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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차항구 개발 기념비  그러나 항만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일반 포구가 되었다.
서거차항구 개발 기념비 그러나 항만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일반 포구가 되었다. ⓒ 이재언

서거차도(西巨次島). 거차도는 두 개로 동, 서로 나뉘어져 있다. 동측에 있는 섬을 동거차도, 서측에 있는 섬을 서거차도라 부른다. 서거차도는 면적 2.831㎢, 해안선 길이 11㎞, 동거차도가 2.9㎢ 으로 서거차도 보다 약간 큰 편이다. 거차도는 조도군도에 속한 섬으로 맹골도와 곽도를 빼놓고는 가장 바깥쪽에 있는 섬이다. 서거차도는 인근 내륙인 진도의 팽목과 26km, 목포는 96km 떨어진 섬이다.

1600년대 말 한양 조씨 조천배의 선조가 처음 섬에 들어왔고, 82가구 162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1970년대만 해도 150세대 900여 명 이상의 주민이 살았고, 초등학교 학생만 140여 명이나 되었다. 1970년대 당시에는 해군에서 설립한 고등 공민학교도 있었는데, 학생수가 30여 명쯤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학생 두 명에 선생님 한 분이라, 아주 작은 규모의 분교가 되어버렸다.

생활권인 목포와는 96km 떨어진 서거차도는 목포에서 신해호를 타면 34번째 종착지다. 이 여객선은 육지에서 꼬박 7~8시간이 걸린다. 예전에는 동거차도 보다 서거차도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소위 잘 나가는 섬이었다. 그 이유는 서거차도에는 큰 포구가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특히 겨울에는 배석이 좋아서 어업전진 기지로 지정 되어 수많은 어선들이 드나는 번성함을 누렸던 섬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서거처도는 썰렁하고 동거치도는 멸치어장 때문에 해마다 호황을 누리는 부자 섬이 되었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일반 여객선이 다니던 시절 목포에서 종점인 서거차도까지는 장장 13시간 정도 걸렸다. 이른 아침에 목포를 출발한 배는 수많은 섬을 경유하고 저녁에야 종착지 서거차도에서 배를 대고 하룻밤을 보냈다.

여객선은 낡은 목조선으로 속력이 얼마나 느린지 사리 때 조류를 거슬러 갈 때는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술취한 사람처럼 느리게 올라갔다. 서거차도에서 13시간 정도 배를 타고서 저녁 목포에 도착할 무렵에는 기진맥진 한 상태로 승객과 선원 그리고 배가 지처서 닻을 내린다.

이렇게 완행 버스 같은 배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는 속력이 느리고 수많은 섬을 경우하며, 선착장 시설이 미비한 시절이라 객선이 들르는 섬마다 종선이라는 조그만 노 젖는 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 종선이 나오면 객선에 대고 그때서야 사람과 짐을 올리고 내린다.

동거차도 동륙 마을 멸치잡이 배  가난했던 동거차도가 이제는 서거차도 보다 잘 산다.
동거차도 동륙 마을 멸치잡이 배 가난했던 동거차도가 이제는 서거차도 보다 잘 산다. ⓒ 이재언

안타까운 것은 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거칠면 섬에서 종선이 나오지 못하고 그 섬에 내려할 사람들은 다음 섬에서 내려야했다. 엉뚱한 섬에 내린 승객들은 파도가 잔잔하기를 기다렸다가 어선이나 자기네 섬의 배를 불러서 가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이런 일은 없지만 예전에는 섬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두 번씩은 겪었던 아픔이었다. 조그만 섬 쥐꼬리만한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어부로 살아도 가난을 면치 못했던 것이 섬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네 전철을 밟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서 자녀들을 뭍으로 보내 중·고등학교를 보내기도 하였다.

지금 젊은이들은 예전과 달리 목포로 바로 가지 않고 이 객선을 타고 진도 팽목항에 내린 후에 버스로 진도읍으로 나간 뒤 시외버스를 타고 목포로 간다. 시간은 거의 같고 돈은 더 많이 들지만, 배 타는 것이 너무 지루하여 이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짐이 많고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아직도 이 배를 선호한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여객선을 타면 어찌나 많은 섬을 들르는지 힘들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내 집이 있고 농토와 작은 배 그리고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이기에 함부로 떠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 그래도 어느덧 섬은 아이들 울음소리가 끊기고, 아침저녁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던 굴뚝은 막힌 지 오래되었다. 50, 60대의 섬주민은 거의 육지로 이주를 하고 대부분 70, 80대의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어느 연세 지극한 섬주민의 말을 빌리자면 '발 잘린 문어처럼 오도 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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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차도 항구 입구   하얗고 빨간 등대가 보인다
서거차도 항구 입구 하얗고 빨간 등대가 보인다 ⓒ 이재언

선착장의 물양장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온통 시멘트 바닥으로 축조한 흔적이 역력하다. 원래 이곳에는 자갈밭이 있었으나, 과거 어업전진기지 공사를 하면서 바닥공사를 한 것이다. 3종 어항인 이곳은 IBRD 차관으로 지난 1979년 12월에 착공, 1984년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동방파제는 230m, 서방파제는 175m다. 그리고 물양장은 762m라 한다.

물양장 부근 녹지공간에 '서거차항 준공기념비'가 서 있고, 물양장 가운데에는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물양장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끄트머리에 해양경찰서 거차출장소가 있고 그 아래쪽으로 서거차어업인복지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부근에 보건진료소도 있다.

진료실, 건강관리실 등 최신식 시설을 갖춘 이 보건소가 건립된 것은 지난 2007년이다. 길은 파출소 옆으로 나 있었다. 보건진료소 뒤로 난 오르막길은 '송림로'로 이 도로를 타고 구불구불한 몇 구비를 지나면 상죽도 북쪽 해안과 마주보는 지점에 이른다.

물양장 바로 뒤쪽은 마을길이다. 마을길과 물양장 사이에 녹지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물양장에서 이 마을길로 이어지는 길은 많다. 길 시작점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밭길로 북쪽으로 이어지는데, 갯바위 지대인 해안으로 이어진다.

마을이름은 '아랫마을'이라 한다. 그렇게 많은 가구수는 아니며, 큰 도로 중간중간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있고 마을 뒤로는 밭이다. 이곳에는 밭이 많지만 논도 더러 있다. 가게도 여럿이다. 이곳의 아랫마을은 영어의 '다운타운downtown'처럼 상업을 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다. 집들도 오래된 것들 위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남북으로 이어진 큰 도로는 산과 밭을 양쪽에 끼고 있다. 이 길은 윗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샛길 입구에는 경로당과 출장소가 나란히 있다. 주변은 온통 임야지대이다. 이 길로 가면 학교로 이어진다.

폐교가 안된 학교라지만 그러나 분위기는 아주 썰렁하다. 정문 기둥에는 학교명도 없다. 다만 교실 입구에 '거차 분교장'이라는 아크릴 판으로 된 교명이 있을 뿐이다. 넓은 운동장 뒤로 스탠드 위에 나무에 가린 학교건물이 있다. 계단을 타고 오르면 여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조형물 세 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교사 왼쪽에 부속건물 두 채가 있다. 현재 2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서거차도 분교 2명의 학생이 있다.
서거차도 분교2명의 학생이 있다. ⓒ 이재언

분교장에서 나와 서쪽으로 이어진 길을 가면 교회가 나타난다. 포장도로는 서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몇 m 가지 않아 길은 선착장에서 바로 오는 길과 합류한다. 그 입구에 내연발전소가 있다. 1994년에 준공한 이 내연발전소는 150kw 3기로 철탑 5개로써 상하죽도와 동거차도 등 170가구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윗마을은 분위기가 아랫마을과 판이하게 다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윗마을까지 이어지는 길 좌우로 대부분이 밭들이고 집들은 띄엄띄엄 있다. 밭의 경계선도 돌담으로 되어 있고 집의 담도 돌담 위주다.

쉼터가 자리잡고 있고 곳곳에 골목길이 있다. 길은 댐시설을 갖춘 저수지까지 이어진다. 내연발전소에서 내려가면 출장소와 경로당. 이어 선착장과 물양장이 나타난다. 길은 남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산을 끼고 해안을 도는 길이다. 이곳에서 맞은편 해안도로가 보인다.
이쪽 지역에 집중적으로 어항시설을 해두었다.

해안길을 걸으면서 바다를 보면 두 개의 등대가 인상적이다. 길은 암반지대 위에 만들어진 길인데 원래의 길은 산 아래쪽에 있다. 말 그대로 옛날길이 따로 있는데 축항시설을 하면서 이 길을 만들었다. 일부는 매립을 하고 이어지는 움푹 들어간 지점. 이 지점 위에 집이 몇 채 보이지만 폐가이다.

꺾이고 꺾여서 가는 길은 산을 깎은 흔적이 여실히 드러난다. 왼쪽은 평탄하게 했고 오른쪽은 깎아내렸고. 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절개된 부분으로 층을 이루어 옹벽을 만들어두었다. 이곳에 대형 돌무더기 탑이 조성되어 있다.

도로를 타고 안쪽으로 가면 마을이 이어진다. 마을 입구에 해당되는 곳에 조그마한 방파제가 있고, 산 아래와 산 쪽에는 집이 몇 채 보이는데, 모두 폐가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해안이 나온다. 모래밭이다. 이곳이 '모래미 마을'이다. 모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안도로를 가다가 모래해변 앞에서 오른쪽으로 도로가 나 있다. 이 길도 여기저기 골목길이 있다. 골목길을 오르면 집 끝에서 바로 밭으로 이어진다. 계속 오르면 끝자락에 교회가 있다. 바로 서거차 교회다. 학교터에 세운 교회로 보인다.

교회 앞에서 산 위를 올려다보면 레이더 시설이 보인다. 녹색의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 철탑이 있는데, 두 개의 원형 안테나 위로 레이더처럼 보이는 물체가 돌아가고 있다. 해군기지가 있었던 지역은 바로 이 모래미 지역이다.

진도 서망항  개발된 서거차항구를 대신하는 진도 팽목항 전경
진도 서망항 개발된 서거차항구를 대신하는 진도 팽목항 전경 ⓒ 이재언

일본어선단의 평화선 침범이 잦아지고 대남간첩선의 출몰이 잦아지던 1969년 서거차도 모래미 일대에 해군 60명 가량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기지대장은 소령급으로 전탐업무를 주로 하면서 해역방위 업무도 맡았다. 1992년에 철수했는데, 기지대 주변에 10여 채의 민가와 교회만 남게 되었다.

이곳의 모래해안은 잔잔하다가도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집 안으로 날려 들어갈 것만 같다. 해안에는 겨우 배 한 척이 모래 위에서 나뒹굴 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이곳 역시 섬 입구에서 깊숙한 곳이다. 섬은 남쪽과 동쪽 해안에 소규모의 만이 몇 개 있다.  

생활

서거차도는 섬 입구에 작은 섬들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여 천연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거차도는 주변의 어장이 좋아 1937년 전국 최고의 어획고를 올린 곳으로 옛날에는 이곳에 어획물이 풍부해 파시가 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삼치 파시와 가라지(고등어) 파시가 수시로 있었다. 수십 척의 상업선이 몰려들어 외지인의 인구가 섬주민의 인구를 초과한 적도 있었다. 즉, 이 섬에서 멀지 않은 남해를 '동지나해'라 부르고 근해어장의 중심지로 1930년대 이곳에는 일본어선을 중심으로 한 파시가 시작되고, 1935년에 축항사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축항공사 후 4년 뒤인 1939년 7월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서거차 항에 정박해 있던 20척의 어선이 박살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광복과 더불어 일본 어선단이 물러가고 항구는 다시 한산해졌는데, 1969년에 삼치배 300척이 몰리면서 다시 파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 해역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해군기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후, 한·일 국교정상화 후 대일차관 사업으로 어업전진기지 시설을 했으나 냉동, 급수·급유시설을 갖추지 않는 등의 이유와 삼치마저 흉어를 이루면서 어선들이 목포나 서망항으로 위판하러 가기 때문에 쓸모없이 버려져 있다. 현재의 서거차 항은 한적한 채 20여 척의 어선이 출어해 물고기를 잡고 있다.

진도 서망항  서거차도 항과 조도군도의 물동량이 서망항으로 들어온다.
진도 서망항 서거차도 항과 조도군도의 물동량이 서망항으로 들어온다. ⓒ 이재언

거차도의 역사

역사를 훨씬 거슬러서 올라가면 9세기에 일본승(僧) 엔닌(圓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 때 사흘간 머물렀던 구초도(거차도)이다. 엔닌은 당시 당나라에 근거지를 두고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관장했던 장보고 대사의 배를 탔다. 엔닌은 "구초도에서 동남쪽으로 멀리 탐라도(제주도)가 보인다"고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적었다.

세월호 비극과 서거차도

세월호 침몰 사고가 서거차도 인근 해역에서 일어났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참으로 안타깝고 해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없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바다 영토'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일본과 중국, 대만 등이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무인도를 가지고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무궁무진한 자원을 가졌음에도 이 분야에 대한 현장 전문가가 많지 않다. 특히 입법 기관인 국회는 지역구와 전국구를 막론하고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 없다는 것은 해양 후진국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거차도 먼 바다를 항해하는 대형 컨테이너선  세월호가 잔잔한 이 근처 바다에서 사고를 당하였다.
서거차도 먼 바다를 항해하는 대형 컨테이너선 세월호가 잔잔한 이 근처 바다에서 사고를 당하였다. ⓒ 이재언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해상 무역이 발달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바다를 통해 중국 남부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고 사신이 오갔고, 해상교통은 육상보다 훨씬 빠르고 대량의 물자 수송도 가능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장보고 대사는 1200년 전에 동아시아의 바다로 해상무역항로를 개척하여 한·중·일 해상 네트워크를 연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상 왕국인 고려를 만든 것은 우수한 고려의 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태조 왕건 시절부터 바다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태조 왕건은 집안에 해양 세력이었고 궁예의 수하로 있을 당시에 해군 대장을 맡았다. 이렇게 배 만드는 기술이 발달된 해상 왕국인 고려는 세계로 나아갔다. 이런 사실은 고려를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과 조선은 바다로 진출을 금하는 해금 정책으로 울릉도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고 섬을 비우는 우를 범하였다. 중앙정부는 삼별초 사건과 왜구의 잦은 친입으로 공도 정책을 실시하여 전국의 섬을 통째로 비우고 육지로 나와 살게 하였다. 공도 정책으로 인해 막강했던 해상 세력이 몰락하고 고려와 조선은 쇠약하고 말았다. 

조선의 쇄국 정책은 해양 포기 정책의 산물이다. 그래서 조선은 16세기 임진왜란과 19세기 후반 국권을 상실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불평등의 강화도 조약을 맺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한반도로 불러 들이더니 마침내 조선은 멸망하고 만다. 

바다의 중요성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바다를 너무 홀대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되돌아 보고 크나큰 교훈을 발견해야 한다. 100여 년 전에 만든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에는 바다가 없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바다를 잘 모른다. 바다가 아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한때 해수부를 폐지해서 국토부와 농림부로 이관하고, 방대한 해양정책이 뒷전에 밀린 적도 있었다.

바다와 섬에 대한 비전과 대안이 없어서 나온 부끄러운 사례이다. 이번 사고의 원인은 해상 직업의 경시 사상과 정신력 부족 및 책임감 결여라고 생각된다. 배 선원들의 직업은 위험도가 높고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육지 직업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바다를 천시하는 이조 500년의 양반 사상과 유교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뱃놈, 섬놈 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병픙도 전경  이름 처럼 아름다운 병풍도 근처에서 세월호가 사고가 났다.
병픙도 전경 이름 처럼 아름다운 병풍도 근처에서 세월호가 사고가 났다. ⓒ 이재언

해양고교를 가는 학생은 공부를 잘 못한 아이들이 가고, 배를 타는 사람은 하급으로 취급하는 사고 방식 아래서는 해양국가로 나갈 길은 멀기만 하다. 전국의 해양고와 해양대에 얼마의 예산이 배정되는지, 현장 실습선과 실습을 어떻게 하는지, 대우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때다.

아직도 실습선은 선령이 오래되었고 속력이 느려서 효과적인 실습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바다와 섬을 아우르는 해양 전문가 양성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 바다와 섬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와 답사, 정책을 만들어 선진 국가와 해양국가로 나가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서거차도 주민들은 어업전진기지가 있을 정도로 바다와 어선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목포행 신해호의 정박지이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하여 매우 슬픈 일이지만 이곳 주민들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맨 먼저 달려가서 승객들은 구조하고, 일차로 모든 구조된 승객들이 서가차도에서 모였다가 팽목항으로 배를 타고 나갔다. 우리의 해양문화가 이번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  

● 지리적 개요
서거차도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2.831㎢, 해안선 길이 11㎞, 인구는 196명(2011년 기준)이다.

지명유래
백제시대에 제주도를 왕래하면서 이 섬을 경유하게 되어 거차도라 하였다고 한다. 동쪽에 있어 동거차도, 서쪽에 있다 하여 서거차도라고 부른다.

● 서거차도 가는 길
목포에서 신해7호 8시 30분 출항

동거차도 1구 마을  예전에 잘 살았던 서거차도는 멸치 어장 하나없다.
동거차도 1구 마을 예전에 잘 살았던 서거차도는 멸치 어장 하나없다. ⓒ 이재언

동거차도 멸치  서거차도는 멸치 어장을 하지 않아 가난한 섬이다.
동거차도 멸치 서거차도는 멸치 어장을 하지 않아 가난한 섬이다. ⓒ 이재언

덧붙이는 글 | 전과 동일



#동거차도#병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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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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