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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찾아 꽃샘추위에 시달리며 달려갔던 잊지 못할 새벽녘 섬진강길.
 친구를 찾아 꽃샘추위에 시달리며 달려갔던 잊지 못할 새벽녘 섬진강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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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 추위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깨어나게 해주는 데에는 남도 봄꽃 여행이 제일이 아닐까 싶다.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봄 축제 소식에 절로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런 내게 잊기 힘든 남녘 봄 여행을 경험하게 해준 계기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은 영화에서 비롯됐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The Straight Story)가 바로 그것. 이 영화는 1999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지팡이 없이는 걷기도 힘든 일흔살 노인 앨빈이 오해 때문에 연락을 끊고 지냈던 형을 만나고자 한 달여간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운전을 못하는 노인은 낡은 잔디깎이 기계를 개조해 캠핑용 트랙터를 만들어 거기에 소시지와 야영용 장작 등을 가득 싣고 형이 살고 있다는 곳으로 무작정 길을 떠난다.

영화 속 수제 캠핑카가 달리는 속도는 시속 5마일(약 8킬로미터).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다. 주인공은 길 위에서 야영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형을 추억한다. 그리고 마침내 늙고 병든 형과 감동의 해후를 한다. 웃고, 찡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슴이 찡해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한 사람의 얼굴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친구 찾아 무작정 떠난 나만의 '스트레이트 스토리'

내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친구를 떠올리게 한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내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친구를 떠올리게 한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 앤더슨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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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동창모임을 통해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는 소위 '잘나가는' 증권사 직원이었다. 그러다 2008년 세상을 발칵 뒤흔들어 놨던 미국 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다음해 쫓기듯 처가가 있는 경상남도 하동으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 친구와 연락이 끊겼다. 그는 2008년 전까지만 해도 수년간 많은 수익을 올려줘 좋아했던 친구들과 지인들을 한순간에 등진 것이다. 오랜 우정도, 추억도, '돈' 앞에서는 봄날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운 것임을 절감했다.

그 친구를 만나려는 운명이었는지 그가 떠난 지 1년 뒤인 어느 봄날, 우연히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보게 됐다. 그리고 주인공이 이용한 트랙터 대신 '애마 자전거'를 타고 친구가 산다는 하동읍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금요일 오후 10시 50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다음날 오전 4시에 섬진강가의 구례구역에 내려, 강변을 따라 하동까지 약 45km를 달릴 계획이었다. 친구의 연락처가 바뀌어 찾아간다는 연락도 못 한 채 떠났다. 무작정 여행이라 불안하면서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에 무궁화호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칠흑 같은 어둠속을 밤새 달린 무궁화호 기차는 새벽 강가 안갯속에 있는 구례구역에 나와 애마 자전거를 내려줬다. 나는 뜨거운 국물로 몸을 풀 겸 역 앞에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에서 이른 아침밥을 먹었다. 주인장은 고맙게도 뜨끈한 방구석에 누워 한숨 자고 가라며 인심을 베풀었다. 동이 트려는 어스름 새벽녘의 안갯속으로 나서는 길, 깜짝 방문에 놀랄 친구의 표정을 상상하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불끈 힘이 솟았다.

사실 이 '무작정 여행'은 친구가 나를 상대로 먼저 한 적이 있어서 언젠가 꼭 갚아주리라 마음먹었던 일이기도 했다. 20대 초반 입대해 정신없이 졸병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주말에 연락도 없이 녀석이 면회를 왔었다.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야 하는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어떻게 연락도 안 하고 왔느냐고 물어보니, 그 친구는 여행 삼아 왔다며 씩 웃었다. 녀석은 괴짜였다. 녀석 덕분에 외박을 나가 간절히 먹고 싶었던 짜장면 곱빼기를 원 없이 먹었다.       

안개와 꽃샘추위 속에 달려간 새벽녘 섬진강변

새벽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 섬진강, 덕택에 물소리가 더없이 청명하게 들려온다.
 새벽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 섬진강, 덕택에 물소리가 더없이 청명하게 들려온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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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눈이 내리고 봄이 오면 꽃이 피듯 매년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지만, 안개 낀 새벽녘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을 달리는 기분은 무척 특별했다. 일찍 일어난 새들의 명랑한 지저귐,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강물소리…. 자전거를 타고 처음 겪는 경험인지라 더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낭만적일 것만 같은 봄날 여행에 꽃샘추위라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한 낮의 따사로웠던 봄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한 꽃샘추위. 나는 장갑을 벗고 입김을 호호 불었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의 체온을 올리고자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이른 새벽이라 꽃샘추위를 피할 가게들도 열지 않아 고통은 배가됐다. 그런데 길섶에 문을 연 작은 건축사무소가 구세주처럼 눈에 들어왔고,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에는 오십대 나이의 아저씨가 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여기저기 많이도 '싸돌아다녔다'면서 푸근한 전라도 사투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아저씨는 몸을 녹여주는 하동 녹차는 물론 강 건너에 있는 화엄사 주지스님에게 보여주고 절에서 하룻밤 묵으라고 자기 명함까지 줬다. 만약 나라면 새벽에 불쑥 들어온 시커먼 남성에게 이런 친절과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고마움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성찰까지 느꼈다. 여기에 자전거 여행의 매력은 덤으로 따라붙었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 주인공 할아버지 앨빈은 사이클을 타는 젊은이들과 하룻밤을 같이 야영하게 된다. 한 청년이 앨빈에게 '늙어서 나쁜 점이 뭐냐'는 질문을 던졌고, 앨빈은 이렇게 답했다.

"늙어서 가장 나쁜 점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이지."     

하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섬진강변에서 만난 고마운 아저씨는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어려움에 처한 내게 도움을 베풀었을 테니 말이다.

어릴 적 동무들을 떠올리게 했던 섬진강가 사는 풋풋한 웃음을 지닌 소년.
 어릴 적 동무들을 떠올리게 했던 섬진강가 사는 풋풋한 웃음을 지닌 소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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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던 새벽이 지났다. 아침해가 뜨면서 비로소 섬진강과 강변 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코앞에 지리산이 보이고, 강변길은 험난한 오르막 없이 순탄하게 펼쳐져 있었다. 푸근하고 넉넉한 섬진강을 닮았다. 강은 전라도 구례를 지나 경상도 하동으로 이어진다. 섬진강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전라도 땅과 경상도 땅,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을 나눈 인간의 구분이 헛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지나가는 트럭 외에는 차가 없는 도로 위를 홀로 달리자니 천상의 길을 산책하는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지저귀는 새들만큼이나 부지런한 농부들이 일하러 나서는 모습이 경건해 보여 쉬이 추월하지 못하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느냐, 왜 혼자 가느냐"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해주는 아주머니도 만나고, 마음껏 웃는 표정이 내 어릴 적 동무를 떠올리게 하는 소년 그리고 소년의 여동생을 마주치기도 했다. 소년은 이른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는 여행자가 신기했는지 자전거를 만지며 연신 질문을 해댔다. 귀여운 여동생은 부끄러운 나머지 오빠 등 뒤로 숨기만 했다. 이른 아침 한갓진 섬진강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나오는 풍경을 품고 있었다.

"자전거 타고 왔다, 짜샤!"

귀여운 조개 재첩에 얄궂은 뜻이 있는 줄 생각지도 못했다.
 귀여운 조개 재첩에 얄궂은 뜻이 있는 줄 생각지도 못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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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남도대교를 건너면 화개장터다. 아직 덜 깨어난 화개장터 주변, 막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아침 겸 점심으로 섬진강의 명물 재첩국을 먹었다. 새끼손톱만한 작은 조갯살이 귀여워 선뜻 먹지 못하고 사진을 찍으며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조개의 이름에 대해 설명까지 해주셨다. 이 조개를 자주 먹으면 '첩이 또 생긴다'고 해서 재첩이라나…. 그 이름 참 얄궂다.
    
어쨌거나 재첩국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따스한 봄볕까지 내리쬐니 이제 친구가 사는 하동읍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듯한 여유가 생겼다. 전에도 화개장터에 몇 번 놀러 왔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그 녀석이 살고 있을 줄이야.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주인공 앨빈이 고장나버린 잔디 깎기 트랙터를 우여곡절 끝에 수리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연을 벗 삼아 느릿느릿 형에게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여인이 앨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아이들 각각에게 막대기를 하나씩 주고 한 명씩 부러뜨려 보라고 했지요. 물론 그 애들은 쉽게 부러뜨리죠. 그리고 다시 막대기를 묶음으로 묶어서 그걸 부러뜨려 보라고 말했어요. 물론 그 애들은 못했어요. 나는 말했죠, 그 묶음은 그게 바로 가족이다."

태어나서 자랐고 일가를 이뤘던 서울을 떠나 섬진강변의 동네 하동읍에 정착해 다시 삶을 추스릴 수 있었던 친구도 가족이 있었기에 부러지지 않고 힘을 냈으리라.

한강만 보고 살았던 내게 강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봄날의 연둣빛 섬진강.
 한강만 보고 살았던 내게 강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봄날의 연둣빛 섬진강.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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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으로 갈수록 점점 모래가 많아지는 섬진강변은 봄날 특유의 연둣빛 수풀과 나무들이 어울려 서울 한강에 익숙한 내게 '강의 본래 모습이 이런 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줬다. 들판의 농부처럼, 갯벌에 나온 할머니들처럼, 허리를 반으로 숙여 강가에서 재첩을 캐는 아낙네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열심히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하동읍의 멋진 소나무 숲 '하동송림'이 자전거 여행자를 맞이해줬다.

매 2일과 7일마다 오일장이 열리는 하동읍 시장 안에 들어가 구경을 하다가 친구 처가에서 오래 전부터 운영했다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직도 투자금과 관련해 시시비비를 따지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지 친구의 아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출타 중인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줬다.

수화기를 들자 대뜸 "야! 쫑(학창시절 내 별명이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라며 연신 숨넘어갈 듯 물음표를 날리는 녀석에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친구 아내와 장인이 안심하듯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전거 타고 왔다, 짜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 동생 앨빈 스트레이트와 형 라일 스트레이트가 보여줬던 것처럼 안쓰러움과 미안함 그리고 그리움이 담긴 표정을 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로가 많은 말을 하지 못했던 건 영화의 결말과 비슷했던 것 같다.


태그:#섬진강, #자전거여행, #하동, #재첩, #스트레이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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