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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 알레피 백워터트립(수로유람)을 하고 있는 하우스보트
 남인도 알레피 백워터트립(수로유람)을 하고 있는 하우스보트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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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하나.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고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

이곳 남인도 출신의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The God of Small Things)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그 지역과 관련 있는 소설 한 권을 미리 읽는다거나 혹은 여행 가방에 챙겨 넣어 여행하면서 읽는다면 훨씬 더 그 지역의 삶과 문화가 피부에 와닿을 수 있겠지요. 해서 나는 여행을 떠나면 늘 그 지역의 소설을 한 권쯤은 찾아 읽거나 여행 가방에 챙겨 넣고 가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발칸 반도 여행을 떠나면서는 보스니아 출신 소설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를, 동유럽을 여행하면서는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티베트와 차마고도를 여행하면서는 제임스 힐톤의 <잃어버린 지평선>을…. 뭐 이런 식으로 그 지역과 관련 있는 책 한 권을 읽게 되면 훨씬 여행이 더 흥미롭고 현지의 삶과 문화가 피부에 가까이 다가오게 됩니다.

이번 남인도 여행길에는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 등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를 들추어 보기도 했지만, 이 책들은 너무 방대해서 짧은 여행 동안 읽기에는 무거운 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서사시는 인도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들입니다.

<작은 것들의 신> 훑어 보고 떠난 인도여행

<작은 것들의 신>은 그동안 인도여행을 몇 차례 여행하면서 대강 훑어 보기는 했지만, 완독을 하지는 못했던 소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남인도로 여행을 떠나면서 다시 이 책을 들추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룬다티 로이가 바로 내가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남인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남인도 께랄라주 아예메넴에서 시리아 기독교도인 어머니와 힌두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한 배경을 소설화하여 그녀의 첫 작품으로 출간한 후 영국 최고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아예메넴은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코친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소설은 이란성 쌍둥이, 에스터와 라헬의 경험을 좇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인 아무는 기독교도인으로 사회의 관례를 깨고 힌두교도와 결혼하지만,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친정에 얹혀살면서 쌍둥이와 함께 무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게 됩니다.

로이는 <작은 것들의 신>을 통해 당시 인도 사회의 편협한 신앙과 위선에 대하여 날카롭게 풍자하고 전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를 비롯하여 인도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이슈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로이가 성장한 께랄라 주는 당시 기독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와 공산주의가 공존하면서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요소가 상존했던 곳입니다. 소설은 공산주의와 낙살라이(인도 극좌정당) 당원들의 폭동이 확산되어 전통적 카스트 제도를 뒤흔들며 두려움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어난 두 주일간의 이야기입니다.

로이는 께랄라 사회라는 닫힌 세상 속에서 카스트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을 하면서도 '사랑의 법칙'은 카스트 제도 하에서뿐만 아니라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 문명에 존재한다고 갈파합니다. 이는 유태인 출신인 케르테스 임레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첫 소설 <운명>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임레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아우슈비츠 감옥에서조차도 사랑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서른한 살을 살아오기까지 방황을 하며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서른한 살이라는 나이는 인생항로의 어느 시점에서나 맞이 할 수 있습니다. 이곳 께랄라주를 여행하면서 내가 굳이 로이의 소설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들의 처지도 어쩌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한 단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로유람을 하고 하우스 보트
 수로유람을 하고 하우스 보트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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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문제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모두 사소한 일들로 서서히 잊히게 마련입니다. 그 찰나의 사소한 일을 참지못해 인간은 여러가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인생의 어떤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이 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낯선 여행지에서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를 접하다 보면 적어도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순간을 모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아내가 그렇습니다. 의사의 진달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던 그 암울한 시간들을 아내는 잊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아내가 기대는 유일한 작은 신인지도 모릅니다.

코친을 출발한 버스는 열 두 명의 여행자들을 태우고 알레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 함께한 여행자들을 살펴보니 참으로 흥미로운 점이 있군요. 한 팀은 할머니와 딸, 그리고 손자 이렇게 3대가 함께 왔고, 또 다른 한 팀은 올케와 시누이가 사이좋게 여행을 왔군요. 아주 보기 드문, 그리고 보기에 좋은 동반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팀은 전주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한 네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나이 대를 보니 70대가 다섯 분, 60대가 여섯 분, 그리고 20대가 한 분이군요. 모두가 여행께나 하신 분들 같습니다. 적어도 남인도 여행을 올 정도이면 북인도는 이미 다녀오신 전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유일한 20대 아가씨를 모두 '아가씨'라고 불렀습니다. 요즈음 같은 시절에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이렇게 여행을 떠나 온 20대 아가씨가 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거기에 유머와 재치가 넘쳐흐르는 현지 인도인 가이드 샌딥(20)이 함께 하여 우리는 마치 한 가족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해졌습니다.

알레피로 가는 버스에서 나는 다시 로이의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차창에 문득문득 스쳐 자나가는 호수와 야자수가 운치를 한껏 더해주고 있습니다. 코친에서 그 유명하다는 카타칼리 공연을 보지 못하고 왔지만, 나는 곧 백워터 수로와 우거진 야자수 풍경에 흠뻑 빠지고 있었습니다. 하우스 보트들이 수로를 따라 통통거리며 지나가기도 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보트를 타고 이 수로를 따라 아룬다티 로이의 고향인 아예메넴까지 문학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코친을 출발한 지 약 2시간 만에 우리는 드디어 인도 속의 천국 알레피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좁은 골목에 정차를 한 버스에서 내리자 호수는 보이지 않고 가무잡잡한 남인도의 건장한 사내들 세 명이 버스로 다가와 웃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단단한 갈색 피부, 동그란 눈동자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들은 버스에서 우리들의 여행 가방을 챙겨들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맑은 수로 위에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 환성이 절로 나와 

코코넛 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골목길, 그들의 뒤를 따라가자 놀랍게도 꿈에서나 보았음직한 아름다운 강과 수로 그리고 하우스 보트들이 나타났습니다.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훑고 지나갑니다. 

"와아, 강이다!"
"저기~ 배 좀 봐요!"
"배 위에 집을 지어 놓았네요!"
"여기가 낙원이네요!"

무더운 날씨와 버스여행에 지친 동반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식 환성을 지르며 맑은 수로 위에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자 갑자기 기운들이 솟아나는 모양입니다. 

하우스 보트 선상 모습
 하우스 보트 선상 모습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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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강가에 정박한 두 개의 하우스 보트에 올라탔습니다. 오늘 밤은 이곳 하우스 보트에서 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탈 하우스 보트 바로 옆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있군요. 많은 사람들의 망자를 보내는 마지막 고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영원히 살 것 같지만, 반드시 그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망자의 영혼을 달래는 주문을 듣게되니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흐르는 강가에 하나로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지
잃어버린 시간은 없다고
꿈이 살며시 가버리기 전에
꿈을 이루라고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꿈을 잃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잃게 된다고.('작은 것들의 신'들 중에서)

하우스보트에 오른 순간, 나는 '작은 것들의 신'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시의 내용이 지금 우리 삶의 순간에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에 봉착을 하게되지만, 살아있는 순간은 이렇게 또 행복한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우스 보트에 여장이 푸니 배 안에 낭만이 가득 차오르고 있군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13일까지 남인도 여행을 한 내용입니다.



태그:#남인도 기행, #하우스 보트 , #알레피, #백워터트립, #작은 것들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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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여행, 작은 나눔, 영혼이 따뜻한 이야기 등 살맛나는 기사를 발굴해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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