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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유감]의 표지엔 제목과 세로로 저자 이름, 그리고 그 위에 책을 압축적으로 소개한 글이 박혀 있다. '법'과 '사람', '정의'라는 파란 색 글씨에서 지은이의 일탈을 엿볼 수 있다.
▲ [판사유감] 표지 [판사유감]의 표지엔 제목과 세로로 저자 이름, 그리고 그 위에 책을 압축적으로 소개한 글이 박혀 있다. '법'과 '사람', '정의'라는 파란 색 글씨에서 지은이의 일탈을 엿볼 수 있다.
ⓒ 21세기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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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0일 오후 5시 25분]

법의 굴레에 얽혀 살면서도 법과는 무관하게 살아왔다. 아니 무관하게 살아왔다기보다 법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주위 평도 아마 이런 뜻으로 하는 말일 터이다. 하지만 아무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법'하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은 왜인가. 죄의 이방지대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법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관계하게 된다. 그 중 사회적 약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재판 중인 지인을 위해 탄원서를 작성할 일이 생겼다. 탄원서는 일정한 양식이 없이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으면 된다지만 그래도 법에 대해 조그마한 지식이라도 갖고 써야 할 것 같아 여러 날을 망설였다. 탄원서에는 진정성뿐 아니라 책임성도 따라야 하고 또 사회의 일반적 가치 척도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야 하기 때문에 더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럴 즈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문유석 판사가 쓴 <판사유감>(21세기북스 출판)이라는 책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진학하고 또 어렵다는 사법시험 통과해서 법관으로 있는 이가 무슨 유감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언뜻 스쳤지만 딱딱한 법관의 건조한 글에서 탄원서 작성에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요즘은 글의 시대가 아니고 말의 시대이다. 말만 잘 하면 어디서든 한 몫 할 수 있다. 시대의 발달로 미디어 산업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이 이런 흐름을 형성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글쓰기는 그렇게 중요한 영역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말은 이내 사라지는 것이지만 글은 반영구적이다. 오래도록 남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판사유감>은 젊은 부장판사가 법원에 종사하면서 느낀 감상을 적은 글이다. 저자 소개에서 밝히고 있듯이 '판사유감'의 원 뜻은 재판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은 것인데, 또 달리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표현한 글이기도 하다. 후자의 의미라면 '遺憾(유감)'이란 한자 말이 더 적당할 것이다. 법관들의 세계는 우리 일반 시민들과는 다른 곳이어서 미처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 책에 정리한 글들은 이미 글쓴이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려 큰 호응을 얻은 글들과 또 일부는 '법원회보' 등 이미 언론에 소개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검증된 글쟁이인 셈이다.

법관은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법률에 근거해 공정하게 판결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상 싶다. 그러나 나는 문유석 판사의 <판사유감>을 읽는 내내 입에는 웃음기, 마음엔 따뜻함을 누릴 수 있었다. 법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공유 의식이라고 할까, 큰 범주에서의 동류의식이라고 할까,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친근한 법관'쯤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하얀 표지에 제목의 검정 글씨, 표지 상단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라는 책 내용을 압축한 소개, 거기서 '법', '사람', '정의'라는 단어를 청색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면 천상 칙칙한 심상의 법원에서 고리타분한 법조문을 갖고 판결을 내리는 법관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 단어의 파란 색상은 그런 어두운 법조 타운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어보겠다는 몸짓으로 내게 비춰 관심을 갖게 했다.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200쪽 중반의 분량이다. 1부 '사람을 배우다' 그가 판결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써 내려간 글이다. 특히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근무할 때 만난 빚쟁이들의 막다른 인생 사연을 판사의 눈을 통해 그대로 클로즈업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동병상련에서 갖는 읍소형 글이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으로 승화시킨 서민의 애환도 아닌, 판사를 통해 객관적으로 조명되는 인생 실패자의 모습 속에서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어서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2부 '판사, 세상을 배우다'는 법조 사회를 세상과 비교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초임부장일기'라는 제목으로 법관 게시판에 연재했던 글들 같은데, 그의 생각과 삶이 소롯이 들어난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법조문화에 대해 돌직구가 아닌 애교섞인 이의 제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동의를 받아낸다는 뜻이다. 고정된 조직문화는 제3자의 눈에 쉽게 쉬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나 문유석은 자기 조직의 꽉 막힌 부분을 유머러스하게 잘 기록하고 있다.

주심과 배석 판사의 관계는 재판정 밖에까지 이어지는데, 그는 세 사람을 '묵언 수행' 또는 '삼각편대'라고 표현했고, 회식 자리에서 상급자에게 무릎 꿇고 술 따라 올리는 것을 '영정 사진'에 비유한 것도 재미있었다. 사생활도 없이 야근하며 밤낮 재판에 매달리는 것의 부당함도 외칠 줄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의 시야가 밉지 않은 것은 그의 이런 행동이 고정된 법조 문화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법관은 사실을 밝혀내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이다. 당연히 그들이 생산해 내는 글도 사실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유석 판사의 글은 그것 너머 있기 때문에 독자의 눈을 오랫동안 잡아두게 된다. 그를 열린 마인드를 가진 법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은이 문유석 판사는 본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글쓰기 재주가 특출한 사람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것은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후천적 노력의 산물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의 고전 등 많은 독서량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글쓰기를 즐긴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 등 각 방면에 해박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 눈치챌 수 있었으며 특히 한 외고(外高) 특강에 가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 중 첫 번째로 든 것이 인류의 문화유산인 고전을 읽는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인이 경험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요즘 출판 추세가 책을 만들면서 추천을 받는 것이다. 자기 과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방면에 아니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명망가들을 추천인으로 내 세우기도 한다. 젊은 부장 판사가 출판하는 책이라면 그가 속해 있는 법원장 나아가 존경하는 원로 법관의 추천사를 받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보수적 법조 사회와 어울리지 않게 그는 문화심리학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뮤지션 등 자기 분야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세를 크게 타고 있다고도 볼 수 없는 세 사람의 추천 글을 받아 실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 글쓴이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변화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문유석 판사의 글을 읽으면서 큰 바위를 들겠다고 자기만큼의 무게가 나가는 지렛대를 준비하는 선구자를 보는 듯해 즐거웠다. 변화를 극히 싫어하는 법조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조금만 드러나는 언행을 해도 '혼자 잘 났냐'는 사시(斜視)의 눈들이 매섭게 노려본다. 하지만 시류의 변화에 예외 영역은 없다. 법조계도 마찬가지이다. 문유석 판사를 비롯해 젊고 실력 있는 이들로 인해 육중한 바위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를 바란다.

문유석의 글은 무엇보다도 판사의 손에서 보기 힘든 따뜻함이 배여 있다. 그 따뜻함은 자기를 드러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서민들과의 교류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 법관은 판결로 모든 것을 말한다지만 나는 문 판사에게 판결문 이외의 글로 자신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고 세상을 말하기를 권하고 싶다. 그는 분명 재판정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따뜻한 판사와 재판정은 법의 규제와 보호를 받고 있는 모든 국민이 바라는 것이리라.


판사유감 -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

문유석 지음, 21세기북스(2014)


태그:#판사유감, #문유석 판사, #21세기북스, #따뜻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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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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