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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are you?"
"Fine."

내 얼굴빛이 썩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고 더 말할 기운도 없었다. 테헤란의 북부버스터미널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리고 테헤란 구경은 커녕 나는 그날 안으로 어떻게 하든 터키 방향 국경행 버스를 타야만 했다. 카샨에서 충고해준 대로 한국대사관에 가서 "돈이 다 떨어졌어요"라고 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현금인출이 가능한 터키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돈은 이제 1만8천토만(우리 돈으로 약 1만8천원)이 전부였다. 호텔비와 테헤란까지 차비를 내고는 밥도 챙겨먹지 못한 채 이 돈이 국경행 버스표를 사기에 충분해야 할텐데 조마조마해 하며 달려온 참이었다.

타브리즈에서 이스파한까지 버스비가 1만6천 토만이었으니, 이스파한보다 거리가 짧은 테헤란에서 타브리즈를 거치지 않고 국경도시까지 직행하면 간당간당하게나마 버스비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테헤란이 얼마나 큰 도시인지, 카샨발 버스가 정차한 남부터미널에서 국경행 북부터미널은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나는 시내버스차비로 동전 한 닢 내는 것도 조마조마해 해야 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국경행 버스는 이미 막차가 떠나버린 후였다. 어쩔 줄 몰라하자, 영어를 못하는 터미널의 버스회사 직원들이 나를 벤치에 앉아있는 노신사에게로 데려갔다.

그가 차분하고 정중하게 내게 인사했다. "하와유?"하고. 나는 "파인", 해놓고, "앤드유?"도 붙이지 못했다. 무작정 차비부터 물었다.

"얼마죠?"

노신사가 대답했다.

"8만토만이에요."
"뭐라고요?"

순간 만 단위와 토만이라는 말과 머릿속의 계산이 뒤엉키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어지지 않았다.

"그럼, 타브리즈 가는 버스는요?"
"그것도 8만토만이지."

아아, 믿고 싶지 않았지만, 노신사의 혀를 통해 나온 8만토만이라는 낱말이 허공을 붕 떠 날아와서는 나의 뇌리 속으로 들어와 내 눈물샘을 툭 건드렸고, 무슨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타브리즈에서 이스파한은 1만6천토만에 왔다고, 차비가 왜 그렇게 제멋대로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당황한 노신사가 왜 그러냐고 물을 때, 내 손에는 1만8천토만이 든 지갑과 쓸모없는 비자카드가 들려있었다.

카샨의 은행직원분들

전날 밤 카샨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현금인출기를 찾았다. 바꿔 둔 현금이 다 떨어져 이젠 돈을 찾아서 쓸 차례였다. 헌데 인출기가 원하는 대로 지폐를 뽑아내주지는 못하고, "다른 카드를 사용하라"고 했다.

'밤이 늦어 그런가?'

다음날 아침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떴다. 뭐, 다른 은행으로 가볼까. 눈에 보이는 대로 몇 군데의 ATM기를 찾아 시도했지만,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여행 중에 카드에 손상이 있거나, ATM기에 문제가 있을 때는, 은행창구에 카드와 신분증을 보여주고 돈을 찾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썩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찾아들어간 골목은행의 창구에서는 중앙은행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통 골목을 지나서 중앙은행을 찾아갈 때까지도 난 느긋하기만 했다. 헌데, 1층 창구에서는 나를 2층으로 올려 보냈고, 2층은 일반 업무를 보는 곳이 아닌 듯했다. 뭔가 좀 이상하네 싶어 망설이는 내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고, 난 카드를 내밀었다.

"돈을 좀 찾고 싶은데요."

그는 내가 내민 카드를 보더니, 왠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잠시만요" 하고 사라진 사이, 다른 직원이 내게 물었다.

"달러나 유로는 없어요?"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텅 빈 지갑을 열어 보여주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어디론가 사라졌던 이가 내 카드를 들고 돌아왔고, 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가 살짝 망설이더니 말한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네? 하고 되물었고, 그가 설명했다.

"이란에서는 이란에서 발행된 카드만 쓸 수 있어요."
"네?"

그제서야 그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곳은, 이란인 것이다!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나라이니, 당연히도 Visa카드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의 여정이 거의 끝날 때까지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정말 미안해하고 있었다. 이마에 땀까지 흘리며. 동양에서 온 어리숙한 여행자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혹시라도 가능한 방법이 있는지 찾기 위해 그는 여기 저기 뛰어다니고 멀리 전화까지 해가며 어떻게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터인데!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내 카드를 들고 다니며 그 모든 수고를 기꺼이 진 후에야 비로소 내게 말한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나는 뭐라고 더 부탁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그런 수고가 감사하고 미안할 뿐이었다. 어서 그 자리를 떠야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쩌랴, 어떻게든 되겠지, 어디 가 앉아서 일단 머릿속을 정리해보자.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잠깐만요!"하며 한 청년이 급하게 뛰어 내려온다. 내 앞에 선 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지갑을 열더니, 5천토만짜리 한 장을 꺼내어 손에 건네주는 것이다.

"테헤란으로 가세요. 테헤란에 가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이건 차비하세요."
"어... "

나는 놀라서 손에 쥐어진 돈을 보다가 그 얼굴을 보다가 어쩔 줄 몰라했다. 전화번호를 주면 갚아드리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내 말이 제대로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지갑을 한 번 더 열어 5천토만짜리 한 장을 더 꺼내주고는 올라간다. 당황스럽다.

얼굴이 아주 앳되어 이제 갓 신참인 것 같은데, 월급이라고는 10만토만 남짓일텐데! 되돌려 받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않은 채 순수히 돕는 의도였음을 뒤늦게 알아챈 나는 그의 뒷통수에 대고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그가 다시 내려오더니 사무실로 나를 데려간다. 사무실에 계시던 분들이 들어서는 나를 모두 주시하는가 하더니, 그 중 한 분이 모아 둔 지폐 한 뭉텅이를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나는 순간 놀라고 고맙고 당황스럽고 온갖 감정에 휩싸인다.

"고맙습니다."

겨우 소리 내어 말하는 내게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테헤란으로 가세요.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면 도와줄 겁니다. 그 돈이면 테헤란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그 목소리에, 눈빛에 묻어있는 진심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나는 두 손 가득 쥐어진 돈을 보다가 그 분들의 얼굴을 보다가 여러 차례 고개 숙여 절을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내 부주의함이 만들어낸 실수인데, 본인의 잘못인양, "I am sorry" 라 말하며 정말로 애석해 해주었던 사람들. 내가 "I am sorry"라고 해야 했는데. 당신처럼 친절한 사람들이 금융제재를 받게 해서 미안하다고. 감히 비자카드를 내밀었던 나의 무신경함을 사과했어야 했는데!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폐들. 1천토만, 5천토만 몇 장에 1만토만짜리까지 섞여있다. 마음들. 아아 고마운 마음들! 나는 또 눈물이 났다.

아아! 고마운 이란 사람들

"울지 말아요."

노신사가 말한다.

"걱정할 것 없어요."

그의 음성이 부드러웠다.

"나한테 버스가 있어요. 밤 10시에 타브리즈 가는 버스야. 내가 한 자리 만들어줄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멍하게 서있는데 그가 나를 다독인다.

"타브리즈에 도착하면 거기서 국경행 버스를 갈아타면 되어요. 내가 친구한테 말해둘테니 걱정말아요. 그 친구가 버스 갈아타는 것까지 도와줄 거야. 자, 대합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노신사는 버스회사의 사장이었던 것이다! 묻지도 않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그는 나를 대합실로 보낸 후 누군가를 불러 뭔가를 지시하고는 나를 가리켰다. 그런 후에도 벤치에 앉아 다른 이들과 환담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은 대합실을 나와 벤치를 지나야만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기 전부터 화장실이 급했던 나는 참지 못하고 결국 대합실을 나와 벤치 앞을 지나서 화장실을 가야 했는데, 민망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올 동안 눈만 내리깔고 종종 걸음으로 지나쳐버려 놓고는, 버스 타기 전에 확실하게 인사해야지 생각했는데, 대합실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5시간을 기다릴 동안 어느 사이에 그는 사라져버렸다.

손님들로 가득했던 대합실의 의자들도 듬성듬성 비어갈 무렵, 어둠이 사방에 깔렸을 때 나는 무사히 타브리즈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3열 좌석의 VIP버스는 우리나라 우등버스보다도 더 고급스러웠다. 많지도 않은 좌석을 손님들이 다 채우는 것을 보니, 다른 손님에게 팔 수도 있었던 좌석을 남겨 내게 준 것이 분명했다.

자리에 앉자 그날 아침부터 밤까지의 일들이 안도의 한숨 속에 떠오른다. 기꺼이 돈을 모아 내 손에 쥐어주었던 카샨의 은행직원분들, 그 돈을 들고 마음 졸이며 버스와 전철과 다시 버스를 갈아타며 이곳까지 달려온 시간, 그리고 비싼 좌석을 나를 위해 내어준 버스 회사 사장님!

버스는 달려 아름다운 불빛이 출렁이는 테헤란의 야경을 보여준다. 마치 길 떠나는 이를 위한 선물인 것처럼! 

미처 구경도 하지 못한 도시는 그렇게 따뜻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버스회사 사장님도, 카샨의 은행직원분들도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 하루도 신께 경배 올리며 잠자리에 드시겠지.

나도 기도한다.
보잘 것 없는 이방의 나그네에게 기꺼이 베풀어주신 선행이 천국의 문서에 기록되기를...!

 신의 은총처럼 별은 빛나고, 그 분들의 마음이 내 기억 속에서 빛나고!
▲ 테헤란의 밤 신의 은총처럼 별은 빛나고, 그 분들의 마음이 내 기억 속에서 빛나고!
ⓒ 다야 inshini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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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곤 하는 그들 나라에 종종 이웃나라가 미사일을 쏘겠다고 엄포를 놓곤 한다. 나는 "앤드유?" 하고 묻지 못한 것을 기억해 내었다. 날마다, 괜찮으시냐고 안부인사 전하고 싶다.

"I am fine, and you? 테헤란도 안녕하시지요?"

이 여행기를 이란에서 만난 고마우신 분들께 바칩니다.


태그:#이란, #테헤란, #사막의사자, #다야여행기, #타브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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