단 대여 자료를 토대로 5개 주제 테마와 2개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전시장 입구 벽면에 최 명창의 일생을 안내하는 다양한 인물 사진과 구수한 남도사투리가 섞인 말풍선은 마음씨 고은 이웃집 아낙처럼 방문객들을 다정하게 맞이한다.

전시장 1쇼 케이스에서는 '소리꾼을 꿈 꾼 계집아이'란 주제로 최 명창이 생전에 사용하던 여행용 가방과 장신구, 각종 화장품, 경대, 부채, 북, 가야금 등을 선보인다. 2쇼 케이스에서는 이기권, 박초월, 강도원 등 최 명창 스승들의 이력과 경력을 소개하고, 3쇼 케이스에서는 최 명창의 판소리와 예술가 정신을 다룬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4쇼 케이스에서는 '월산의 제자들'이란 주제로 최 명창 초창기 제자 및 전수자와 이수자 자료가 전시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월산이 만든 군산의 소리판'이라는 주제로 최 명창의 활동과 그에 의한 군산 판소리 문화 발전상을 소개하고 있어 한동안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인천에서 왔다는 50대 주부가 포토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인천에서 왔다는 50대 주부가 포토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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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앞 세미나실에서는 판소리 관련 학습 및 영상이 상영되고 있으며, 복도 끝에는 관람객이 판소리 고수가 되어 최란수 명창과 공연을 하는 모습을 연출해 볼 수 있도록 포토존이 운영되고 있어 흥미를 돋운다.

월산 최란수 명창은 누구?

평생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노력했던 월산 최란수 명창은 1931년(실제는 1935년) 전북 임실군 가단면 옥정리 손실마을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둘째 딸(1남 3녀)로 태어났다. 7세 때 부모를 따라 전주로 이사하여 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전주국악원 담 너머로 들려오는 판소리에 매료되어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다.

최란수 명창 20대 모습
 최란수 명창 20대 모습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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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국악원이라고들 하는데, 옛날에는 '성학교'라고 했어요. 성학교, 권번 그렇게 두 가지로 불렀제. 초등학교는 6학년 졸업도 못 해 부럿소. 예, 안가불고 도시락만 까먹고, 마루에 앉아서 보고 배우고, 그래가지고 학교를 워낙 많이 빠지고 안가니까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조사가 나왔어. 애기가 순전 안 오고 그러니 이게 웬일이냐고... 그래갖고 탄로가 났어··".(최란수 구술 대담집 12쪽)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냥년 되야서 최씨 집안 망칠라고 그러느냐!"며 온갖 욕설과 매질을 해댔다. 그래도 어머니는 "사주팔자를 그렇게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말렸다.

13세 때 전주국악원 이기권 원장 집(익산)으로 가출한 최란수는 어머니의 적극적인 보살핌으로 첫 스승인 이기권 명창을 집으로 모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등을 배웠다. 20세에 득음과 명창의 꿈을 품고 상경하여 박초월(1917~1983) 선생을 평생 스승이자 어머니처럼 모시면서 동편제 판소리를 익혔다.

동편제는 판소리 전승 지역의 특징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구례·운봉·순창·흥덕 등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전승된 소리를 일컫는다. 서편제가 섬세한 기교의 비애가 섞인 계면조 구조를 이루는 데 반하여 동편제는 웅장하면서 호탕한 소리와 무거운 발성, 서편제보다 음을 높게 들어내는 발성이 특징으로 전해진다.

어려운 여건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오직 명창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득음을 위한 고행의 길을 걸었던 최 명창은 수없이 많은 자기극복의 시간을 감내하였다. 또한, 강도원 명창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면서 배움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고통이 있었기에 그 스스로 "명창은 타고난 재능과 인내력, 그리고 고집이 있어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승으로, 아내로, 여인으로 그리고 소리꾼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오며 판소리를 하는 사람과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많이 늘리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한 최 명창은 1978년 전북 군산국악원 강사로 초빙되어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군산과 인연을 맺는다. 아래는 사단법인 금강문화예술원 김갑식(71) 원장의 회고.

"정읍국악원 강사로 있던 최란수 명창을 두완수 국악협회 군산지부장(군산국악원장 겸임)이 군산국악원 강사로 영입했죠. 그때(1978) 제가 군산국악원 이사였는데, 최 명창 살림집을 구하러 다니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각납니다. 최 명창은 인물은 물론, 대인관계도 좋았고, 소리(唱)도 뛰어났죠. 특히 <흥보가> 박타는 대목에서 '흥보가 밥을 하늘로 던져놓고 똑딱, 던져놓고 똑딱, 던져놓고 똑딱' 받아먹는 가락은 어느 제자도 흉내를 못 냈어요."     

최란수 명창은 1979년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군산지부 설립을 추진, 초대 지부장을 지냈다. 그 후 제6회 전주대사습대회 판소리 부문 장원, 전라북도 문화상, 제1회 남도예술제 최우수상 등을 받았고, 2002년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유치하는 등 군산은 물론 전북의 판소리 보존과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이러한 노력은 새만금 전국 판소리·무용경연대회로 이어져 2014년 13회째를 맞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최란수 명창,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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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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