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 162호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만취당이 보물 1825호로 승격되었다. 지난 9일 문화재청이 경남 양산 통도사의 영산전 및 대명광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한 '의성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김사원(金士元)이 1584년에 세운 건물이다. 1727년 증축, 1764년 재증축을 거쳐 현존의 T자형으로 완성된 만취당은 16세기 사대부가의 주거 생활과 선비 문화, 사회적 요구에 따른 건축적 변화 과정 등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사원은 평생을 두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과 싸웠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농사를 지은 일하는 선비였고, 성품이 온화하고 착하여 재산을 털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흉년이 들면 벼이삭 남은 것까지 털어 사람들을 구제했는데, 너무 가난한 이들이 갚지 못할 것을 걱정할까 봐 차용 문서는 불태웠다. 직접 동네규약[鄕約]을 만들어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이끌었고, 그래서 사촌마을은 유난히 풍속이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그의 집을 '의로운 창고'라 불렀다.
김사원은 죽을 때까지[晩] 소나무처럼 푸르게[翠]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자신의 호를 만취당이라 지었다. 그리고 1582년부터 1584년까지 3년에 걸쳐 집을 지은 그는 자신의 호를 집이름으로 썼다.
김사원이 집의 이름을 만취당으로 정한 것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김광수 선생과도 연관이 있다. 김광수는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길을 마다하고 사촌마을에 숨어[隱] 살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송은(松隱)선생이라 불렀다. 지금도 만취당 담장 옆에는 그가 심은 수령 500년의 거대한 향나무가 기념물 107호로 지정된 채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소나무도 아닌 그 향나무를 만년송(萬年松)이라 부르며 선생을 기리고 있다. 김사원은 증조할아버지 김광수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자신의 호를 만취당이라 했던 것이다.
김광수 선생은 류성룡의 외할아버지로도 유명하다. 류성룡이 1542년 사촌마을에서 태어났을 때에는 만취당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지만, 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영귀정(문화재자료 234호)은 마을 앞을 한가로이 흐르는 미천 물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기 류성룡은 미천 물길을 바라보며 외할아버지 김광수가 읊조리는 시를 듣기도 했을 것이다.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 빛이 낯을 덮네만년송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